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35년, 한국 민주주의의 퇴화

2023. 1. 25. 16:2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매경DB】

악몽 정치

최백호가 45세에 작사·작곡한 노래 '낭만에 대하여'는 중년의 허전한 감성을 한껏 실었다. 실현되지 않은 꿈은 낭만의 땔감이다. 옛날식 다방 도라지 위스키가 소환한 첫사랑 소녀, 왠지 가슴이 텅 빈다. 한국인들의 꿈, 민주주의가 꼭 그렇다. 아사달과 아사녀가 달빛 아래 환희의 춤을 출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35년 전 여름밤의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꿈은 낭만이 아니라 악몽으로 변했다. 선남선녀의 격투기, 이념전쟁이 따로 없다. 1987년, 소설 '설국'의 첫 문장처럼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환상의 세계가 펼쳐질 줄 알았다. 그런데 '설국열차'가 됐다. 목적지를 잃은 채 화기(火氣)와 살기(殺氣)로 폭주하는 설국열차, 그 꼴이다.

사람이 무섭다

얼마 전, 골목길을 가다가 노년끼리 나누는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 태극기가 있으니 그냥 나오라고. 약간 으스스했다. 지난 정권의 대깨문이나 요즘 맹활약하는 개딸이어도 그랬을 것이다. 독재정권에서는 군인과 경찰, 정보원이 기피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익명의 사람들, 심지어 이웃에 대한 두려움이 증가하는 것은 왜인가. 민주주의는 인간적 선망과 신뢰를 늘린다는 게 정설이다. 자유의 미학(美學)이다. 한국에서는 자유의 역설, 자유의 부작용이 독기처럼 퍼졌다. 가족 모임은 물론 동호회와 동문 카톡방에서도 정치 논쟁은 사절이다. 연애도 결혼도 이념 경계선을 넘기 힘들다. 한국 사회에서 대화 기피 요인 중 경제적 지위(26.7%), 세대(21.5%)에 비해 지지 정당이 40.7%로 월등히 높았다. 사람을 모으는 기예(技藝)로서 민주주의가 한국에서는 사람을 갈라치는 악마의 입김으로 전락했다. 정치인들을 욕해봐야 개과천선은 요원하고, 정치체제를 탓해봐야 공허하다. 기대는 공염불, 아예 버린 지 오래다. 어디부터 잘못됐을까?

압축성장 '사회'는 없다

한국은 압축성장의 대명사다. '후진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냈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기적이 일어났다. 정보화 대국이 된 것이다. 그런데 산업화도 정보화도 그것을 뒷받침할 사회가 경제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다. 경제는 압축성장이 가능하지만, 사회는 모든 단계를 거쳐야 한다. 민주주의는 경제보다 사회구조에 더 해당하는 개념이다. '부르주아(시민) 없이 민주주의 없다'는 배링턴 무어의 유명한 명제는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반에 주목한다. 기반 구축엔 상당한 세월이 필요하다. 전문가 계층인 '교양시민'은 사회 운영원리를 만들고, 기업을 일구는 '경제시민'은 시장의 자유를 확대한다. 민주주의의 쌍두마차다. 노동자·농민의 계급적 도전을 중산층 발명품인 의회정치 내로 흡수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투쟁의 연속이었다. 자유주의의 역사적 시련은 19세기 후반기에 시작돼 2차 세계대전 후에야 일단 마감됐다. 스웨덴은 계급 타협을 실행했고, 영국은 복지국가를 선보였으며, 독일은 사회적 경제를 내걸었다. 모두 1950년~1960년대이니 선진국이라 칭할 상태도 아니었다. 그런 화해와 타협이 경제성장을 역으로 촉발했다.

뒤처진 사회

한국은 사회적 발전 단계를 생략했다. 경제가 민주주의를 낳을 것으로 막연히 기대했거나 적어도 동반성장할 것으로 가정했다. 어림해서 말한다면, 경제는 일인당 국민소득 3만5000달러 수준, 사회는 1만달러 수준, 정치는 민주주의의 하한선인 6000달러에서 여전히 맴도는 형편이다. 전형적인 격차 사회(gap society)다. '정의와 공정' 개념이 사회에 배태된 것이 아니라 정치가 만들어 배포했다. 경제가 나아갈 때마다 사회가 요동치고, 응분의 몫을 챙기려는 조직과 집단들이 매 단계 격돌한다. 불평등 해소 원리를 정권마다 달리 만들어내야 한다. 권리투쟁 집단에 러브콜을 보내는 정치세력이 반복 출현했다가 맥없이 물러가는 민주화 35년은 잃어버린 세월인가?

세계를 열광시키는 K팝, K컬처는 자유로운 영혼, 거리낌 없는 끼의 향연이다. 그렇다고 문화 수준이 높다고 착각할 필요는 없다. '진정한' 문화란 생활양식을 운영하는 총체적 원리라고 할 때 자유 속에 내장된 '권리와 책무'를 적절히 조율하는 가치관의 선명성과 내면화 여부가 핵심이다.

마음의 습관

약관 25세 프랑스 사회학자 알렉시 드 토크빌은 1830년대 미국에서 자유를 규제하는 자율적 습속(규범과 규율)을 목격했고, 이것을 '마음의 습관(habits of the heart)'이라 불렀다. 습속은 시민 참여, 즉 결사체 활동의 소산이었다. 마을인들은 교회, 협회, 조직 활동을 통해 공동체 윤리를 만들었다. 토크빌은 '도덕(morality)이 미국인들의 제1의 언어, 공동체가 제2의 언어'라고 썼다. 자치로 제정한 법이 사회적 환경을 지배하고, 최상위에서 습속이 법을 통제하는 원규(原規)에 토크빌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것이 미국적 민주주의의 정신적 기초였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제1·2언어가 급속히 망가진 것이 오늘날 미국의 현실이지만 습속에 대한 강한 향수는 여전히 버팀목이다. 미국 대선에서는 마을 사람들의 열린 토론장, 코커스(caucus)가 시행된다. 열띤 토론 끝에 유권자들은 정당 이름이 달린 코너로 각자 간다. 냉소는 있겠지만 싸움은 없다. 타인을 존중하는 '자유'에 대한 합의 습관은 여전히 살아 있다.

한국에 없는 것

체제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20세기 민주주의는 양극단을 피한 공정성을 습속과 사회적 합의에 기초해 그런대로 잘 다스려왔다. 한국에는 애초에 습속도 합의도 없었다. 독재에 대한 저항 무기로서 자유 개념이 있었을 뿐인데, 그것은 민주화 단계에서 적(敵)에 대한 공격 무기로 바뀌었다. 좌파에게 자유는 평등과 차별철폐, 우파에겐 능력과 보상을 의미했다. 팽팽한 충돌을 친북·반북이 격화했다. 정당들은 자유 스펙트럼의 양극단에서 대치해 싸웠다. 승패는 선거로 갈렸지만, 교육·소득·직업이 불평등을 자극할수록 유권자들 역시 대척점으로 몰려갔다. 여기에 저성장, 세대 불평등, SNS의 확산은 취약한 한국의 민주주의를 불구덩이로 몰아넣었다. 정보화를 앞서간 덕에 유권자의 패거리화도 세계 최고로 진행됐다. 뉴욕타임스는 최근 기사에서 대화 AI '챗GPT'가 민주주의를 탈취할 위험에 대해 경고했다. 눈 깜짝할 사이 SNS에 수백만 개 댓글을 올려 여론을 뒤집는 괴력이 있다고 했다. 팩트(fact)를 팩션(faction)으로 만드는 '대혼란의 무기'다.

독식을 향한 자유

독재 타도에 혁혁한 공을 세운 전사들은 민주화 경로에서 포식자를 자처했다. 운동권 정당, 노조, 시민단체가 그렇다. 보수세력도 민주화에 기여한 바 있으나, 뿌리 깊은 원죄(原罪)와 잦은 실정(失政) 때문에 공론장에서 항상 수세로 몰렸다. 그러는 사이, 계급 투쟁과 진보적 자유의 전사(戰士) 민주노총은 정도(正道)를 이탈해 폭주기관차로 변했다. 느닷없는 파업과 명분 없는 시위에서 노동계급 전체의 이익은 실종됐고, 그악스러운 외침만 남았다. 정규직 상위 5%를 위한 독식 투쟁에 이제 진저리가 난다. 독식 행위에 짓밟힌 비정규직과 약자가 부지기수다. 정당들이 양산하는 입법이 공익인지도 헷갈린다. 주로 보좌관들이 초안한 입법안들은 근사한 명분을 달고 나타나지만, 사실은 진영 이익을 대변하는 편파적 기획들이다. 옆 동료도 모르는 법안들의 홍수사태에 공익(公益)은 벌써 익사했다. 입법을 통과시키려 기상천외 꼼수를 쓰고, 막히면 막말을 쏟아내는 한국의 정당정치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다. 그런 탈선과 위선을 감시할 시민단체의 변질은 심각하다. 시민단체는 계급 통합 조직이어야 공익에 기여한다. 그런데 전문가 중심의 '주창단체(advocacy groups)'가 특수 이익과 정파를 대변하는 추세가 만연됐다. 정의기억연대를 이끈 윤미향 의원의 탈선은 이미 알려진 바이고, 좌우파 정권과 연계된 시민단체들이 보조금을 받아 챙긴다. '촛불중고생시민연대' 회원 중 97%가 성인이었다. 사익과 공익을 연결하는 가교로서 '시민 참여'는 독식을 치장하는 명분이었다. 결과는 시민성의 부패. 종교라고 다른가? 종교는 공리적·실리적 사회에서 양심(良心)을 수호하는 기관이다. 종교집단이 높이 쳐드는 피켓에 뭐라고 씌어 있는가?

제4차 산업혁명의 물결은 넘실거리고, 그것을 감시할 시민단체의 내부 사정이 이러한데 어떻게 공정과 정의를 부르짖으며 광장에 나설 수 있는가? 몇 년 전, 교토대학 강연에서 젊은 교수가 물었다. '박근혜 아웃' 피켓을 들고 있는 중고생들이 유권자인가? 권리의 근거를 대라는 뜻이었다.

'다원적 정의'가 출구

토크빌은 극단의 개인주의가 자유의 환경을 파괴한다고 경고했고, 19세기 자유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 역시 '사회적 자아 속의 탐욕스러운 나'를 통제할 방법을 논했다. 민주적 습속 결핍증을 앓는 한국, 정의를 앞세운 독식 투쟁을 결국 사법기관이 결판을 내야 하는 한국 정치가 그렇다. 피로 쟁취한 민주주의가 사법에 감금됐다. 법을 통제할 습속은 어디에 있는가?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39번이나 언급한 '자유'는 원칙 회귀인가, 결핍 해소인가? 집권당에 일일이 대거리하는 더불어민주당은 어디에서 헤매고 있는가? 이미 포괄정당(catch-all party)임을 선언한 양당은 편파 일색에 공격 본능을 극대화했다. 우파·좌파 원칙은 무너졌고, 공화주의(우파)도 자유주의(좌파)도 아닌 추한 변종들이다. 20세기 역사에서 좌파는 인권과 평등을 위해 돈을 살포하고 복지를 늘리면서 기업과 부자의 공헌에 반드시 보답했다. 생산성 향상, 직장 헌신, 계급 타협에 동참하도록 규제했다(규제 강화). 우파는 자본을 독려해 파이를 키우지만(규제 완화) 약자와 취약계층을 포용했다. 그런데 한국의 민주당은 돈을 빼앗다시피 했고, 보답은커녕 원한과 도덕적 해이를 부추겼다. 국민의힘은 성장 주도 파이(pie)를 키우고 파급효과를 선전했는데 시장의 횡포, 불평등과 차별은 더욱 커졌다. 양당은 견원지간이다. 반복되는 정책 실패를 서로 전가한다. 되받아치는 정치, 뒤엎는 정치에서 자유 원리는 증발하고 민주주의 가드레일은 무너졌다. 경쟁사회에서 실리와 압박은 즉각적이고 사회적 연대는 추상적일 뿐인데, 정치세력은 팬덤에 편승한다. 이런 사회에서 교육·연금·노동개혁이 가능한가? 거대 야당은 냉소할 뿐이다. 유럽은 공존(共存) 아니면 공멸(共滅) 위기에서 '평등(분배)'과 '능력(보상)' 간 거리를 좁혔다. 마이클 월저의 '다원적 정의'로 나아간 덕분이다.

월저는 말한다. 다원적 사회에서 사회적 가치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 정의로운 분배 개념도 시간과 함께 변한다. 하나의 가치 영역에서 불평등은 존재할 수 있는데, 그것이 다른 영역으로 전환되는 것은 정의에 위배된다. 총체적 복지량을 증대한다면, 소득·부·지위의 불평등은 허용될 수 있다. 어떤가? 복합적·가변적 사회에서 획일적 잣대를 버리라는 말이다.

잃어버린 35년, 분노의 질주였다. 최백호처럼 '낭만에 대하여'를 부른다면 그나마 좋으련만, '독선적 자유에 대하여'를 읊조려야 하는 우리의 민주주의는 궤도를 한참 탈선한 채 낡은 정의를 부르짖고 있다.

[송호근 한림대 도헌학술원장·석좌교수]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