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LA 교외를 피로 물들인 총기난사
이민생활의 고단함을 달래던 사교 공간이 피로 물들었다. 코로나19 이후 처음으로 거리에서 재개된 축제의 장은 애도로 뒤덮였다.
음력설 전날 미국 로스앤젤레스(LA) 교외의 몬터레이 파크의 댄스 교습소에서 발생한 총기난사는 아시아계 미국인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몬터레이 파크는 인구 6만명 중 65%가 아시아인으로, 이 지역 댄스 교습소는 고령 이민자들에게 안식처 역할을 해 왔다.
희생자 대부분은 60~70대 중국· 베트남계 고령 이민자들
23일(현지시간) LA 수사 당국 등에 따르면 지난 21일 오후 10시20분쯤 몬터레이 파크의 ‘스타 볼룸 댄스 스튜디오’에서 베트남계 미국인인 휴 캔 트랜(72)의 총격으로 숨진 이는 모두 11명으로, 대다수가 중국계 또는 베트남계였다. 이는 지난해 5월 텍사스주 유밸디 초등학교 총기 난사 이후 가장 큰 인명 피해가 큰 총격이다. 비영리단체 ‘총기폭력 아카이브(Gun Violence Archive)’에 따르면 몬터레이 파크 사건은 미국에서 올해 들어서만 33번째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이다.
총격 당시 트랜은 대용량 탄창이 달린 공격용 총격으로 42발의 총알을 발사한 것으로 조사됐다. 목격자들은 트랜이 교습소 안에 들어서자마자 총격을 가했다고 전했다.
범행 20분 뒤쯤 그는 인근 알햄브라의 댄스 교습소 ‘라이라이 볼륨 스튜디오’에서 2차 범행을 시도했다. 하지만 현장에 있던 비무장 상태의 브랜든 차이가 그를 제압해 총을 빼앗으면서 참극을 막았다. 트랜은 이후 차로 달아나 40분 떨어진 토런스의 쇼핑몰 인근 주차장에서 스스로 총을 쏴 숨졌다.
수사 당국은 트랜의 정확한 범행 동기를 조사하고 있지만 개인적 원한에 의한 범행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뉴욕타임스, CNN 등은 교습소의 오랜 회원이었던 트랜이 일부 회원들에 불만을 품고 총격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고 전했다.
트랜은 전처를 20년 전 댄스 교습소에서 만났지만 2005년 이혼했고, 주변인들과 불화한 경우도 잦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트랜으로부터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소송까지 갔던 애덤 후드는 워싱턴포스트에 “트랜이 언젠가는 정신나간 짓을 할 줄 알았다”고 말했다.
트랜은 1966년 이후 발생한 총기난사범 가운데 최고령이다. 비영리 단체 ‘폭력 프로젝트’에 따르면 지난 60년간 미국에서 총기난사를 저지른 범인의 평균 연령은 32세였다.
희생자 대부분은 60~70대의 중국계나 베트남계 노인들이었다. 댄스 교습소 단골이었던 65세 마이 느한은 주차장 내 차량 안에 있다가 범인의 총에 맞아 숨졌다. 난의 조카는 “비록 마지막 댄스가 되었지만 그가 좋아하던 춤을 마지막까지 즐겼다는 것은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몬터레이 파크 인근에 한인들이 운영하는 식당 등이 있지만 피해는 없었다. 제임스 안 LA한인회 회장은 통화에서 “한인들 피해가 없었다고 안도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 아시아 커뮤니티 일원으로 슬픔을 당한 중국계 단체들에도 손을 내밀어 연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비극이 발생한 스타 볼룸 댄스 스튜디오는 약 30년 전부터 지역 사회의 친교 공간으로 자리매김한 곳이다. 특히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중국계 노인들이 라틴 댄스 차차나 룸바를 배우기 위해 교습소를 찾았다. 강습생 대다수가 만다린이나 광둥어가 익숙한 중국계였지만, 때때로 동유럽계 이민자나 미국인들도 방문해 서로 어울린 것으로 알려졌다.
총기난사는 몬터레이 파크에서 코로나19 이후 3년 만에 열린 음력 설 기념 축제가 끝난 지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당시 약 10만명의 주민들이 거리에 나와있던 것으로 추산된다.
사건 일어난 몬터레이 파크는 어떤 곳?
미국에서 아시아계가 처음으로 과반을 넘은 도시인 몬터레이 파크는 아시아계 이민사에서 상징성을 지닌다. 용 첸 캘리포니아대(어바인) 역사학과 교수는 지역 인터넷 언론 ‘엘에이스트’에 “몬터레이 파크는 미국에서 첫번째로 교외에 형성된 차이나타운”이라며 “(이민자를) 환대하고 관용이 넘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고 말했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일본계 미국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이 곳에는 1970년대 무렵부터 대만, 홍콩, 중국 대륙, 베트남 등에서 이민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어 언론들은 몬터레이 파크를 ‘아시아계 미국인의 베버리힐스’로 홍보하기도 했다.
이번 사건이 상대적으로 강화된 총기 규제 법률이 시행 중인 캘리포니아에서 벌어진 점도 충격을 더하고 있다. 캘리포니아는 총기 구매자의 신원 조회 절차를 엄격하게 하고 있고, 경찰 등 당국이 총기 소지자가 타인에 위험을 제기할 수 있다고 본 경우에는 총기를 빼앗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지난해 법원의 위헌 판단 전까지는 반자동 소총 AR-15 등 공격용 총기도 금지했다.
실제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캘리포니아의 총기 사망률은 10만명당 8.5명으로 미국 전체 평균인 13.7명에 비해 낮았다. 로버트 루나 LA카운티 보안관은 전날 기자회견에서 “캘리포니아는 미국에서 가장 엄격한 총기 규제 법안이 있지만 오늘 일어난 일을 보라”며 “현상 유지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워싱턴 | 김유진 특파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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