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수산 수출시대]② 국가 경쟁력 된 ‘종자주권’…‘현대판 노아의 방주’ 씨앗은행은 어떤 곳?

전주=박소정 기자 2023. 1. 24. 06:0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코로나, 전쟁…” 식량의 무기화, 부각되는 種子主權
韓 식물종자 4곳 중복보관, 그중 전주 종자은행 가보니
종자은행서 분양한 자원들로 품종 개발…종자산업 근간
종자 수출보다 수입이 두배…'골든씨드’ 후속 정책 필요
전라북도 전주에 위치한 농촌진흥청 종자은행 입구. /전주=박소정 기자
지난해 5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북동부 하르키우에 있는 종자은행, 유리에우연구소(Yuriev Institute)를 폭격했다. 해당 연구소에는 약 16만종의 씨앗 품종이 보관돼 있었다. 다행히도 폭격으로 손상된 부분은 보관용이 아닌 조사용 종자였다는 메시지가 전해지면서 많은 학자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종자은행 파괴 목표를 가리켜 다음과 같은 한 줄로 표현했다.
‘Destroy a seed, erase a future(종자를 파괴해 미래를 지워라)’

코로나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식량은 ‘무기’로서 부각됐다.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서서 한 국가의 생존과 직결되는 안보 문제라는 것이다. 그 식량은 결국 ‘씨앗’에서 나온다. 우리 종자를 확보해 잘 지키는 것이 오늘날 주요 국가 경쟁력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른바 종자주권(種子主權)이다.

나아가 종자주권은 언젠가 식량난이 현실화할 먼 미래 세대를 위한 것으로서의 의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종자 산업은 당장 국가 경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급률이 떨어지는 품종은 외국에서 돈을 주고 사들여와야 하고, 반대로 경쟁력 있는 우리 품종은 해외에 팔아 돈을 벌 수 있다.

‘종자은행’의 존재는 이런 모든 작업들의 근간이 된다. 소실되지 않도록 수십년간 온전하게 보관하는 동시에, 새로운 품종을 육성하기 위해 자원들을 분양하는 역할을 하는 것도 이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식물 종자저장소로는 ‘씨드볼트(Seed Vault)’라고 불리는 영구저장소가 경북 봉화 백두대간수목원과 북극 스발바르에, 그리고 수시로 빼다 쓸 수 있으면서도 중복저장소의 역할을 하는 종자은행이 전북 전주, 경기 수원에 4중으로 마련돼 있다. 그중 한 곳인 전주 농업유전자원센터 종자은행을 찾아가 봤다.

전라북도 전주에 위치한 농촌진흥청 종자은행 내 중기 저장고의 모습. 사람의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6자리의 ‘IT 번호’를 부여받은 종자들이 촘촘히 저장고에 보관돼 있다. 영상 4도씨(℃), 상대습도 30% 이하 조건이 유지되는 곳으로, 한번 보관하면 30년 동안 그대로 보존이 가능하다. /농촌진흥청 제공

◇ ‘서약서’ 쓰고 들어선 그곳, 촘촘히 진열된 25만종 씨앗 통

지난 19일 종자은행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보안 서약서 한 장이었다. 이곳은 정확한 위치가 노출돼선 안 되는, 국가정보원에서 관리하는 국가 보안시설이다. ‘농업유전자원 저장 시설과 관련해 얻은 비밀이나 중요 정보 사항이 국가 안전 보장에 중대한 사항임을 명심하고 이를 누설하지 않을 것이며, 위반 시 반국가적 행위임을 자인해 어떤 처벌도 감수할 것임을 서약합니다’란 문구가 쓰여 있었다. 이곳에 보관된 것들이 단순한 씨앗들 그 이상의 존재임을 가늠케 하는 대목이었다.

종자은행 초입에 위치한 자원준비실엔 직원 10명 정도가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씨앗들이 담긴 통들과 대조하는 일에 한창이었다. 저장고에 들어가기 전 일일이 이를 DB(데이터베이스)화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국가등록심의를 거친 품종들은 이곳에서 마치 사람의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6자리의 ‘IT 번호’를 부여받는다. 매년 3000종 정도의 자원이 이렇게 새로 번호를 부여받고 이곳 저장고에 입성하게 된다.

전라북도 전주에 위치한 농촌진흥청 종자은행 내 장기 저장고의 모습. 영하 18℃, 상대습도 40% 이하의 조건이 유지되는 곳으로, 사람이 들어갈 수 없어 로봇으로 관리한다. 100년 자원 보존이 가능해 후손들에게 자원을 물려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농촌진흥청 제공

저장고의 일정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별도로 마련된 공간인 ‘버퍼룸’을 지나 좀 더 깊숙한 공간으로 들어가니 중기 저장고가 나왔다. 한번 보관하면 30년 동안 그대로 보존이 가능한 곳이다. 두꺼운 철제문을 열고 들어서니 광활한 내부가 펼쳐졌고 한기가 느껴졌다. 언제나 영상 4도씨(℃), 상대습도 30% 이하 조건이 유지되는 곳이다. 습도 유지를 위해서 종자은행 건물에는 화장실도 없다고 한다.

전라북도 전주에 위치한 농촌진흥청 종자은행 입구에 게시된 '농업유전자원 보유 현황'. 세계 5위 규모의 자원들이 보관돼 있다. /전주=박소정 기자

마치 오래된 문서보관소처럼 철제 캐비닛이 촘촘하게 세워 있었고, IT 번호 분류에 따라 정리된 씨앗 통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북한을 포함한 전 세계 각국에서 수집한 씨앗들이 총망라돼 있었다. 종자은행 관계자는 “중기 저장고는 종자 활용을 위한 목적으로 보존하는 곳으로, 신품종이나 신약품 소재를 개발하기 위해 분양 신청이 들어오면 찾아서 내보내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이 밖에도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영하 18℃, 상대습도 40% 이하의 장기 저장고가 100년간의 자원 보존 역할을 하고 있으며, 종자 형태로 번식이 되지 않거나 형질이 변하는 감자·마늘·사과·배 등의 작물을 마이너스(-) 196℃의 액체질소에서 영양체 형태로 보존하는 초저온 보존실 등이 있다. 지난 1일 기준 이곳엔 24만9863종의 종자유전자원이 보존돼 있다. 무려 세계 5위 규모다.

◇ 종자 수출입, 작년 951억원 수지 적자

은행이 돈을 빌려주듯 종자은행은 보존 식물자원들과 이들의 정보를 필요로 하는 연구자나 민간에 제공한다. 종자은행에서 나간 씨앗들은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거나 보급하는 재료로 쓰인다. 이때 종자는 후손의 생존을 위한 대의적 도구이기 이전에 경제 효과를 창출하는 산업이 된다.

종자는 그냥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정 종자의 권리가 있는 국가에 로열티를 지불하고 써야만 한다. 그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파프리카 종자는 1g에 10만원, 일부 특이 토마토 종자는 1㎏당 무려 약 1억2000만원(9만 유로)을 호가하기도 한다. 우리나라가 종자 로열티로 지급하는 금액만 연간 1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종자 수입액은 수출액의 2배를 넘어서는 현실이다. 농림축산식품부·국립종자원이 제공한 종자 수출입 현황을 보면, 2018년 이후로 연간 종자 수출액은 지속해서 증가 행진을 이어왔으나 지난해에는 전년(6091만달러)보다 주춤해 5571만달러를 기록했다. 수입액은 지난해 1억3274만달러를 기록했다. 7703만달러(약 951억원) 적자다. 지난해 증가세가 꺾인 것은 코로나 영향이라는 것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그래픽=손민균

그래서 중요한 것이 자급률이다. 특정 품종의 자급률이 낮으면 그만큼을 해외에서 사들여 충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농림식품기술기획평가원(IPET)에 따르면 10년 전인 2012년만 해도 우리 농가 10곳 중 7곳은 토마토 종자를 해외에서 들여와서 키웠다. 당시 토마토 자급률은 30%, 토마토 종자 총수입액은 610만2000달러였다. 지금은 수입 품종을 대체하는 신품종 개발·보급 등으로 2019년 기준 자급률이 55.3%까지 올라갔다.

신품종 개발은 우리나라 자급률 개선은 물론, 수출을 통해 또 다른 먹거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딸기가 대표적이다. 충남농업기술원 산하 딸기연구소에서 출시한 매향·설향·킹스베리·비타베리·하이베리 등은 국산 품종 보급률을 96%까지 끌어올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20년 전인 2005년만 해도 일본 품종이 90%를 차지하던 우리 딸기 시장이었다.

품종 개량 과정에서 열매를 맺은 딸기의 봉투가 열려있는 모습. /세종=이민아 기자

◇ 10년짜리 ‘골든씨드프로젝트’ 성과…후속이 안 보인다

이 때문에 한때 우리 정부는 종자산업 육성을 중장기 역점 사업으로 추진했었다. 이른바 ‘골든씨드프로젝트(GSP·Golden Seed Project)’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됐고, 2011년부터 2021년까지 장장 10년에 걸친 기간 동안 나랏돈 3985억원 등 총 4911억원을 들여 추진됐다.

IPET가 발간한 ‘GSP 백서’에 따르면, 10년간 사업 추진 결과 신품종 및 브랜드 955건 개발, 수출 2억5641만달러, 국내 매출 1382억원 등을 달성했다. 특히 해외 품종을 대체할 국산 품종을 개발하는 데 주력해, 2012년 대비 2019년 자급률을 ▲토마토 30→55.3% ▲양파 20→29.1% ▲파프리카 0→6.3% 등으로 향상하는 성과가 있었다.

문제는 골든씨드프로젝트가 종료된 지금, 앞으로 종자 산업 육성을 위한 국가적 전략이 있느냐다. 10년간 프로젝트를 마친 사업단장들은 각기 후속 과제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낸 바 있다. 임용표 채소종자사업단장은 GSP 백서를 통해 “해당 사업을 통해 분자 육종이 활성화됐고 기능성 품종의 개발을 통해 세계 종자 시장을 견인할 수 있는 큰 기반을 마련했다”면서도 “과제가 종료되며 후속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종자 기업의 도전은 계속돼야 하고, 이를 위한 국가적 전략과 적극적인 지원도 필요하다”고 남겼다.

백두대간 글로벌 시드볼트에 저장된 제주 자생식물 종자. /제주테크노파크 제공

자유무역협정(FTA)과 같은 글로벌 시장 개방 이슈 앞에서 국산 품종 개발 등 종자주권을 지키는 일은 더욱 중요한 과제가 됐다. 경쟁력 있는 품종을 만들면 국내 시장을 지키는 것뿐 아니라 수출길을 드넓힐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관련한 정책적 지원이 요구되는 가운데, 현재 전북 김제공항 부지(156㏊)에 종자산업 혁신클러스터를 조성하는 방안 정도가 그나마 새롭게 추진되는 주요 관련 정책으로 꼽히고 있다. 2020년 기준 세계 종자 시장은 440억달러 규모로 매년 4% 내외 성장세를 거듭하고 있다. 이 중 우리나라의 점유율은 1.4%(6억2000만달러)에 불과하다.

- Copyright ⓒ 조선비즈 & Chosun.com -

Copyright © 조선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