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을 죽일 권리

한겨레 2023. 1. 25.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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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결]

2022년 10월25일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옛 우생보호법 문제의 전면 해결을 목표로 하는 전국 집회에 참가하여 소송 당사자이자 피해자로서 수어로 발화하는 아사쿠라 노리코(가명)의 모습. 옛 우생보호법 재판을 지원하는 후쿠오카 모임 제공

[숨&결] 이길보라 | 영화감독·작가

일본 후쿠오카지방법원에 제기된, 옛 우생보호법에 따른 강제 불임수술 관련 국가 상대 손해배상청구 소송 11회 변론기일에서 생긴 일이다. 피고는 손해배상청구권의 소멸시효를 언급하며, 어째서 강제 불임시술을 받은 이후 즉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는지 물었다. 이에 원고 변호인단은 옛 우생보호법에 따른 강제 불임수술과 관련해 국가가 배상하라는 판결을 한 오사카고등법원의 판례를 언급했다. 피해자들이 소송을 제기하기 위한 정보에 접근하기 어렵고 상담받을 기회에 접근이 현저하게 곤란한 경우, 시효정지 규정에 따라 그 상태가 해소된 후 6개월이 지날 때까지는 제척기간의 적용이 제한된다는 판결이었다. 원고 쪽 변호사는 말을 이었다.

“따라서 본 소송을 제기한 원고에게 제척기간을 적용하는 것, 시간 경과를 이유로 손해배상청구권을 소멸시키는 것은 정의와 공평의 이념에 반하기에 허용될 수 없습니다.”

변호사의 말을 원고석 앞 수어통역사가 수어로 옮겼다. 원고 아사쿠라 노리코(가명)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청석 앞에 선 또 다른 수어통역사가 동시에 통역했다. 시각언어를 사용하는 농인 방청객이 대다수인 재판장에서 탄식하고 신음하는 ‘데프 보이스’(농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술 내용은 원고석과 피고석 위에 배치된 모니터를 통해 문자언어로 통역됐다.

변호사는 옛 우생보호법은 사라졌지만 이들이 처한 사회적 현실과 우생 사상은 계속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수십년 전 어떤 설명도 없이 강제로 끌려가 받았던 불임시술이 정확하게 우생보호법에 근거한 수술임을 인지하고 즉시 변호사를 만나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장애인이 얼마나 되겠냐고 물었다. 그의 음성언어가 네명의 수어통역사를 거쳐 농인 원고와 농인 방청객들에게 전달됐다. 음성언어와 문자언어를 사용하는 비장애인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법이 정말로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정의로운지에 관한 질문이었다.

우생보호법은 사라졌지만 우생 사상은 건재하다. 2022년 12월, 홋카이도의 한 사회복지법인이 운영하는 그룹홈에서 20년 전부터 지적장애가 있는 입주자가 결혼이나 동거를 원할 경우 불임시술을 강제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를 거부한 이들에게는 취업 지원을 중단하고 퇴소를 요구했다. 변호사는 이를 언급하며 우생 사상에 기초한 가해의 구조는 우생보호법이 폐지된 후에도 우리 사회 안에 존재한다고, 그러므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법정기간인 제척기간을 따지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 되물었다.

2023년 1월, 한국에서는 38년 동안 돌보았던 중증장애인 딸을 살해한 어머니에게 법원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하며 선처한 일이 있었다. 재판부는 아무리 어머니라고 해도 딸의 생명을 결정할 권리는 없다고 전제했지만, 중증장애인 가족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는 국가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며 이번 사건이 피고인만의 잘못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이는 지속해서 벌어지는 가족에 의한 장애인 살인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누군가를 살해할 권리가, 장애인을 평생 돌봐온 가족이라 해도, 과연 있는지 질문하게 된다.

생각해본다. 나의 비장애인 할머니가 청각장애인인 나의 아버지를 죽이고자 한다면, 할머니의 손녀이자 아버지의 딸인 나는 누구 편을 들어야 할까.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장애아를 키워야 했던 할머니를 이해하면서도 나를 낳고 길러낸 아버지와 그의 삶을 생각한다면 나는 그 누구의 편도 쉽게 들 수 없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보자. 2023년 1월23일 구마모토지방법원은 옛 우생보호법에 의한 강제 불임수술 관련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국가의 배상책임을 일부 인정하며 원고 쪽 손을 들어줬다. 일본 전역에서 도쿄, 오사카에 이은 세번째 승소 판결이며 지방법원에서 최초로 원고가 승리한 경우다. 재판장은 20년이 지나 배상청구권이 소멸되는 제척기간을 적용하지 않겠다며 이는 “정의와 공평의 이념에 반한다”고 판결했다. 장애인을 죽일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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