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 클래식]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의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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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시네마 클래식’은 영화와 음악계의 이모저모를 들려드리는 ‘이야기 사랑방’입니다. 오늘은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프랑스 소설가 아니 에르노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와 에르노가 직접 제작에 참여한 다큐멘터리 등 세 편을 모았습니다.
영화 단순한 열정(2월 1일 극장 개봉)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프랑스·벨기에 합작 영화 ‘단순한 열정’은 지난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여성 작가 아니 에르노의 동명(同名)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 1991년 출간된 원작 소설과 마찬가지로 외국 외교관인 연하 유부남과 나눴던 밀회 경험을 고스란히 담았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는 작가의 지론은 자신의 불륜일 때조차 예외가 없었다. 상대 남자에 대한 그리움에 사로잡혀 지하철역을 놓치고, 정사의 흔적을 간직하기 위해 샤워마저 미루는 일화까지 원작은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어쩌면 그렇기에 ‘치정(癡情)’이라 부르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의 묘사 수위 역시 원작 못지않다. 성애(性愛) 장면은 물론, 남녀 전신 노출도 수차례 반복된다. 활자의 예술인 문학이 영상 매체인 영화로 옮겨졌을 때 배가되는 직접성 때문에 자칫 불편함이 들 수도 있다. 국내 상영 등급은 당연히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는 2020년 9월 토론토 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하지만 국내 개봉을 앞둔 현 시점에서 복기했을 때 결과적 실착이 두 가지 있다. 시대적 배경과 캐스팅이다. 우선 소련 붕괴 직전의 냉전 말기라는 원작 배경을 21세기 현 시점으로 옮겼다. 그러다 보니 파리 주재 외교관인 상대 남성 알렉산드르(세르게이 폴루닌) 역시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아니라 푸틴 대통령을 지지하는 러시아 대사관 직원으로 엉뚱하게 바뀌었다.
공교롭게 남자 주인공 역을 맡은 러시아 발레리노 겸 배우 세르게이 폴루닌(33) 역시 실제로 어깨와 가슴에 푸틴의 문신을 새긴 극렬 지지자다.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에는 푸틴을 옹호하는 발언으로 서방 공연이 취소되기도 했다. 한국이 지각 개봉이지만 그 시차를 감안하더라도 ‘온몸이 문신투성이인 친(親)푸틴 외교관을 사랑하는 프랑스 여주인공’이라는 영화 설정에는 공감대의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는 가슴의 푸틴 문신을 분장으로 가렸다고 영국 가디언은 전했다.
에르노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자기 고백적 성격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은 구성 방식 역시 아쉽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불륜을 고백하는 여주인공의 초반 독백 장면은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 뒤에는 다소 진부한 치정극으로 전락한다. 원작은 ‘삶이 가장 아름다웠던 그 시절’과 작별하면서도 동시에 간직하고자 하는 작가의 모순적 몸부림에 가깝다. 이별 직후 시점에 과거를 돌아보는 방식을 택한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영화는 현재적 시점에 머무느라 그 애절함까지 온전하게 담지 못한다.
다큐멘터리 ‘슈퍼 에이트 시절’(2022년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책 하나로는 바라는 만큼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스 소설가 아니 에르노에게 어울리는 영화 장르가 있다면 단연 다큐멘터리일 것이다.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는 쓴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작가의 지론처럼 소설은 그녀의 삶이었으니까.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서 국내 공개된 ‘슈퍼 에이트 시절(The Super 8 Years)’은 에르노의 삶을 담은 자전적 다큐멘터리다.
이 영상은 그저 작가의 삶을 기록한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작고한 전 남편 필립 에르노가 1972~1981년 직접 촬영한 영상을 바탕으로 이들 부부의 아들인 다비드 에르노 브리오가 연출을 맡았다. 작가 에르노 역시 공동 연출뿐 아니라 직접 내레이션까지 맡아서 화자(話者) 역할을 하고 있다. 작품 제목인 ‘슈퍼 에이트’은 전 남편이 사용했던 8mm 카메라의 이름이다. 이를테면 온 가족이 매달린 가내 수공업 같은 작품인 셈이다.
다큐의 상당 부분은 이들 가족의 일상이나 여행 장면들로 채워져 있다. 이들의 행선지는 영국·스페인은 물론이고 냉전 당시 공산권이었던 소련과 알바니아,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와 남미 칠레까지 아우른다. 하지만 행복했던 옛 시절에 대한 아련한 추억일 것이라는 짐작은 다큐 속 작가의 육성을 통해서 조금씩 깨져 간다.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괴로웠던 시절이었다” “학교 수업이 없는 날이면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고 몰래 글을 썼다.”
가사 노동과 육아라는 의무와 작가적 열망 사이의 내면적 충돌은 점차 파열음을 일으킨다. 1981년 소설 ‘얼어붙은 여자’에서도 작가는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안시에서 날마다 그와 나의 차이를 경험했고, 옹졸한 여자의 세계에 빠졌고, 자질구레한 걱정들로 질식할 것 같았다. 고독. 나는 가정의 수호자, 식구들 생필품과 유지보수 담당자가 되었다.”
연대기적 구성을 택한 다큐 화면에도 이들 부부의 거리감은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다큐 초반에 작가 에르노의 얼굴은 화면을 가득 채운다. 아마도 카메라를 들고서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뒷모습만 잡히거나 주변으로 밀려난다. 가정 불화가 불거지는 후반부에 이르면 영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 부부의 얼굴이 아니라 여행 장소들이다. 결국 이들 부부는 1980년대 두 아들과 영상을 남긴 채 결별했다. 작가는 전 남편이 남기고 떠난 영상을 보면서 “오래된 기억을 우리에게 버렸다”고 말한다. 비통한 구절인데도 정작 작가의 육성은 담담하기 이를 데 없다.
작가 에르노의 회고처럼 ‘추억의 파편’인 영상들을 모아서 완성한 ‘가족의 자서전’이다. 에르노의 초기 시절을 엿보는 동시에 ‘자전적 경험에 충실한 작품을 쓴다’는 지론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물. 글이 아니라 영상에서도 에르노는 역시 에르노다.
영화 ‘레벤느망’(2022년 극장 개봉)
프랑스 여성 감독 오드리 디완의 ‘레벤느망’은 2021년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한국어로 사건(happening)을 뜻하는 ‘레벤느망’은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동명 소설을 극화한 작품이다. 1960년대를 배경으로 프랑스 여대생이 임신 중절 수술을 고민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디완 감독은 수상 당시 소감에서 “나는 분노와 갈망, 내 배, 내 배짱, 내 마음과 내 머리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기 전에는 다소간의 심호흡이 필요하다. 작가가 겪었던 임신 중절의 경험을 영화화한 이 작품은 결코 에두르는 법 없이 주제를 향해서 직진한다. 전도유망한 문학도 ‘안’(아나마리아 바르톨로메이)은 원치 않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주변에 알리지 못한 채 고민에 빠진다. 극사실주의적인 접근을 통해서 ‘영화적 묘사의 극한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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