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끊고 미래를 바꾸다 [이유진의 바디올로지]

이유진 2023. 1. 24.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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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바디올로지]04 _단식

목숨을 걸어 권력에 대항하거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단식과 달리, 간헐적 단식은 ‘최강의 나’를 만드는 자기계발로서 신체적 투자와 자기 경영의 성격이 강하다. 무슨 목적을 가졌든 모든 단식은 위험을 무릅쓴다. 나의 굶주림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것인가, 나를 변화시킬 것인가.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고행과 단식에 전념한 그는 치유자인 동시에 카리스마 있는 정치지도자였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올해도 ‘새해 단식’을 해볼까 고민 중이다. 단식은 ‘칼 안 대는 수술’이라고 한다. 건강 증진 효과가 큰 만큼 위험하기도 하다는 얘기다. 내가 처음 단식한 건 10여년 전이었다. 극심한 통증 때문이었다. 관장, 풍욕, 된장 찜질, 붕어운동 같은 대체의학 요법도 병행했지만 효과는 크지 않았고 통증은 결국 외과수술로 치료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도 가끔 단식한다. 가학적 쾌락이랄까, 내 몸을 성공적으로 통제했다는 자부심에 마음까지 가벼워진다.

단식은 인내와 극기의 과정이다. 당연히 종교적 전통과 가까웠다. 기독교,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도교 등 여러 종교 문화에서 단식 전통이 있다. 예수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기도하며 단식했다. 한국 개신교도들의 집단적이고도 오랜 금식 실천은 유례를 찾기 어렵다고 한다. 지금도 가톨릭에서는 부활절 전 ‘사순시기’ 특정 요일에 단식, 금욕하는 것이 원칙이다. 식욕과 성욕을 추구하는 행위가 모두 금지된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사회학자 데버러 럽턴은 종교, 영성, 금욕, 식이요법 사이에 강한 역사적 연결성이 있으며, ‘먹기 과정’ 안에 에로티시즘과 쾌락이 뒤얽힌다고 보았다. 단식은 자기 통제, 정화의 기술이자 주체성을 구성하는 수단이라고 그는 말했다. 특히 여성의 단식은 여성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다는 관념을 극복하려는 전략으로도 채택된다고 설명한다. (<음식과 먹기의 사회학>) 단식은 지극히 남성적인 문화로 여겨왔지만, 여성들이야말로 오래전부터 단식의 자기 규율 방식에 매혹됐다. 기독교 역사가들의 주장을 종합하면, 서구 유럽의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수백 년간 단식과 절식 문화는 여성이 주도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의 시신을 이장할 때 보니 유해에서 분리된 머리는 부패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 머리는 시에나에 있는 산 도미니코 성당에 안치되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그 대표적 인물이 이탈리아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1347~1380)다. 고행과 단식에 전념한 그는 중환자들을 돌본 치유자인 동시에 교회 안의 분열에 목소리를 냈던 카리스마 있는 정치지도자였다. 열렬한 지지자가 늘어나자 고발당했고, 자신이 소속된 도미니코회 총회에 불려가기도 했다. 카타리나는 33살의 나이에 반복된 금식으로 아사했다. 카타리나의 단식과 죽음은 여성의 목소리를 금지한 데 따른 항거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녀 클라라(1194~1253)는 월, 수, 금요일마다 굶었다. 포르투갈의 복녀(성녀는 아니지만 공경의 대상으로 선포된 여성) 알렉산드리나 마리아 다 코스타(1904~1955)는 그를 강간하려는 남자들을 피해 달아나다가 창밖으로 뛰어내려 전신마비가 되었고 신비체험을 거듭했다. 그는 생애 마지막 13년 동안 축성된 밀떡인 성체 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독일 신비가인 테레제 노이만(1898~1962) 수녀 또한 39년 동안 하루 한 번 성체만 먹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먹지 않는 성스러운 여성들은 의심을 받았다. 식사를 거부하게 한 것은 악마일 수도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먹는 것이나 먹지 않는 것 모두 죄가 될 수 있었다. 먹을 것에 넘어간 이브도, 먹을 것을 거부하는 이브의 후예들도 유혹에 홀린 여성의 징표가 되었다. 15세기 이탈리아 리에티의 복녀 골룸바(1467~1501)는 마술로 단식한다며 비난과 저주를 받았다. 성녀들의 극단적 단식은 교회를 경유하지 않고 신과 직접 연결하여 역설적으로 생존하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단식은 자신을 증명하고 여성 억압을 극복하는 능동적인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중세 여성 신비가들을 연구한 이충범은 성녀 카타리나의 죽음이 “영웅적 자살, 당대 여성주체에 충실하려고 한 추앙받는 자살”이며 “사회, 집단의 이념에 의해 저질러진 타살”이라고 풀이한다. (이은기 <중세의 침묵을 깬 여성들>, 이충범 <중세 신비주의와 여성>)

책 <또 하나의 나를 보자>(2007, 박광수 엮음)의 주인공인 양애란씨는 13살 때부터 45년 넘게 물로 목만 축이는 정도로 살아왔다고 알려졌다. 책이 나올 무렵 그를 만난 적이 있는데 과연 작은 아이처럼 연약해 보였다. 반면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실린 에너지는 대단했다. 그는 병자가 찾아오면 상대의 고통으로 들어가 자신의 몸과 바꾼다고 했다. 검증하기도 어렵고,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중세의 성스러운 여성들처럼 양애란씨 또한 치유의 힘을 갖고 있다고 확신하며 멀리서 찾아오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단식이 초월적인 힘과 연결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21세기에도 적지 않다.

저항적 단식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인류의 문화 가운데 하나다. 1900년대 초 영국 여성참정권운동가들은 오늘날보다 훨씬 과격했다. 정부 청사 유리창에 돌을 던졌고 달리는 말에 몸을 던져 죽었다. 감옥에 갇힌 여성들은 단식을 이어갔다. 당국은 그들 앞에 음식을 늘어놓았다. 식욕을 자극하는 데 실패하자 코와 입에 고무관을 집어넣고 강제 급식을 했다. 여성참정권운동가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당시 강제 급식이 강간과 같았다고 증언한다. 여성들은 극심한 트라우마를 겪었다. 영국 점령에 반대한 아일랜드에서도 단식투쟁이 이어졌다. 감옥에서 독립운동가 한 명이 1927년 강제 급식으로 사망하자 애도 행사에 4만명이 참여했다.

1920년대 이후 인도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가 벌인 단식투쟁은 한반도에까지 전해졌다. 박열을 비롯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은 도쿄에서, 경성에서 감옥 단식투쟁을 거듭했다. 1923년 전남 신안군 암태도 농민항쟁 당시엔 무려 600명이 법원 앞에서 단식했다. 일제에 동조한 언론은 ‘단식이 유행’이라며 조선인들의 저항을 조롱했다.

1983년 5월25일 단식중인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를 손명순 여사와 아들 김현철씨가 바라보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유명한 단식을 한 사람들로 김영삼, 김대중을 빼놓을 수 없다. 1983년 야당 지도자 김영삼은 5·18 민주화운동을 추모하고 독재에 항거하는 뜻으로 23일간 단식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입원 당한 김영삼은 진료와 급식을 거부했는데, 그 병실 앞에서 안기부 요원들은 불고기를 구워먹었다고 한다. 1990년 평화민주당 총재 김대중은 지방자치제 실시, 내각제 포기 등을 걸고 13일간 단식했고 마침내 지방자치제 실시 약속을 얻어내었다.

1990년 10월15일 단식 끝에 연세대세브란스병원에 이송중인 김대중 전 평민당 총재. 연합뉴스

양김씨의 저항을 두려워하던전두환은 1995년 12월3일 안양교도소에서 5공화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에 승복할 수 없다며 음식을 끊었다. 하지만 보리차나 끓이지 않은 쌀뜨물을 교도소 쪽에 요구했다고 알려져 “그것도 단식이냐”는 빈축을 샀다. 20여일 넘게 단식했지만 오염된 쌀뜨물 섭취로 인한 식중독 증세 때문에 그의 투쟁은 모양새 없이 중단됐다. 하지만 여론전만큼은 성공적이었다.

세월호 참사 책임을 묻는 서울 광화문의 단식 농성장 풍경은 여기에 견줄 수 없이 참혹했다. 2014년 9월6일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유가족들이 단식 농성 중이던 광화문광장에 극우성향 누리집 ‘일간베스트’ 회원 등 100여명이 ‘폭식 투쟁’이라며 치킨과 피자 등을 주문해 먹으며 조롱했다. 국밥 50인분을 나눠준 이도 있었다. 공소시효 5년이 끝나기 전 희생자 가족들은 이들을 고소했지만 검찰은 불기소 처분했다.

단식은 그 자체만으로 화제가 되기도 한다.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단식 광대’(1922)는 단식을 직업으로 삼은 남자의 이야기다. 서커스단에 소속된 단식 광대는 고요히 예수처럼 40일을 단식했고 마칠 땐 관객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하지만 점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잊힌 광대는 홀로 단식하다 죽어간다. 1926년엔 실제로 단식 광대 6명이 독일 베를린에서 공연했다. 경탄한 이들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이 그 주위에서 튀긴 음식을 먹었다. 2003년에는 미국인 마술사 데이비드 블레인이 허공의 유리상자 안에서 44일 동안 단식했다. 이 21세기의 ‘단식 광대’를 찾은 사람은 25만명에 이르렀다. 이때도 주변에서 사람들은 고기를 구워 냄새를 피워댔다. (샤먼 앱트 러셀, <배고픔에 관하여>)

오늘날 대부분의 단식은 건강관리법으로 쓰인다. 16시간 동안 굶고 8시간 동안 먹는 ‘간헐적 단식’은 최근 몇 년 동안 세계적으로 가장 유행하는 다이어트 비법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미국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 기업가들이 나름의 ‘과학적인’ 간헐적 단식 프로그램을 만들며 앞장섰다. 자신의 목숨을 걸어 권력에 대항하거나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단식과 달리, 간헐적 단식은 ‘최강의 나’를 만드는 자기계발로서 신체적 투자와 자기 경영의 성격이 강하다.

무슨 목적을 가졌든 모든 단식은 위험을 무릅쓴베팅이다. 어떤 미래를 위한 모험인지가 다를 뿐이다. 굶주림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것인가, 나를 변화시킬 것인가. 확실한 건, 모든 단식이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진 | 토요판 선임기자
한겨레 편집국 문화부, 편집부, 사회부 기자를 거쳐 책지성팀장과 토요판 부장을 지냈다. 대학원에서 여성학과 문화학을 공부했고 감염병과 주부주체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지성이 금지된 곳에서 깨어날 때>가 있고, <엄마도 아프다> <종이약국>을 다른 필자들과 함께 썼다. ‘바디올로지’는 ‘몸(body)’과 ‘학(-logy)’의 합성어로, 지난 100년 동안 미디어를 통해 유포된 몸 담론을 씨앗으로 전쟁터나 다름없는 몸과 젠더, 장애, 노화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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