[세상읽기] 부산진 수상비행장을 아세요?

박지욱 신경과 전문의·메디컬티스트 2023. 1. 2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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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욱 신경과 전문의·메디컬티스트

1903년에 비행기가 처음 나오고 곧이어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년)을 겪으면서 부자들의 위험스러운 장난감 수준이었던 비행기는 놀라운 잠재력을 입증했다. 공중 수송은 기본이고 관측 정찰 공격용 무기로서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었다. 전쟁이 끝나자 강대국들은 본격적으로 비행기를 개량하고 항로를 개척하기 시작한다. 식민지 조선도 이러한 흐름에 예외가 아니어서 일찌감치 항공 역사에 편입된다. 당시 비행기는 항속 거리가 짧아 장거리 비행인 경우에는 여러 번을 기착해 목적지로 날아갔다. 사방이 바다인 일본은 대륙으로 날아가려면 반드시 한반도를 거쳐야 했다. 덕분에 한반도는 국제선 항로의 요충지가 된다.

약 95년 전인 1929년에 일본에서 조선을 거쳐 만주까지 날아가는 민간항공의 국제선 정기 항공로가 열린다. 일본에서 만주로 가는 여객기가 후쿠오카를 이륙하면 한반도에 첫 기착하는 곳은 울산(나중에는 대구)이었다. 다시 서울, 평양에 내린 후 최종 목적지인 요동반도의 다롄으로 날아갔다. 불행히도 부산은 국제선 항로에서 제외됐다.

왜 부산은 제외됐을까? 부산은 조선시대부터 일본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조선 말 일본인의 교역창구이자 거주지인 왜관도 부산 초량(지금의 용두산 주변부)에 있었다. 1876년 부산이 개항하자 일본인은 부산에 진출해 빠른 속도로 세력을 넓혔다. 1905년에는 경부선 철도가 열렸다. 곧이어 일본 철도와 경부선을 이어주는 부관(부산~시모노세키)연락선도 취항했다. 경부선의 출발역은 연락선 부두와 가까운 초량왜관 턱 앞에 만들었다(지금의 중앙동). 원래 부산의 중심은 동래였지만 경부선 종점을 여기로 유치하며 조선인이 장악해온 동래상권은 궤멸됐다. 이 무렵 부산의 핵심 요지는 모두 일본인의 수중에 떨어졌다. 1925년에는 경남도청도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겼다. 1930년을 전후해 부산은 한반도 최대의 항구도시, 해운과 철도의 요충지, 그리고 최고의 인구증가율을 보이는 활력 넘치는 도시였다.

그런데 왜 조선 식민지의 핵심 도시인 부산 대신 낙후하고 비좁은 울산비행장을 선택한 걸까? 군사적인 이유에서다. 후쿠오카와 부산은 220㎞ 거리로 대한해협 횡단 최단거리였지만 도중에 쓰시마의 일본해군 요새, 시모노세키, 진해의 해군기지가 내려다보였다. 일본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부산을 피해 450㎞나 떨어진 울산으로 날아갔다. 당연히 불편했다.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시대에 10시간이나 걸리는 부산행 연락선을 견딜 수 없는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1935년 가을부터 50인승 비행정(수상비행기의 일종)을 띄운다. 주 3편 운항됐지만 요금이 비싸 부자만 탈 수 있었다. 대한해협은 1시간30분 거리로 가까워졌다.

그렇다면 부산의 수상비행장은 어디에 있었을까? 바람과 파도 없이 잔잔하면서 주변에 높은 산이나 돌출된 지형이 없는 탁 트인 바다가 필요했다. 처음에는 수영만과 초량(지금의 북항) 앞바다가 후보지였지만 최종 낙점된 곳은 부산진 앞바다였다. 아마 동천이 흘러드는 바다(지금의 5부두~7부두 근처)가 아니었을까? 대형 비행정이 뜨고 내리던 풍경은 생각만 해도 굉장했을 텐데 어찌 된 일인지 그 풍경에 대한 기록은 전무한 실정이다.


이렇게 1939년 무렵에는 부산진 수상비행장이 부산의 하늘 관문이 되었다. 그 외 군용 비행장으로는 일본 육군의 수영비행장과 일본 해군의 김해비행장이 있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한반도의 민항 운항은 중단된다. 따라서 부산진 수상비행장도 문을 닫았을 것이다. 광복 후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맞은 6·25 전쟁 때 낙동강 방어선 안쪽에 있는 김해비행장과 수영비행장은 군사적 중요성이 커졌다. 이후로도 민항이 사용해 시민 기억에도 남았다. 하지만 부산진 수상비행장은 영영 문을 열지 못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부산항 부두가 점점 확장됐고, 비행정의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를 수출입 화물선들의 긴 뱃고동 소리가 대신했다.

북항이 새 모습으로 시민 품으로 되돌아온다고 들었다. 문화공간도 생긴다 한다. 그 땅에 부산항 역사를 개괄하는 박물관도 생기는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한 귀퉁이에 우리가 까맣게 잊은 부산진 수상비행장 이야기도 빼먹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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