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B와 D 사이의 C…뮤지컬 ‘이프 덴’ [고승희의 리와인드]

2023. 1. 24.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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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6일까지ㆍ韓 초연 ‘이프 덴’
‘일과 사랑’ 선택지 위의 한 여성
화려한 무대 연출·분장 지운 현대극
평범한 삶 통해 전하는 우리의 이야기
정선아는 뮤지컬 ‘이프덴’에서 지극히 평범한 서른아홉 살 여성의 삶을 진솔하게 그리며 일과 사랑, 출산과 커리어,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풀어내고 있다. [쇼노트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한 때는 꿈이 있었다. 대학에선 제법 유능하고, 내일이 기대되는 전도유망한 학생이었다. 어떤 미래를 그려봤다.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분야에서 인정받고, 날개를 펴는 꿈. 그랬다면 10년 후의 미래는 달라졌을까. 인생은 B(Birth, 탄생)과 D(Death, 죽음) 사이의 C(Choice, 선택)다. 눈앞에 놓이는 무수히 많은 선택지 앞에서 우리의 결정이 지금의 오늘과 미래를 결정한다.

이 뮤지컬의 주인공은 아주 평범하다. ‘백마 탄 왕자’는 없다. 내면의 성장을 이루며 위대한 업적을 쌓은 ‘역사적 인물’도 없다.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핍박받는 여성도 없다. 그러나 여성 서사물. 나이 39세, 성별 여(女), 이름 엘리자베스. 그의 삶이 이제 펼쳐진다. 뮤지컬 ‘이프 덴’이다. 주의할 점이 있다. 이 작품엔 거대한 서사도,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사건 사고도 없다. 평범한 일상 앞에 놓이는 고민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가꿔가는 사람만이 있다.

뉴욕 매디슨 스퀘어 파크의 한복판. 사랑을 좇아 결혼을 하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다 10년간의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뉴욕을 돌아온다. 10년 만에 다시 돌아온 뉴욕에서 자신의 삶을 살기로 엘리자베스. 오롯이 홀로 서야 하는 삶은 조금 두렵고, 많이 조심스럽고 낯설지만, 그는 다시 주어진 삶의 선택 앞에 선다. ‘만약, ~라면(If), 어떻게 될까(Then)’.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선택과 번복의 순간을 엘리자베스는 두 개의 삶(리즈, 베스)을 통해 그려간다. 20대의 못 다 이룬 꿈을 펼치는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 베스의 삶, 한 번 더 운명적 사랑을 선택하고 워킹맘의 삶을 사는 리즈의 삶. 뮤지컬은 일과 사랑이라는 두 개의 선택지 앞에 놓인 한 사람의 평범한 삶을 그린다.

뮤지컬 ‘이프덴’의 정선아 [쇼노트 제공]

국내 뮤지컬 시장에서 현대극이자, 평범한 여성의 삶을 다룬 작품은 그리 인기가 없다. VIP석 기준 15만원 이상 나가는 티켓 값을 고려해 일상적 이야기보다 톱배우, 무대, 아찔한 고음의 노래 등 ‘화려한 볼거리’를 원하는 관객들이 많다. ‘이프 덴’은 휘황찬란한 무대도, 아름다운 의상도 등장하지 않는다. 출산 이후 이 작품을 통해 엘리자베스 역으로 복귀한 정선아에게도 특별한 경험이다. 그는 본지와의 인터뷰 당시 “소위 말하는 대극장 뮤지컬에 섰던 배우이지만 평범한 드라마를 그리는 작품에 출연하고 싶었다”며 “화려한 의상과 가발을 벗고 무대에 서고 싶었다”는 마음을 말하기도 했다. 그 작품이 ‘이프 덴’인 셈이다.

현대극이자 여성서사, 특히 두 자아를 오가는 캐릭터인 만큼 여주인공의 역할이 중요하다. 무대 위에서 사랑스럽고 화려하며, 아름다우면서도 허당미가 넘치는 공주님 캐릭터를 소화한 정선아는 자신의 역량을 100% 보여준다. 쉴새 없이 흐르는 넘버(노래)를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소화하며 오로지 실력으로 무대를 장악한다. 특히 정확한 발음으로 부르는 넘버를 통해 시간의 흐름, 이야기의 전개를 분명히 보여주기에 관객들은 그의 노래에 더 집중할 수밖에 없다.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두 사람(리즈, 베스)의 삶을 그리는 만큼 관객들은 흔한 추정을 하기 쉽다. 1막과 2막으로 나뉘어 각각 일과 사랑을 선택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릴 거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뮤지컬은 그보다 복잡한 방식을 택했다. 1막 이후 객석에선 “그래서 이건 리즈야?”, “아니면 베스야?” 라는 혼란스러운 웅성거림이 가득 찬다.

뮤지컬 배우 정선아 [쇼노트 제공]

‘이프 덴’은 같은 장소에서 다른 상황, 다른 인물의 삶을 연출한다. 안경을 쓰면 ‘커리어’을 선택한 베스의 삶, 안경을 벗으면 사랑을 선택한 리즈의 삶이다. 조명의 색도 베스 장면에선 파랑, 리즈 장면에선 주황색으로 달라진다. 극 곳곳엔 공감 요소가 많다. 결혼과 출산, 이젠 육아의 짐까지 얹으며 근심 걱정이 쌓인 리즈에게 “출산과 육가, 우린 둘 다 잘 해낼 수 있을거야”라고 말하는 남편에게 “어디서 공익광고에도 못 쓸 대사를 하냐”고 내뱉는 대목은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라면 피식 웃으면서 박수를 보낼 만하다.

어찌 보면 밋밋하고, 임팩트도 없으며, 그럴 듯한 서사보다는 일기장 속 이야기 같은 평범한 스토리이나 메시지는 분명하다. 일과 사랑, 결혼과 출산 등 그 어떤 삶을 선택해도 ‘잘못된 선택’은 없다는 점이다. “길을 잃어도 괜찮다”며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살아가자는 이야기는 잔잔히 스민다. 한 사람의 삶만 다룬 것은 아니다. 일과 사랑, 결혼과 출산 등 마흔을 앞둔 한 여성의 삶의 과정을 이야기하며 기후위기, 성소수자, 주거 불평등의 문제를 끊임없이 언급한다. 무겁지 않게, 힘주지 않고 건네는 이 이야기들이 도리어 깊이 남는다.

이 작품은 ‘넥스트 투 노멀’로 퓰리처상과 토니상을 받은 브라이언 요키와 톰 킷이 의기투합한 작품이다. 2014년 6월 발표한 ‘이프 덴’ OST는 브로드웨이 앨범 차트 1위,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 19위에 오를 만큼 아름다운 음악으로 사랑 받았다. 공연은 다음달 26일까지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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