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익수, 공간, 문화, 그리고 FC서울論

골닷컴 2023. 1. 25.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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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닷컴, 태국 후아힌] 긴 고속도로를 빠져나오니 바다 냄새가 난다. 지나치는 건물들 틈새로 해안가가 힐끔힐끔 보인다. 태양은 높고 뜨겁다. 호루라기가 길게 울린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훈련 시작을 알린다. 안익수 감독이다.

늦은 오후 훈련이 끝나고 FC서울 선수단은 저녁 식사를 했다. 선수단 주무에 따르면, 매일 저녁 식사 후 안익수 감독과 코칭스태프는 늦은 밤까지 회의를 한다. 훈련을 리뷰하고 다음 날 훈련을 계획하는 내용이다. 저녁 식사를 하고 잡은 인터뷰이기에 길어봤자 한 시간이겠거니 싶었다. 장소는 선수단 호텔의 루프탑바로 정했다.

안익수 감독은 푹신한 소파에 앉으면서 “야~ 여기 처음 올라와 본다”라고 말한다. 부대시설로 유명한 호텔 안에서 그는 로비와 식당, 미팅룸을 벗어난 적이 없다. 저녁 8시, 안익수 감독, 구단 직원, 그리고 기자 셋이 앉아 인터뷰를 시작했다. 자리는 정확히 네 시간 이어졌다. 이야기는 FC서울에서 K리그로, 한국 축구로 확장과 축소를 반복했다. 테이블 위의 망고쥬스는 이미 수분과 즙이 분리되어 더는 맛을 느낄 수 없었다.

* 항상 배우는 사람

안익수 감독은 유별난 케이스다. 고등학생 때 축구를 시작해서 K리그 우승을 경험하고 FIFA 월드컵 최종 엔트리까지 든 인물이다. 축구를 더 알고 싶어서 박사 학위를 땄고, 축구를 더 보고 싶어서 영국, 독일, 일본으로 돌아다녔다. 배움을 위한 재능과 의지를 겸비했다는 뜻이다. 이런 사람이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을 대충 지나쳤을 리가 없다.

“새벽 4시 경기까지 중계해준 경기는 전부 봤다. (스마트폰 메모를 보이며) 월드컵이 끝난 뒤에 포인트를 17가지 정도로 정리했다.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경기들을 지금 분석팀에서 학습 자료로 분석 중이다. 일본 가고시마에서 그 자료를 선수들에게 ‘우리가 하는 축구가 이런 거다’라고 공유할 생각이다.”

월드컵 출전국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팀은 어디였을까? 안익수 감독은 어느 팀의 축구를 지향하고 있을까? 정확한 이름을 원했던 질문에 “파트별로 다르다”라는 현답이 돌아왔다. “아르헨티나는 기술적인 듯하지만 수비가 상당히 터프했다. 상대 공격수를 괴롭히는 수비를 할 줄 알면서도 조직적이었다. 크로아티아의 미드필더 3명은 위치 변화 상황에서 우리와 비슷했다. 스페인은 우리처럼 4-1-4-1을 쓰는데 미드필더가 측면으로 벌리면서 공격을 푼다. 프랑스는 윙백이 뒤에 머무르면서 백3를 만들어 빌드업한다. 모로코로부터도 배울 점이 있다. 우리는 계속 전방압박을 하는데, 모로코는 리듬을 타면서 압박했다. 상대의 공격 템포를 늦추면서 자기 수비 패턴으로 유도한다. 우리는 그런 부분들을 업데이트하려고 한다.”


* FC서울의 책임론

월드컵 이야기는 어쩔 수 없이 비교로 흐른다. 한국과 세계 정상급, K리그와 유럽 리그 식으로 구분된 위에서 우열이 갈린다. 월드컵에서 봤던 축구가 FC서울 혹은 K리그에서도 실행될 수 있을까? 이렇게 묻자 안익수 감독은 ‘뿌리’라는 단어를 냅다 던졌다. 그리곤 10년 만에 돌아온 FC서울에서 그 뿌리가 흔들리는 사실을 개탄했다. 근간에 관한 이야기다.

“프랑스, 크로아티아,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은 뿌리가 건실한 덕분에 월드컵 5, 6경기 안에서 결정이 나는 상황에서도 지금껏 해왔던 축구를 하면서 결실을 맺는다. 뿌리가 튼실해서 가능한 일이다. 지금 서울은 뿌리가 부실한 상황이다. 예를 들어, 선수들의 컨디션 평가 기준이 될 데이터가 없다. 스카우트 커리큘럼도 없고 시스템적으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그냥 보고 ‘쟤 괜찮다’라고 데려오는 식이다. 2010년 당시 유스 클리닉이 5,500명 정도가 되었다. 그때가 관중도 제일 많았다. 지금 평균관중이 9천 명 대로 떨어졌다. 팬이 없으니 스폰서에도 문제가 생기고, 선수들의 준비도 부족해진다. 똑같은 예산을 쓰지만 효과가 떨어진다.”

“2010년 FC서울에는 진취적 열정이 있었다. 지금은, 뭐랄까, 안 좋은 단어만 떠오른다. 경험은 큰 자산이다. 경험이란 새로운 부분이 잉태되는 자원이다. 그런데 경험이 잘못 쌓이면 내성이 된다. 클럽하우스에 와보니 자란 건 나무밖에 없더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FC서울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구단이다. 사회적으로 메시지를 주는 축구를 해야 한다. 5년, 10년 후를 내다보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져야 한다. 지금 당장 성적도 중요하지만, 그런 문화와 환경이 더 필요하다.”

안익수 감독도 팬들이 납득할 수 있는 성적의 중요성을 잘 안다. 첫 시즌이 끝나고 허태수 회장으로부터 “우승한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고객 중심의 축구를 해달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순위를 내팽개치기엔 서울은 너무 크고 팬도 많다. 문화가 잡혀야 성적이 나오고, 성적이 담보되어야 문화를 형성할 명분이 생긴다는 현실도 그는 잘 안다. 그래서 FC서울의 책임과 역할, 사회적 메시지를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허창수, 허태수 회장님들은 항상 고객 중심을 강조하신다. 고객은 경기장을 찾는 팬이다. 팬이 많이 오려면 우선 경기력이 중요하다. 팬 분들은 이미 프리미어리그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그걸 따라가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선수들은 팬들을 두려워해야 한다. 예전에 선수들에게 연봉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연봉 3억 원은 어디서 나올까? GS숍 점포당 한 달 로열티가 대략 2백만 원 정도다. 150개 숍이 꼬박 로열티를 낼 때, 그 돈이 한 선수의 연봉이 된다. 왜 훈련을 열심히 해야 하는지, 왜 상암에서 최선을 다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마치고 나니 뒤에서 ‘감독님이 돈 주는 거 아니잖아?’라는 말에 웃음이 나오긴 했지만.”

“FC서울은 좀 달랐으면 좋겠다. FC서울은 리딩클럽이 되어야 한다. 뭔가 제시점을 줘야 한다. 단기간에 감독을 갈아치우기보다 오산 유스팀부터 키운 지도자가 프로팀 감독까지 맡을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독일의 위르겐 클롭, 율리안 나겔스만을 보라. 나도 노력하면 저기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꿈을 준다. 한국에서는 프로로 입문하지 않으면 절대 프로 감독이 될 수 없다. 유스에서 성장해서 FC서울의 축구를 완성할 수 있는 지도자가 나오면 프로팀 감독을 시켜야 한다. 왜냐고? FC서울이니까. 한국 축구를 리딩해야 하는 클럽이니까.”

동계훈련을 떠나기 전에 현충원을 참배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선수들이 무엇을 위해 뛰는지를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오기 전에 현충원에 갔다. 처음에는 왜 거길 가야 하느냐는 반응이었다. 가서 설명을 듣고 있으니까 분위기가 정말 숙연해졌다. 이름도 모르는 전사자, 실종자가 많다. 과연 우리는 무얼 위해 FC서울 엠블럼을 달고 사는가, 라는 이유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희생하고 헌신하는 이유는 ‘FC서울을 위해서’, ‘팬을 위해서’다.”


* ‘익수볼’은 공간이다

2022시즌 부침을 겪긴 했어도 FC서울에서 안익수 감독은 ‘익수볼’이란 애칭을 얻었을 만큼 긍정적 플레이스타일을 선보였다. 윤종규와 이태석은 풀백(또는 윙백)이면서도 빌드업 상황에서 중앙 영역으로 이동한다. 기성용이 센터백과 함께 백3 형태를 만들어 올라가는 스타일도 눈길을 끌었다. 지난해 사석에서 기성용은 “소문과 달리 안익수 감독이 전술적으로 너무 해박해서 솔직히 놀랐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긍정적 플레이스타일로 프리미어리그에서 선풍을 일으켰던 스완지시티 축구를 직접 겪었던 미드필더의 공식 인정이다.

“오늘 했던 훈련도 전술적 움직임 연습이었다. 항상 공간 개념을 이해하라고 주문한다. 수비는 공간을 커버하고, 공격은 공간을 활용한다는 원칙이다. 한 선수가 움직여서 생기는 공간을 동료가 활용해야 한다. 이동 트래핑을 위해 공간이 필요하면 그걸 동료가 움직여서 만들어줘야 한다. 내가 맡은 이후로 우리 선수들이 공간 개념을 얼마나 이해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는데, 새로 영입되는 선수들과 함께 뛰게 해보면 확실히 차이가 나더라.”

“상황 판단은 네 가지 요소를 기본으로 한다. 볼, 상대, 동료, 공간이다. 이걸 제일 잘하는 선수가 차비와 이니에스타였다. 차비가 90분 동안 카메라를 달고 훈련한 영상이 있다. 주위를 몇만 번씩 둘러본다. 아무리 발이 빠른 선수라도 차비를 당해낼 재간이 없다. 상황 인지 능력이 좋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은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

안익수 감독은 복잡한 전술 움직임이 표시된 그림 여러 장을 아이패드로 보여주면서 열심히 포지셔널 플레이를 설명했다. 찬찬히 설명을 듣고 보니 오후 훈련장에서 선수들이 우왕좌왕하면서 배웠던 움직임들이 PDF파일로 고스란히 시각화되어 있었다. 복잡해 보였던 다지점 론도와 슛 훈련의 목적도 그제야 이해가 갔다. 뒤이어 안익수 감독은 맨체스터시티, 리버풀, 프랑스 등의 포지션별 움직임 특징을 소개했다. 그리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라며 웃는다. 유럽 축구 경기들을 확인하고, 아이디어를 얻고, 현실적 제약을 감안한 취사선택이 안익수 감독의 안에서는 연중무휴로 돌아간다. 그리곤 다시 FC서울의 축구 이야기로 돌아온다.

“한 골만 넣으면 이기는 축구. 그거 내가 정말 잘할 수 있다. 솔직히 지금도 내가 부산 감독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FC서울은 그런 축구를 하면 안 된다. 팬들이 볼 게 있어야 한다. 상암에서 팬들이 나오면서 다음 경기를 기대하게 해야 한다. 내려앉는 축구를 하면 안 되기에 세계적 팀들이 지향하는 스타일을 하고 싶다. 맨시와 리버풀은 2-0으로 앞서도 계속 올라간다. FC서울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 축구를 하고, 그게 밖으로 퍼져 나가서 사회적으로 울림을 줘야 한다. 함께 발전하는 시너지를 낼 수 있다면, 내가 있는 동안 도전해보고 싶다.”

4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인터뷰를 빨리 해치우고 밤바다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자는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여느 피서지와 달리 후아힌은 태국 왕실의 전용 휴양지인 탓에 모든 주점이 밤 11시에 ‘칼퇴’한다. 자정을 넘긴 시간에 기자와 홍보팀 직원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숙소로 돌아가 각자 방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다음 날 오전, 안익수 감독은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족구 메뉴로 선수단 분위기를 띄웠다. 컨디셔닝 목표를 개막전에 맞춘 동계훈련 계획도 예전과 달라진 부분이다. 전날 그는 MZ세대에게 다가가려는 나름의 변화도 이야기했다. 강한 악력이 전해지는 악수와 인사를 끝으로 기자는 다시 방콕행 택시에 몸을 실었다. 2023시즌 안익수 감독은 경기장 안팎에서 FC서울을 FC서울답게 만드는 투쟁(!)을 이어갈 예정이다.

* 2023시즌 서울 첫 경기 = 2월 25일(토) 오후 4시30분, 서울 vs 인천

글 = 홍재민
사진= FC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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