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윷놀이

정희경 시조시인 2023. 1. 2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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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경 시조시인

“윷이야” “모야” 떠들썩한 소리가 시골집을 가득 메운다. 윷가락도 우리의 소리에 힘입어 힘차게 떨어진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우리는 설날 밤을 윷놀이로 보낸다. 며칠 전 설날도 어김없이 우리 삼 형제 내외는 시부모님과 함께 윷놀이에 열중했다. “윷이야” “모야”를 외치는 소리, 웃는 소리가 높아지고 말을 쓰면서도 소리가 커진다. 달도 없는 어두운 시골집에 소리가 불을 밝힌다.

우리는 ‘박힌 돌(남자)’ 대 ‘굴러온 돌(여자)’로 나누어 윷놀이를 한다. 달력의 뒷면에 윷판을 그리고 흰 바둑알과 검은 바둑알 네 개씩의 말을 준비한다. 윤노리나무로 잘 다듬은 윷은 몇 년째 사용해서 반질반질 윤이 나 있다. 검은색 가새표가 처져 있는 뒷도도 보인다.

젊었을 때 정월 대보름날 동네에서 윷놀이를 하면 늘 이겨서 냄비나 양푼을 받아 왔다는 어머님을 필두로 며느리 셋은 설날 음식 준비의 피곤을 윷놀이로 날려 버린다. 말을 잘 쓰는 아버님을 앞세운 아들들도 이기려고 기를 쓴다. 함께 해서 더 좋은 윷놀이다. 각자 핸드폰을 보고 있던 아이들도 주위에 모여들어 응원한다. 흥겨운 설날 밤이다.

윷놀이는 우리나라 전통 놀이이다. 도·개·걸·윷·모는 옛날 부여의 관직명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돼지·개·양·소·말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윷판의 29개 동그라미는 북두칠성과 별자리를 상징하며 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하나의 놀이에도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윷놀이, 참 과학적인 놀이라는 생각이 든다. 윷놀이를 단순 확률로 계산하면 개가 나올 확률이 3/8으로 제일 높지만, 평면과 곡선으로 된 윷의 모양을 감안하면 걸이 나올 확률이 제일 높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윷놀이는 이런 확률에 의존하지 않는다. “도야” “모야”하는 목청에 좌우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더 크게 외친다.

“개나, 모나” 어머님이 힘껏 던진다. 모가 잘 나오게 던지는 요령을 알고 있는 어머님을 믿으며 며느리 셋은 모를 목청껏 외친다. “아이고 도네” 아버님이 웃으시며 한 말씀 하신다. “또박또박 오시든지” 남편이 맞장구를 친다. “도에 새 말을 놓고 뒷도를 보아야지” “아냐 아냐, 걸의 말이 윷으로 가야 해, 빨리 잡으러 가야지. 도에 놓으면 우리가 잡힐 수 있어, 그럼 걸도 위험해” “이제 둘째 말인데, 잡혀도 모험을 걸어 보자” 의견이 분분하다. 윷놀이는 잘 던지는 것 못지않게 말을 잘 써야지 이길 수 있는 놀이이다.

둘째 말을 도에 놓고 뒷도의 요행을 바란 우리는 결국 잡히고 말았다. “말 잡고 덕 보자. 개야” 아버님의 주문처럼 윷판에는 개가 떨어졌다. 요행을 바라던 우리는 결국 말 두 개를 몽땅 잃고 말았다. 예측했는데도 실천하지 못해서 피해를 보았다.

말을 쓰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마치 우리가 인생길을 걸어가는 방법이 여러 가지이듯이. 뒷도를 바라보고 붙박이로 있다가 한 걸음도 못 가는 일도 있다. 요행이 성실의 인생길을 막는 것이다. 말 세 개를 합쳐서 한꺼번에 가려다가 잡히기도 한다. 다 이긴 줄 알았다가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순간의 판단이 승패를 좌우하기도 한다. 11개의 동그라미로 오는 짧은 길도 있지만 먼 길이지만 또박또박 20개의 동그라미를 다 돌아오는 길도 있다. 어느 길을 어떻게 선택하느냐는 것은 오직 자신의 몫이다.

윷놀이가 절정에 이르면 목이 탄다. 한밤중의 바깥 기온은 영하인데 윷놀이의 열기로 우린 뜨겁다. 이때쯤 살얼음이 낀 감주가 들어온다. 감주 한 그릇에 정신이 번쩍 든다.

져도 좋다. 윷놀이는 우리 대가족을 하나로 묶는 설날의 선물이다. 부모님과 함께 오랫동안 윷놀이를 하고 싶다.


“이제는 갈라지고 자꾸만 터지는/손칼바람 밀쳐 내며 어딜 향해 뻗는지/던지는 나무 윷가락 모였으면 좋겠다”(서정택의 시조 “윷놀이” 셋째 수)

흩어진 가족들, 어려운 시기를 보내는 이들 모두 우리처럼 신명 난 윷놀이 한판 벌이면 좋겠다. 도, 개만 나와도 좋다. 함께 모여서 더 신나는 윷놀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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