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의사당에 여전히 남아있는 ‘노예주’ 동상들
“오늘날의 도덕적 기준에 비추어 그를 평가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동시대인이었던 헤리엇 터브먼, 프레데릭 더글러스, 에이브러햄 링컨 모두는 노예제가 언제나 비도덕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미국 민주당의 스테니 호이어 하원의원은 지난해말 수도 워싱턴의 연방의회 의사당에 세워진 로저 태니 전 연방대법원장의 흉상을 철거하는 법안 표결에 앞서 이렇게 말했다. 제5대 연방대법원장인 태니 전 대법원장은 노예제를 옹호한 악명높은 판결인 1857년 ‘드레드 스콧 대 샌드포드’ 결정문을 쓴 당사자다.
법안은 그의 흉상이 매일 전 세계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의사당에 남아있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며 45일 이내에 철거하도록 규정했다. 이 법안에 조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하면서 태니 전 대법원장의 흉상은 서명했다. 1967년 흑인 최초의 연방대법관이 된 더굿 마셜 대법관의 흉상으로 대체된다.
앞서 2020년 12월에는 남부연합군 사령관 로버트 리의 동상이 의사당에서 철거된 바 있다. 버지니아주를 대표하는 동상으로 의사당에 110년 넘게 서 있었지만, 버지니아 주의회 산하 위원회는 노예제 존속을 위해 싸운 인사가 더는 주를 대표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리 장군의 동상은 1951년 16세의 나이로 흑인 학생의 처우에 대해 문제삼으며 시위를 벌인 바버라 존스의 동상으로 대체될 예정이다.
의사당 곳곳에는 미국 건국 시기 주역들부터 유명 정치인들의 얼굴을 담고 있는 수많은 그림이나 동상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관람객들에게 개방된 공간에서도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를 옹호했던 이들을 기리는 작품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지난달말 워싱턴포스트(WP)는 의사당 내 400여개 작품을 분석한 결과 3분의1에 달하는 작품이 노예주나 남부연합군 소속 인사들을 기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리 장군의 동상이 놓여있던 의사당 내 ‘국립 조각의 전당’에도 관련 작품이 32개나 된다고 WP는 전했다.
남부연합 대통령이었던 제퍼슨 데이비스의 동상은 켄터키, 뉴올리언스주 등에서 철거됐지만 의사당에는 남아있다. 독립선언문 공동작성자이자 대규모 노예주의 가족이었던 로버트 리빙스턴의 동상도 마찬가지다. 리빙스턴은 흑인 여성들로 이뤄진 매춘업소를 소유하기도 했다고 WP는 전했다.
미 의사당 투어 코스로 빠지지 않는 의사당 로톤다 벽면을 둘러싸고 있는 그림도 예외는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독립선언문 서명식을 다룬 그림이다. 이 그림에 나온 47명의 인물 가운데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비롯해 토마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등을 비롯해 34명이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의사당 내 여러 작품들이 노예제를 지지한 미국의 어두운 역사를 담아내고 있지만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 안내판은 거의 없다고 WP는 전했다. 또한 흑인 노예가 그림에 등장한 사례도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의사당 터를 물색하는 과정을 묘사한 천장 벽화 단 하나 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몇년 전부터 미국 전역에서는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를 옹호했거나 남부 연합군 소속으로 활동한 지도자들의 동상이나 기념비가 철거되는 일이 이어지고 있다. 2015년 6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흑인교회에서 백인 우월주의자에 의한 총기난사가 벌어진 이후 남부연합기 퇴출운동이 활발해졌다.
2020년 5월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인한 흑인 청년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을 계기로 확산된 인종차별 반대 시위는 이 흐름에 불을 당겼다. 그 해에만 약 100개의 남부군 동상이 철거됐다고 NPR방송은 전했다.
비영리단체 남부빈곤법센터(SPLC)에 따르면 찰스턴 교회 총기난사 이후부터 2020년 7월까지 미 전역 19개주에서 남부군 동상 59개가 철거됐는데, 플로이드 사망과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시위 이후에는 동상 약 160개가 철거됐다.
워싱턴 | 김유진 특파원 yj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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