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못 배운 한 풀었소”… 칠곡할매글꼴 할머니들의 마지막 수업

권광순 기자 2023. 1. 25.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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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우 경북지사, 칠곡할매들 앞 일일교사
할머니들 상장·졸업장 받고 덩실덩실 어깨춤
25일 오전 경북 안동시 경북도청 1층 ‘미래창고’에서 일일 교사를 맡은 이철우 경북지사에게 반장을 맡은 김영분 할머니의 구호에 맞춰 할머니들이 인사를 하고 있다. /권광순 기자

25일 오전 경북 안동시 경북도청 1층. 할머니 네 명이 교실로 들어섰다. 평소 직원들이 책을 읽으며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는 ‘미래창고’에는 커다란 칠판이 세워졌다. 칠판 앞에는 옛 모습을 간직한 책·걸상도 마련됐고 천장에 태극기와 교훈까지 내걸린 풍경은 마치 60~70년대 교실을 옮겨온 듯했다.

이날 교실에서 수업을 받는 주인공은 일흔이 넘어 깨친 한글로 디지털 글씨체 ‘칠곡할매글꼴’을 만들어 관심을 끈 추유을(89)·이원순(86)·권안자(79)·김영분(77) 할머니였다. 다섯 할머니 중 이종희(91) 할머니는 건강 악화로 아쉽게도 불참했다. 이들 할머니들은 명찰을 달고 10대 시절에도 입어본 적 없던 교복을 곱게 차려 입고 자리에 앉았다.

이날 수업에 나선 일일 선생님은 이철우 경북지사였다. 1978년부터 1985년까지 한때 수학교사로 재직한 이 지사는 40년 만에 교단에 섰다. 이 지사는 할머니들이 학교를 다니지 못한 한을 풀어줄 마지막 수업을 마무리 짓고 경북도가 운영하는 경북도민행복대학 총장으로서 졸업장을 수여하고자 교편을 잡은 것이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칠곡할매글꼴의 원작자 중 한 사람인 김영분 할머니가 반장을 맡았다. 김 할머니의 구호에 맞춰 할머니들이 인사하자 이 지사가 큰절로 화답하면서 수업이 시작됐다.

‘화랑’, ‘호국’, ‘선비’… 이철우 경북지사가 수업 중에 읽은 단어를 김영분 할머니가 꾹꾹 눌러쓴 손글씨. /권광순 기자

이 지사는 할머니들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출석 체크를 한 뒤 삼국시대로부터 비롯된 경북의 역사와 경북 4대 정신 등을 설명하고 대한민국 근대화에 헌신한 할머니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할머니들이 여행해 본 국가를 묻고 답하거나 새마을운동 노래를 불러보는 등 수업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진행됐다.

수업 중 이 지사가 김영분 할머니에게 “경북 경주 인구가 더 많을까요, 대구시 인구가 더 많을까요”라고 묻자 김 할머니는 “경주가 대구보다 더 크니까 암만캐도(아무래도) 경주에 사람이 더 마이 안 있겠는교”라고 답해 폭소가 터졌다. 이어 김 할머니는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공부를 좀 해올 걸 그랬나”라고 멋쩍어하자 주변은 웃음바다로 변했다.

수업 말미에는 받아쓰기 시험도 치렀다. ‘화랑’, ‘호국’, ‘선비’, ‘새마을’ 등 이 지사가 단어를 읽으면 할머니들이 받아쓰는 시험이었다. 결과는 네 할머니 모두 만점. 이 지사가 공책에 붉은 색연필로 채점하고 ‘100점’ 표시를 하자 할머니들은 환호에 이어 박수를 쳤다. 이 지사가 “한 학생이라도 틀려야 나머지공부를 시킬 텐데”라고하자 재차 폭소가 터져 나왔다.

시험을 만점으로 통과한 할머니들은 상장과 졸업장을 받고 학사모도 썼다. 일부 할머니들은 상장·졸업장 흔들며 덩실덩실 어깨춤을 췄다.

일제강점기와 가난 등을 이유로 학교에 다니지 못했던 칠곡할매글꼴의 주인공 할머니들이 25일 경북도청에서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마지막 수업'을 함께했다. /권광순 기자

이 지사는 “할머니들이 살던 시대는 글을 배우기 힘들 정도로 어려운 시절이었고 문맹률이 70%에 달했지만 지금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글을 아는 사람이 많은 나라가 됐다”며 “오랜만에 교사가 돼 보람 있었고 할머니들도 즐거웠을 것”이라고 했다.

이원순 할머니는 “이름 쓸 줄도 몰랐는데 한글을 배우게 해주셔서 감사하다. 오늘 너무 즐겁고 좋다”고 말했다. `김영분 할머니도 “몰랐던 것도 많이 배우고 사람들도 만나고 교복도 입고 모든 게 너무 좋았다”며 “지금 내가 새라면 훨훨 날고 싶은 심정”이라고 전했다.

칠곡할매글꼴은 성인문해교육을 통해 일흔이 넘어 한글을 배운 다섯 명의 칠곡 할머니가 넉 달 동안 종이 2000장에 수없이 연습한 끝에 2020년 12월 만든 글씨체다. 윤석열 대통령이 각계 원로와 주요 인사 등에게 보낸 신년 연하장은 물론 한글과컴퓨터, MS오피스 프로그램에 사용되고 국립한글박물관 문화유산에 등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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