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왕’ 피해자들에 전셋집 중개한 부동산, 오늘도 정상영업 중[가보니]

심윤지 기자 2023. 1. 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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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래하셨던 부동산이 어디인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아마 폐업했겠지만…”

“아직 장사하고 있어요. 대표도 그대로고요.”

지난 18일, ‘빌라왕’ 김모씨 피해자 A씨와 카카오톡 대화를 나누다가 놀라운 사실을 전해들었습니다. 국토교통부는 김씨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지난해 12월 ‘전세사기 대응 전담 TF’를 꾸려 연일 대책을 내놓고 있는데, 김씨 건물을 소개해준 부동산중개업소는 여전히 성업중이라고 했습니다.

수도권 일대에 주택 1139채를 ‘무자본 갭투자’ 방식으로 사들였다가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고 사망한 김씨는 조직적 전세사기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인물입니다. A씨가 살고 있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 빌라는 총 26가구가 있는데, 이중 24가구가 김씨 피해자입니다. 이중 A씨 포함 3명이 해당 중개업소에서 거래를 했고요.

‘빌라왕’ 김모씨가 주로 활동했던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신축 빌라 골목 전경. 심윤지 기자

A씨 설명에 따르면, 이 부동산 중개업소는 “시세보다 잘 나온 주택”이라며 보증금 2억7000만원짜리 빌라를 보여줬습니다. A씨가 예산보다 높은 가격에 주저하니, 중개수수료도 깎아주고 이사지원금도 주겠다고 설득했습니다. A씨가 “이사지원금을 주는 곳은 안전하지 않다고 들었다”고 말하자 “전세보증보험 가입이 가능한 물건인데 무슨 걱정이냐”며 A씨는 물론 A씨 부모님까지 안심시켰습니다.

하지만 뒤늦게 알고보니 전세보증보험 가입이 불가능한 주택이었고, 시세도 부동산이 말한 가격보다 수천만원이 낮았습니다.

해당 부동산 이름을 포털 사이트에 검색해봤는데요. A씨가 보낸 명함 속 대표 이름과 사진이 버젓이 걸려있었습니다. 깔끔한 신축 빌라 사진 아래에는 대부분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전세 보증 보험 가입 가능한 안전한 물건’이라는 소개글이 적혀있었습니다. “소중한 내 전세금 제때 받지 못할까 걱정되시나요?”라는 제목의 안내문도 별도로 제공하고 있었고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기자는 지난 19일, 집을 구하는 척 해당 부동산을 직접 찾아가보기로 했습니다.

전세사기 피해자 A씨가 찾은 부동산 중개업소는 네이버 매물 소개 페이지 아래 “소중한 내 전세금 제때 받지 못할까 걱정되시나요?”라는 제목의 안내문을 별도로 제공하고 있었다. 네이버 갈무리
겉보기엔 평범한 부동산 같았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 주택가에 위치한 이 부동산은 여느 부동산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입구 앞에는 부동산 중개앱 입간판이 붙어 있었고, 내부에는 직원들의 책상과 명함이 비치되어있었습니다. 기자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B과장’이 안내를 시작했습니다.

“투룸 빌라 보러왔는데요. 신축은 아니어도 비교적 깔끔한 집으로요.”

기자는 전세사기가 염려돼 화곡동보다는 신정동 쪽을 알아보고 있고, 전세보다는 월세를 선호한다는 조건을 밝혔습니다. B과장은 “대출은 얼마까지 일으킬 수 있냐” “실입(현금)은 얼마정도 가지고 계시냐” 물은 뒤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B과장은 제 예산(2억 초반)에 신정동 전월세 계약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신정동 신축 빌라의 경우 전세는 보증금 최소 2억7000만원 이상, 월세는 보증금 5000 기준 최소 월 80~130만원이 시중 가격이라면서요.

B과장은 대신 ‘화곡동 전세’를 권유했습니다. 그는 “최근 HUG에서 보증보험 가입 조건을 국토부에 공시된 공동주택 가격의 140%에서 126%로 낮췄는데 그 조건을 맞출수 있는 물건이 그나마 화곡동 쪽엔 남아있다”며 “저희는 보증보험 가입된 안전한 물건만 취급하니까 그 부분(전세사기)은 걱정 안하셔도 된다”며 저를 거듭 안심시켰습니다.

롯데월드타워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한 빌라밀집지역. 강윤중 기자

2억 초반대로 신정동 투룸 빌라의 전월세 계약이 어렵다는 B과장의 말은 사실과 달랐습니다. 준공 연도나 위치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국토부 실거래가 공개시스템과 인근 공인중개사를 통해 확인해본 결과 해당 중개업소 인근 신정동 빌라는 지난해 말 전용면적 29㎡ 기준으로 전세 2억2000~3000만원 선, 월세 보증금 2000만원에 50~70만원 선으로 실제 계약이 체결됐습니다. ‘보증보험 가입 조건이 공시가격의 140%에서 126%로 낮아졌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HUG 측은 “사실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주택 컨디션은 좋았지만…

“안녕하세요. 부동산인데요. 00팰리스 지금 보러갈 수 있나요?”

기자가 집을 보러가겠다는 의향을 밝히자, B과장과 또다른 직원은 구글 스프레드시트에 공유된 매물 리스트를 보며 바쁘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이날 기자는 총 4개 주택을 둘러봤는데요. 전세보증금 1억7500만원에서 2억4000만원 사이의 투룸~쓰리룸 빌라로, 모두 화곡동에 위치해있었습니다.

주택 상태는 대부분 나무랄 데 없었습니다. 전용면적, 엘레베이터, 역과의 거리, 주차공간, 가전 옵션 등 2030 세입자들이 원할만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습니다. 만약 ‘전세 품귀’ 현상이 발생했던 2년전이었다면, 저 역시 보자마자 가계약금을 걸었겠다 싶은 주택도 있었습니다.

부동산중개업소 직원들이 보여준 총 4개 주택은 전세보증금 1억7500만원에서 2억4000만원 사이의 투룸~쓰리룸 빌라로, 모두 화곡동에 위치해있었습니다. 사진은 화곡동 빌라촌의 골목. 심윤지 기자

하지만 지금의 전세시장은 상황이 정반대입니다. 유례 없는 부동산 상승 국면에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전세가는 폭락하는 중입니다. 전세 사기 우려에 청년층의 월세 선호 현상도 가속화하면서, 이제는 집주인이 세입자 구하기에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일부 집주인들은 2년 전보다 보증금을 소폭 내렸지만 부동산 업계에선 “전셋값 거품이 빠지려면 아직 멀었다”는 전망이 많습니다. 두 직원은 “보증금을 내린 집들만 보여줬다”고 강조했지만, 국토부 부동산공시가격 알리미에 공시된 공동주택 가격보다는 여전히 3000~5000만원 이상 높습니다.

두 직원은 리스트에 있는 집들이 실시간으로 나가고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오늘 지나면 이 집도 언제 나갈지 몰라요. 방금도 다른 손님들이 보고갔대요. 마음에 들면 빨리 결정하셔야 돼요.”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안전’

“계약 후에는 집주인을 믿어야 한다지만 그 전까지 손님이 믿을건 부동산(공인중개사)밖에 없잖아요. 저희는 최대한 안전한 물건으로만 보여드리니까 아예 걱정 안하셔도 돼요.”

부동산 직원들과 집을 보러 다닌 2시간 동안, 제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안전’이었습니다. 이들이 안전한 매물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HUG 전세보증금반환보험 가입이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세보증금반환보험에 가입한 임차인들은 집주인이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더라도, 주택 가격에서 선순위채권(보증금보다 우선변제권이 인정되는 담보채권)을 뺀 만큼을 HUG로부터 대신 받을 수 있습니다.

이 부동산중개업소는 2021년 2월, 전세사기 피해자인 A씨에게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임대사업자인 김씨는 ‘임대인 보증보험’ 의무가입 대상이라, 혹시 김씨가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해도 HUG로부터 보증금 전액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실제 임대차계약서에도 임대보증금 전액보증 여부에 ‘예’라는 표시가 되어있었고요.

하지만 알고 보니, 김씨가 가입한 임대인 보증보험은 전액보증이 아닌 일부보증이었습니다. 김씨 소유의 주택이 국세·지방세 체납으로 경매에 넘어가면서, 피해자들이 뒤늦게 전세보증금반환보험에 가입하는 것 역시 불가능해졌습니다. 피해자들은 김씨 사망 후에야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됐고요.

피해자들의 항의에 이 중개업소는 “정상적인 물건인줄 알았다”며 “도의적인 책임을 지는 차원에서 전화를 받아주는 것 외에는 해줄 수 있는게 없다”고 돌변했습니다. 계약서에 임차보증금 전액보증에 체크했던 것은 “(실제로 가입이 되어있다는게 아니라) 임대인에게 가입하라고 체크해둔 것”이며 김씨의 세금 체납 여부에 대해서는 “본인이 체납사실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이를 믿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김씨가 2020년 하반기 이미 HUG 블랙리스트에 올라와있었고, 국세 체납 여부도 서류 제출을 요구하면 충분히 사전에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며 “부동산도 공범”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은 김씨 주택을 중개해 둔 부동산 중개업소 여러 곳과 분양실장 등을 사기죄로 고발하려 했지만 이마저도 지지부진한 상황입니다.

수도권 등지에 주택 1139채를 보유하다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고 사망한 일명 ‘빌라왕’ 김모씨 사건 피해 임차인들이 지난달 27일 오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국토교통부 앞에서 피해 상황을 호소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사라진 신의성실의 원칙

“신정동에 있는 부동산이 화곡동 물건을 중개한다면, 리베이트를 노리는 컨설팅 업체일 확률이 커요. 타 지역 위험한 물건을 중개하다가, 피해자들이 늘어나면 직원이 퇴사하거나 대표가 폐업해 다른 가게를 차리는거죠.”

화곡동의 한 공인중개사의 설명입니다. 부동산 컨설팅업체는 쉽게 말해 법정 중개수수료 외 리베이트로 수익을 내는 업체를 말합니다. 건축주와 분양업체·컨설팅업체가 짜고 분양가보다 비싸게 전세를 내줘 시세차액이 발생하면, 컨설팅업체는 건축주에게 건당 1000만원 정도의 리베이트를 받는 것이죠. 시장 가격보다 높게 책정된 전셋값때문에 다음 세입자가 구해지지 않아도, 건축주와 컨설팅업체 모두 나몰라라 하면 그만입니다.

공인중개사들은 누구나 ‘안전한 매물’임을 강조한다지만, 매물의 위험성을 따져보는 것은 전적으로 중개사의 양심에 맡겨져있습니다. 세입자들이 부동산 중개업소에 중개 수수료를 내는건 정확한 시세 정보를 제공하고, 매물의 안정성을 꼼꼼히 따져보는 등 신의성실의 원칙을 지키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매물이 다른 부동산(중개소)보다 훨씬 많으시던데, 미처 확인 못한 전세사기 피해가 생긴 적은 없었나요?”

중개소를 나오기 전 마지막 질문을 했습니다. B과장은 “어쨌든 저희가 안전장치(전세보증보험)에 대한 건 다 가이드를 해드렸을 거에요”라며 ‘애매한 답변’을 내놨습니다. 정부가 전세 사기 피해자들의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지만, 정작 피해의 원인을 제공한 부동산 중개소는 가게 문을 닫지 않고 무책임한 중개 행위를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심윤지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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