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상림의 춤곡'을 연주하듯이…[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2023. 1. 25. 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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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일러스트=추덕영 기자


새해가 왔으니 화창하게 빛나는 해 아래서 새 삶을 살아보겠다고 결심하는 자를 어리석다고 할 수는 없다. 삶을 바꾸겠다고 다짐하는 마음은 새 마음이다. 새 마음을 품는 자는 어제의 그 사람이 아니라 새로 태어난 사람이다. 운명처럼 오는 어떤 극적 계기가 있어야만 삶이 바뀌는 건 아니다.

아침의 별 한 점, 잎 진 감나무 가지에 앉은 쇠박새의 울음소리, 먼바다에서 달려와 해안에서 하얗게 뒤집어지는 파도 한 조각, 오후 2시와 3시 사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심심함 속에서도 삶은 기어코 변화의 기미를 붙잡는다. 나의 오늘은 나의 내생(來生)이다. 오늘의 나는 이미 새 사람인 것이다.

 노동의 본질은 쓸모와 효용

도대체 우리는 왜 일하는가? 사람들은 먹고살려고 직업을 구하고 열심히 일한다. 존재가 나달나달해질 때까지 일하지만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일하는 사람을 만난 적은 없다. 건물 안팎을 쓸고 닦으며 폐기물을 치우는 청소 노동자들은 몸에서 나는 온갖 나쁜 냄새를 달고 살며, 허리가 끊기는 듯한 고통과 무릎 관절이 부서지는 통증에 시달린다.

청소 노동자가 사라진다면 도시는 금세 쓰레기로 넘치고 건물은 더러워질 것이다. 청소는 분명 사회적 의미를 생산하는 노동이지만 보람이 작은 것은 청소 노동만으로 가난을 벗는 게 힘들기 때문이다.

“내가 암울한 가난에 지쳤다니. 가난해서 너무나도 우울하다. 너무나도 불행하다.”(<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 150쪽) 스웨덴의 여성노동자 마이아 에켈뢰브는 청소 노동을 했으나 가난을 벗지 못했다고,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 내내 불행하다고 고백한다. 어떤 분야든 노동을 평생 했는데도 저임금과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노동의 본질은 쓸모와 효용을 내는 데 있다. 자기 시간을 담보로 급여를 받는 것은 오늘날 일 중심의 세계에서 가장 흔한 형태의 계약 노동이다. 정시 출퇴근 고용 노동자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제 보람과 행복을 위해 기꺼이 일에 뛰어든다.

 소 잡는 기예도 '천하 으뜸'

일이란 자아실현의 지속가능한 수단이지만 비자발적 임금 노동은 우리의 자유 시간을 제약하고 근육 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를 낳는다. 과잉 노동은 주체에게 끔찍한 폐해를 남긴다. 그런데도 노동자에게 더 많은 성과를 내라고 노동 현장으로 내모는 사회는 모두가 불행해지는 사회다.

가장 이상적인 노동은 자기 일에서 긍지와 보람을 얻고, 지속적인 성과를 내며, 일과 삶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편’에 등장하는 포정(丁)은 삶과 노동을 하나로 포개며 그 가운데 의미와 보람을 한꺼번에 거머쥔 인물이 아닐까? 포정은 소 잡는 백정이다. 솜씨가 얼마나 좋았는지 소의 몸통을 가르는 칼의 움직임이 상림의 춤곡(桑林之舞)을 연주하는 것 같고, 요 임금 시절의 명곡인 경수(經首)의 음률과도 잘 맞았다. 문혜군은 포정에게 반해 거듭 “훌륭하다!”고 감탄한다.

 일에서 얻는 영롱한 기쁨과 보람

포정은 소를 잡을 때 소를 정신으로 대했지 눈으로 보지 않았다. 비록 포정은 천한 직업을 가졌으나 칼 쓰는 기예가 최고에 이르고 무위자연의 정신을 좇으며 도의 경지에 이른다. 칼이 물 흐르듯이 움직인 탓에 소의 힘줄을 다치지 않고 뼈를 다치지 않으니 소는 고통을 느낄 틈조차 없었다. 칼은 춤추는데 피 한 방울 튀지 않는데도 소의 살점이 투두둑 떨어졌다.

포정이 살던 시대에도 소 잡는 일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노동이었다. 하지만 포정은 그 자발적 노동에서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법이 없었다. 비록 천대받는 노동이었지만 기술을 넘어 도의 경지에 도달했다. 포정이 소의 몸통을 벨 때 칼의 움직임이 상림(桑林)의 무악(舞樂)을 연주하는 것 같았으니, 포정은 제 일에서 영롱한 기쁨과 보람을 얻고 그 일에서 충분한 의미를 찾았을 것이다.

과연 포정만큼 자기가 하는 일에서 행복을 찾은 노동자가 있을까? 나는 모든 의미 있는 삶은 의미 있는 노동과 연계돼 있다고 믿는다. 말을 바꾸면 불행한 사람은 자기 일에서 사회적 효용이나 의미를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사람일 것이다.

 콧노래 부르는 신명의 경지를

한 사람의 가치를 재는 잣대는 그가 하는 생업이 낳는 사회적 효과와 효용성과 관련이 있을 테다. 일은 생계 수단 그 이상이다. 일하지 않는 영혼이란 ‘죄인의 의자’에 앉아 구걸하는 자일 테다. 그런 영혼은 필경 타락한다. 일은 영혼의 부패를 막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나는 일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노동을 꿈꾼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일이 자기 행복을 더하는 수단이고, 남들을 이롭게 하는 데 보탬이 돼야만 한다.

생업을 잃는다는 것은 돈벌이의 상실만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와의 결속에서 결락되는 일이다. 실업자들은 만성적 가난과 사회의 뿌리에서 뽑히는 데서 겪는 이중의 소외를 피하기 어렵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곧 삶의 기쁨과 슬픔의 바탕이다. 일은 행복한 삶의 수단이고 바탕이 돼야 마땅하지만 더 많이 일하라고 다그치는 사회는 노동자를 착취하고,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몬다. 새해에는 그 누구든 과로 노동으로 내몰리는 일은 없어지기를, 생산과 이윤을 내는 데 매몰된 토대 위에서 번성을 누리는 가짜 유토피아는 사라지기를 꿈꾼다. 과연 노동의 열매가 골고루 나뉘는 행복한 사회가 가능할까? 새해엔 그런 기적을 꿈꾼다.

세계의 모든 일터에서 노동자의 한숨과 비명이 그치고 콧노래를 부르는 신명 속에서 일하기를! 일의 보람과 기쁨을 만끽하는 가운데 포정같이 상림의 춤곡을 연주하듯이 즐겁게 일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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