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규의 문화 잠망경] 즐거운 위선자/번역가

2023. 1. 25.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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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고등학교 국민윤리 교사셨던 아버님의 한마디가 영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나는 '위선'이 교사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 인간의 기본 요건일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겉으로만 착한 체하는 것'이 위선의 사전적 의미라면 보통의 시민들은 어쩌면 죄다 '위선자'다.

이런 사디즘적인 위선자는 당연히 권력자의 위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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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규 번역가

어릴 적 고등학교 국민윤리 교사셨던 아버님의 한마디가 영 잊히지 않는다. 심드렁한 어조로 “선생은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어”라고 하셨다. 코흘리개였던 내게 당연히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으셨고, 나도 어리둥절하기만 하고 엄부(嚴父)에게 캐물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한마디의 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그로 인해 오랜 세월 ‘교사=위선자’라는 이미지가 머릿속에 각인되는 바람에 자랄 때 교사라는 직업을 택할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서 나는 ‘위선’이 교사뿐 아니라 모든 사회적 인간의 기본 요건일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속한 사회 집단에서 요구하는 도덕과 질서와 의무에 부응하며 진정한 자기와 분리된 ‘가면’을 쓰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교사는 자애롭고 솔선수범하는 스승의 가면을, 회사원은 성실하고 적극적인 ‘근로자’의 가면을 쓰고 살아감으로써 원만히 사회생활을 하려고 애쓴다. ‘겉으로만 착한 체하는 것’이 위선의 사전적 의미라면 보통의 시민들은 어쩌면 죄다 ‘위선자’다. 사회적 가면과 본연의 자기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힘든 간격이 존재하는데도 대부분은 가면에 충실한 척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과 남을 함부로 위선자라고 낙인찍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와 가면의 양립을 인간 실존의 조건으로 인정하고 양자의 균형을 깨지 않는 한 서로의 일상적 ‘위선’을 눈감아 주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가 생기는 순간은 누군가 가면에 충실하지 않았을 때, 즉 도덕과 질서와 의무에 반하는 행동을 저질렀을 때다. 그러고도 온갖 변명과 정당화로 자신의 기존 신념과 태도를 방어하고 무죄한 자기를 고수하는 사람을 우리는 ‘위선자’라고 부른다. 이런 위선자는 소위 인지부조화 성향을 나타내며 대부분의 위선자는 아마 이 유형에 속할 것이므로 그리 신선하지 않다.

내가 주목하고 놀라워하는 유형의 위선자는 따로 있다. 그들은 자기와 가면 사이의 현격히 먼 거리를 또렷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미 금이 갈 대로 가서 맨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가면을 천연덕스럽게 쓰고 있다. 다시 말해 남들이 어떤 생각으로 자신을 볼지 전혀 괘념치 않는 것이다. 아니 괘념치 않을뿐더러 오히려 즐긴다. 남들이 불만과 분노가 가득한데도 감히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어색한 미소와 무표정으로 쩔쩔대며 자신을 대하는 모습에 은근히 희열을 느낀다.

이런 사디즘적인 위선자는 당연히 권력자의 위치에 있다. 상대방의 생사여탈권을 손에 쥔 채 계속 공공연하게 자신의 도덕성과 정당성을 과시한다. 하지만 그가 부도덕하고 부당하다는 것은 그 자신도 알고 상대방도 안다. 그런데도 상대방은 눈빛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는 더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치게 유도하며 속으로 낄낄거린다. 나는 이런 이들을 대학에서도 보았고, 회사에서도 보았다. 물론 당시에 난 그들에게 ‘맞장구를 쳐 주는’ 역할이었다. 그때 그들은 진정 즐거워 보였으므로 따로 ‘즐거운 위선자’라는 유형으로 분류해 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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