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의 사는 게 뭐길래] 속도를 못 따라잡아 밀려날 날, 내게도 오겠지

장강명 소설가 2023. 1. 2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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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구, 드디어 끝나나 보다. 정말 길었다. 오는 30일부터 실내 마스크 착용 의무가 대부분 풀린다는 뉴스를 듣고 떠올린 생각이다. 나처럼 생각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으리라. 기사에는 마스크 의무화 지침이 풀린 게 2020년 10월 13일부터 계산해 2년 3개월 만이라고 나와 있었다.

2020년 10월 13일을 기점으로 잡은 건 아마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의 발표가 그날이어서 그런 것 같은데, 사실 그 전에도 여러 지자체가 행정명령으로 시민들에게 마스크 착용을 강제하고 있었다. 서울은 그해 8월부터 실외에서도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다. 대중교통에서 반드시 마스크를 써야 했던 것은 그 석 달 전부터였다. 마스크 대란이 벌어진 것은 2020년 2월. 대략 그 즈음부터 마스크를 쓰지 않고 다니면 눈총을 사는 분위기였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3년 가까이 마스크를 써왔다고 해도 큰 과장이 아니다.

이 날짜들을 확인하려고 지난 기사들을 검색하다 보니 격세지감이라는 단어로는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 현기증이 인다. 2020년 상반기 기사는 온통 코로나, 코로나였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공포가 뚝뚝 흘러내렸다. 팩트 체크 기사 중에는 ‘눈만 마주쳐도 감염된다’는 소문을 검증하는 내용도 있다. 이 소문 때문인지 공항에서는 물안경을 쓰고 다니는 사람도 볼 수 있었다. 코로나 예방 효과가 있다며 영양제나 녹차, 공기청정기, 심지어 베갯잇을 홍보한 봉이 김선달식 마케팅도 넘쳐 났다.

두려움은 혐오를 낳는다. 세계 곳곳에서 아시아계가 혐오 범죄의 표적이 됐다. 이탈리아의 어느 학교는 동양계 학생들만 수업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한국에서도 한 배달 업체 노조가 “‘중국인 밀집 지역’에는 배달 금지를 추진하라”고 사측에 요구했다가 비판을 받고 사과하는 일이 있었다. 나는 방역 당국이 새 확진자의 동선을 그토록 상세히 공개하면서 개인 정보 보호에 무심했던 것, 그리고 대중이 초기 확진자들에게 뭇매를 가했던 것은 한국 사회가 두고두고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본다.

이 모든 일은 결국 무엇이었을까? 시간이 지나면 어떤 의미로 기억될까? 2020년 상반기의 나도, 2023년 초의 나도 좋은 평가자는 못 된다. 내가 본 것이 너무 적고, 인간은 여러 인지 편향에 시달린다. 처음 경험하는 일에 과잉 반응하고,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것을 자기 노력 덕분이라고 여기곤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인류 역사가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는 식의 진단은 아무래도 호들갑이었다고 내심 믿는다. 팬데믹이 한창일 때도 그런 주장에는 코웃음을 쳤고, 지금은 더 그렇다. 이게 중세 흑사병 수준까지는 아니었잖은가.

그렇다고 이 사태가 한때의 해프닝 같지도 않다. 가장 고개를 끄덕거리며 읽은 관련 도서는 뉴욕대 스턴 경영대학원 교수인 스콧 갤러웨이가 쓴 ‘거대한 가속’이었다. 갤러웨이는 팬데믹이 트렌드의 방향이 아니라 속도에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예를 들어 화상 회의 시스템과 재택근무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도입되고 확산됐을 것이다. 그런데 팬데믹이 그 추세를 무자비하게 앞당겼다.

그리고 이런 가속은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사무실에 앉아서 근무하고, 이메일을 많이 쓰며, 상대적으로 수입이 높은 화이트칼라는 이런 변화에 그럭저럭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특정 장소에서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 육체 노동자나 서비스직은 재택근무를 할 수 없었고, 이 부문에서 많은 일자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주식과 부동산을 가진 최상위 자산가들은 이 시기에 큰돈을 벌었다.

2023년 1월 현재 나는 코로나19 바이러스 범유행을 우리가 사는 ‘가속 사회’나 ‘가속 시대’의 얼굴을 보게 된 사건으로 기억한다. 이 사회 시스템은, 적어도 사회 차원에서는 꽤나 질기고 역동적인 듯하다. 나는 우리가, 적어도 사회 차원에서는 인구 절벽이나 기후 위기 같은 혹독한 충격을 어떻게든 견뎌내고 꾸역꾸역 생존하리라 생각한다. 인간 집단은 필요할 때 놀라운 역동성을 발휘한다. 그 역동성이 어떤 이들에게 매우 가혹하다는 게 진짜 재앙이다. 나라고 예외일까. 언젠가 변화 방향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여건이 안 돼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적자(適者)에서 밀려날 날이 오겠지. 등골이 서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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