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세입자가 ‘갑’…하락한 전셋값 만큼 집주인이 월세 내는 ‘진풍경’

조성신 매경닷컴 기자(robgud@mk.co.kr) 2023. 1. 24.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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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전세난 확산에 집주인 을로 전락
전세보증금 낮춘 갱신 계약 증가
“계약갱신청구권 사용 말아달라” 요구도
잠실주공 5단지 , 본 기사와 관련 없음 [사진 = 연합뉴스]
전셋값이 떨어지면서 전세시장에 낯선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집주인은 늘 갑(甲)이라고 여겼지만, 지금은 정반대인 상황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나오는 전세 사기 소식에 집주인 면접을 보기도 하고, 보증금을 낮춘 갱신계약도 부지기수다.

23일 집토스가 지난해 10~11월 국토교통부가 제공하는 수도권 지역의 전·월세 실거래가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갱신 계약 중 기존 계약보다 전세환산 보증금을 낮춰 감액한 갱신 계약 비율이 13.1%로 나타났다. 이는 국토부가 전·월세 계약갱신요구권 사용 관련 데이터를 공개하기 시작한 2021년 이후 최고치다.

지난해 3분기(7~9월) 4.6%에 비해 3배 가까이 급증했다. 기존 계약과 같은 금액으로의 갱신한 비율도 12.9%를 기록, 지난해 3분기(9.1%)보다 증가했다.

세입자들이 감액 계약을 하면서 계약갱신요구권까지 사용하는 것은 전셋값 하락세가 지속하면 언제든지 전세계약을 해지하고 다른 전셋집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갱신권 사용 이후 세입자가 임대인에게 3개월 전 퇴거를 통보하면 보증금을 돌려줘야 한다.

2020년 개정된 임대차보호법을 보면 임차인들은 첫 전세계약 기간 2년이 지난 후 계약갱신요구권을 쓸 수 있다. 이 경우 임차인은 계약 기간이 남아 있어도 타 지역으로 이사 등을 이유로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지역 및 주택 유형별로는 경기지역의 아파트에서 감액 갱신 계약 비율이 23.1%로 두드러졌다. 인천 지역은 연립·다세대 주택의 감액 갱신 계약 비율이 14.3%로 상대적으로 높았다. 이에 비해 서울 지역은 감액 비중이 아파트와 연립·다세대가 3.2%, 오피스텔은 2.1%로 낮은 편이었다.

감액 계약이 증가한 것은 최근 금리 인상과 전셋값 하락으로 세입자를 구하기 어려운 역전세난이 심화하면서 기존 계약자와 보증금을 낮춰 계약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는 집주인이 늘었기 때문이다.

정성진 부땡톡 대표는 “집주인 입장에서 세입자가 언제 나갈지 모르지만, 그런 불확실성을 안고서라도 어쩔 수 없이 연장 계약을 해야만 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집주인이 세입자에 “매달 40만원 드릴게요”
고금리에 따른 주택 매매가 하락과 전세 수요 급감이 겹치면서 전셋값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아파트 전셋값은 11월까지 2021년 말보다 5.23% 떨어졌다. 이는 해당 통계가 처음 나온 2003년 이래로 최대 하락폭이다. 같은 기간 전국 주택 매매 가격 변동률(-4.79%)보다도 하락세가 두드러졌다.

이른바 ‘역(逆)전세난’도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역전세난은 전셋값이 기존 계약 때보다 하락해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제대로 돌려주기 어려워진 상황을 말한다.

이에 따라 시장에서는 갖가지 진풍경이 일어나고 있다. 시중의 전셋값 급락으로 보증금 차액을 돌려주지 못하게 된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전세금 대출 이자를 따로 지원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네이버 부동산스터디 카페에서는 “집주인으로부터 하락한 전셋값에 따른 보증금 차액만큼 세입자에게 월세 이자를 지급하는 ‘역월세’ 제안을 받았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고 묻는 한 회원의 질문이 올라왔다.

예를 들어 하락한 전셋값 1억원을 당장 돌려주지 못하는 집주인이 세입자가 계속 거주하는 조건으로 1억원에 대한 연간 이자를 매월 40만~50만원대씩 주는 식이다. 이 게시글과 같은 ‘역월세’ 경험담은 부동산 커뮤니티에서 심심치 않게 올라오고 있다.

집주인의 자금력 등을 꼼꼼히 따지려는 세입자가 늘면서 ‘집주인 면접’도 유행하고 있다.

전세 매물을 내놓은 전모(53)씨는 최근 전 공인중개사로부터 당혹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내용인 즉 예비 세입자가 집주인의 재무 상태를 미리 확인하고 싶다며 회사 재직 증명서와 국세·지방세 등의 완납 증명서 제출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전씨는 불쾌감이 들었지만, 매물 가격을 수차례 낮춰 서너 달만에 어렵게 나타난 세입자인 만큼 요구하는 대로 해줄수 밖에 없었다.

전세가 워낙 귀해 사람들이 전셋집을 보려고 복도에 길게 줄지어 있는가 하면 세입자 면접을 보기도 했던 1~2년 전과 분위기가 정반대로 바뀐 것이다.

집주인들이 현 세입자에게 가격을 낮춰줄 테니 계약갱신청구권을 쓰지 말고 재계약을 하자고 요청하는 사례도 허다하다. 계약갱신권을 사용하면 세입자는 2년을 채우지 않아도 언제든 계약을 해지할 수 있어서다.

甲乙 뒤바뀐 전세 시장
서울 송파구의 한 부동산 입구에 아파트 전세 매물 대신 월세 매물표만 잔뜩 붙어 있다. [박형기 기자]
집주인들은 전세 세입자를 구하기 위해 각종 ‘당근’을 제시하고 있다. 내부 수리나 가전제품 교체가 가장 흔하다.

지난해 10월 분당신도시의 한 아파트에 전세 세입자를 들인 조모(46)씨는 에어컨과 화장실 변기·수도꼭지를 모두 교체해줬다. 당초 중개업소에 매물로 내놓을 때만 해도 수리 계획은 없었는데, 한 달 넘도록 집을 보려는 사람이 안 나타나자 마음을 바꿨다.

그는 세입자가 원하는 대로 300만원 넘게 돈을 들여 수리해 줬지만, 세입자를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르는 다른 집주인을 보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세입자가 계약 기간 중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통보하는 바람에 집주인들이 곤경에 처하는 경우도 잇따르고 있다. 2020년 개정된 임대차보호법에선 갱신 계약의 경우에 계약 기간(2년) 중이라도 세입자가 3개월 전에 통보하면 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했다. 세입자를 보호한다는 취지였지만, 지금 같은 ‘역전세 상황’에선 세입자들이 집주인을 압박하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전셋값 급락을 못견디고 집을 급매로 던지는 집주인도 늘고 있다. 전세 끼고 집을 샀던 갭 투자자들이 보증금을 돌려주기 어려워지자 시세보다 싸게 처분하는 것이다. 서울 송파구의 한 공인중개사는 “시세보다 2억~3억씩 낮은 가격에 나오는 매물들은 2~3년 전 갭 투자로 산 것이 많다”며 “전셋값 하락이 장기화하면 이런 매물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김상훈 국민의힘 의원실이 국토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서울에서 거래된 주택 중 갭 투자 비율은 2018년 14.6%에서 2021년 41.9%로 치솟았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갭 투자자를 보호할 이유는 없지만, 1주택자나 등록 임대사업자에 한해 퇴거 자금 대출 문턱을 낮춰줘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이 같은 진풍경들은 시장에서 역전세난이 당분간 계속될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고 보고 있음을 방증한다. 2020년 5월 0.50%, 2021년 11월 1.00%였던 국내 기준금리는 지난해부터 미국 등 글로벌 금리 인상 가속에 발맞춰 급격히 올라 올해 들어 3.50%까지 높아졌다.

올해도 한국은행이 긴축의 고삐를 늦추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 만큼 집값과 전셋값 동반 하락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우려된다. 문제는 역전세난 심화로 보증금이 떼이는 ‘전세 사기’에 대한 걱정을 해야 하는 세입자가 급증하는 한편, ‘깡통전세’(집값이 전세 보증금에 미치지 못하는 집)의 속출로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제대로 못 주는 집주인까지 급증할 가능성이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 임대차 시장에서 전세 보증금 반환 관련 분쟁도 증가하는 추세다. 작년 1~11월 기준 서울의 ‘임차권등기명령’ 신청 건수는 3700여 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26% 증가했다. 임차권등기명령은 전·월세 계약 만료 시점에 세입자가 보증금을 받지 못할 경우 법원에 신청해 받아낼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최소 2년 동안 집값과 함께 전셋값이 더 하락할 가능성이 큰 만큼, 정부가 세입자와 집주인 양쪽 모두를 위한 임대차 시장의 연착륙 유도에 절실히 나서야 하는 시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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