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 이태석 신부, 그 따뜻한 기억

김한수 종교전문기자 2023. 1. 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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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일시귀국한 이태석 신부가 조선일보와 인터뷰하면서 기타를 조율하고 있다.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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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의 강추위가 매섭습니다. 저는 매년 연초 한파가 찾아오면 습관처럼 한번씩 인터넷 검색창에 ‘이태석’을 입력해보곤 합니다. ‘이태석 신부님 선종한 날이 이맘때쯤인데…’ 싶어서지요. 이번에도 강추위 예보를 보면서 검색해보니 지난 14일이 이 신부님 선종 13주기였습니다. 다양한 추모, 기념행사가 이어졌습니다. 다큐 영화가 새로 만들어지고, 남수단 톤즈의 학생들에게 학용품을 선물했다는 소식, 해외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한 분들에게 이태석 신부님 이름을 붙인 상을 드렸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그 겨울이 기억납니다. 저는 2010년 1월 14일 새벽 문자 메시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이태석 신부님 오늘 새벽 선종’. 그 문자를 보면서 실낱 같은 희망이 사라지는 허탈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잘 마치셨다’는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2010년 1월의 날씨는 대단했습니다. 그해 1월 서울 지역에는 관측 역사상 가장 많은 25.8센티미터의 폭설이 쏟아졌고 강추위까지 몰아쳤습니다. 추위 속에 이 신부님을 보내는 마음은 더욱 춥고 허전했지요. 그런 기억 때문인지 연초에 강추위가 찾아오면 저는 이 신부님을 떠올리곤 합니다. 또한 미련한 일인 줄 알면서도 저는 휴대전화 전화번호부에서 아직도 이태석 신부님 이름을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신부님에 대한 따뜻한 기억을 지우고 싶지 않은 마음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신부님 생전에 4년간 세 차례 기사를 썼습니다. 처음은 2006년 10월 톤즈 현지에 고등학교를 세우기 위해 일시 귀국했을 때, 두번째는 2009년 9월 이 신부님의 책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를 출간했을 당시, 마지막은 2009년 12월 성탄절을 앞둔 때였습니다. 그리고 선종 후 부음 기사를 쓰게 됐지요.

이 신부님과의 만난 횟수는 적지만 인상은 뚜렷했습니다. 첫 인터뷰 당시 신부님은 후원 인터넷 카페에 이따금씩 글을 올리셨는데 사연이 무척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만난 신부님은 무뚝뚝한 인상이었습니다. 후원을 요청하는 많은 이들은 현지의 어려움을 생생하고 극적으로 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태석 신부님은 좀 달랐습니다. 자신이 인터넷에 올린 글 내용을 질문해도 단답형으로 답변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현지에서 고생한 사연도 남 얘기하듯 덤덤하게 이야기했습니다. 나중에 생각하니 현지 주민들과 학생들의 자존심을 배려한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오히려 당시 의외였던 것은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 촬영을 요청했을 때였습니다. 수도원 뜰에 앉은 신부님은 직접 기타를 연주하며 요들송을 신명나게 불렀습니다. 신부님에게 요들송을 들을 것이라곤 예상을 못했기에 좀 놀랐지요.

최덕기 주교가 수원교구장이던 2004년 남수단 톤즈로 이태석 신부를 찾아가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천주교 수원교구 제공
이태석(오른쪽 아래 흰 옷 입은 사람) 신부와 그가 수단 청소년들로 구성한 브라스밴드. 이 밴드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에 초대될 정도로 유명했다. /생활성서 제공

이 신부님에게서 인간적인 따뜻함을 느낀 것은 마지막 만남에서였습니다. 국내에 들어와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락을 시도했지만 잘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겨우 통화가 됐는데 날짜를 정해주시면서 “다른 날엔 병원에 다니고 있다”고 했습니다. 불안한 느낌은 맞았습니다. 직접 만난 신부님은 뺨은 푹 꺼지고 병색이 완연했습니다. 대장암 말기 상태였지요. 요들송을 부를 때의 그 환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망연자실해 겨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제 셔츠 가슴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습니다. 제가 통화를 끝내자 신부님은 “전자파가 나오니 휴대전화를 가슴 주머니에 넣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장면은 상징적이었습니다. 삶의 불꽃이 사그러지는 순간에도 남을 걱정해주는 사람. 이 신부님은 그렇게 남 걱정만 하다가 정작 자신의 건강은 챙기지 못한 것이지요.

그는 알려진 것처럼 한국에서 의대를 나와 군의관까지 마친 후 천주교 살레시오회에 입회해 2001년 내전으로 고통받던 남수단 톤즈에 선교사로 자원해 파견됐습니다. 현지에서 활동한 것은 8년. 그 사이 그는 선교사, 사제, 의사, 교사, 브라스밴드 지휘자 등 거의 1인 10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생전에 톤즈의 상황을 ‘아무 것도 없는 무(無)’라고 했지요. 그렇지만 “너무도 열악한 환경이기에 오히려 하느님이 뿌려놓은 씨앗의 흔적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태석 신부에게 들은 이야기 중 “진료소에 환자가 들어오면 아무 말 없이 2~3분간 그냥 본다”는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아 손짓발짓해야 하지만 그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환자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긍휼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8년간 그런 긍휼의 마음으로, 말보다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스스로 완전연소한 삶이었습니다.

이태석 신부가 2009년 12월 남수단에서 한국으로 유학 온 청년들과 만난 모습. 이 신부는 이들과 만난 후 20여일만인 2010년 1월 14일 선종했다. /김한수 기자

솔직히 저는 이 신부님이 선종한 후 벌어진 우리 사회의 ‘이태석 신드롬’에 좀 놀랐습니다. 선종할 때까지 이태석 신부님과 그의 활동을 아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았거든요. 그렇지만 영화 ‘울지마 톤즈’ 개봉 이후 시작된 신드롬은 일시적으로 끝나지 않고 1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다양한 기념사업과 선행이 자발적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현상이 일종의 기적처럼 느껴집니다.

주변 분들에게 그 이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쭙기도 했습니다. 48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점, 우리가 어려울 때 선진국의 종교인들이 도와준 것처럼 우리도 어려운 나라의 이웃들을 돕고 싶은 마음을 대신해 실천해 준 점, 변하지 않은 초심, 요즘 말로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진정성 등 여러 요인이 거론됐습니다. 이 모든 요소를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성직자다움’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딱 꼬집어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마음 속으로 떠올리는 성직자의 모습을 이태석 신부님이 삶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좋은 기억 덕분에 이 신부님은 떠났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태석 신부님이 살아있다면 이럴 땐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며 실천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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