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서… 모니터에서… 무한히 흐르는 시간의 물결 [박미란의 오프 더 캔버스]

2023. 1. 23.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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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보관하는 플랫폼-정세라의 ‘더 스트림’
영상작품 기록 방식 고민서 시작된
공공 비디오아트 아카이브 플랫폼
국내 최초 영상작품 스트리밍 서비스
전시장 나서도 온라인 감상 가능해져
오프라인 작품 상영회 ‘…스크리닝’
난해하고 어려운 예술 가까이 접근
2018년부터 동시대 작가 35명 참여
마치 다른 시간 여행한 듯한 느낌 줘

우리의 지금은 어떻게 기억될까. 지나가는 것들이 소중해 자꾸 돌아본다. 그러다 보면 다가오는 것들이 미처 온 줄도 몰라 놀란 마음 다잡고 한 걸음 또 내딛는 것이다. 시간은 누구를 다정히 기다려주지 않아서 물처럼 흐르고 안개처럼 사라진다. 그래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 아닐까. 더 오래 기억하고 싶은 그리움 때문에 말이다. 그것이 사진이 되고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시간을 보관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시간을 다루는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지나가면 사라지고, 멈추어 있으면 빛바래는 것들을 보관하는 작업에 관하여서다. ‘더 스트림(The Stream)’은 한국 비디오아트 아카이브 플랫폼이다. 국내 최초로 영상 작품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영상의 실시간 재생 기법을 가리키는 스트리밍(streaming)의 동사 원형에 정관사를 더해 이름 붙였다. 무엇보다 국내외 비디오아트의 ‘흐름’을 뜻하는 명칭이다. 큐레이터이자 시각예술 연구자, 미술비평가로 활동해온 정세라(45)가 이곳의 설립자이자 디렉터다.
아르코미술관 스크리닝 프로그램 ‘직면하는 이동성: 횡단, 침투, 정지하기’(2021∼2022) 전시 전경. 더 스트림 제공
#느리지만 유연하게… 움직이는 시간을 보관하기

정세라는 예술학, 현대미술이론, 매체미학을 공부했다. 2006년부터 큐레이터로 활동했으며 2010년부터 미디어아트를 중심으로 한 연구 및 비평, 전시 기획을 해왔다. 최근 아르코미술관에서 ‘직면하는 이동성: 횡단, 침투, 정지하기’(2021∼2022)를 기획했다. 국립현대미술관 필름앤비디오 정규 프로그램 ‘디어 시네마: 차이와 반복’에서 ‘비디오 심포니: 연접, 이접, 통접의 서곡’(2019)을 선보이기도 했다. ‘비디오 액츠’(2020). ‘비디오/스펙트럼/댄스’(2019), ‘비디오 랜드스케이프’(2018), ‘비디오 포트레이트’(2017) 등 연구 기반 전시 기획을 통해 동시대 한국 비디오아트의 지형도 그리기에 힘쓰고 있다.

디지털 시대 이미지 소비 방식을 적극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2010년경이었다. 해외에 비해 미비했던 국내 비디오아트 아카이브의 필요성을 실감하면서다. 비디오아트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선보이는 미술인데 그에 대한 대다수의 기록이 멈추어 있는 스틸 컷에 머문다는 점이 문제로 다가왔다. 관객과 큐레이터, 연구자가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시장을 나선 이후에도 움직이는 이미지를 감상할 플랫폼이 필요했다. 모두를 위한 공공적 아카이브 플랫폼을 구축하기로 마음먹었다. 수년에 걸친 준비 끝에 2015년 4월, 더 스트림을 공식 론칭했다. 민간이 운영하는 플랫폼이기에 국공립 미술 기관의 활동과 차별성을 지닌다. 온라인 플랫폼에는 현재 약 400여편의 영상 작품이 올라와 있다. 방문객 누구나 제약 없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오프라인 활동도 적극적이다. 주기적인 상영회를 개최하고 동명의 비디오아트 전문 연구 서적을 펴내는 등 비평적 접근을 지속한다.
더 스트림 디렉터 정세라. 더스트림 제공
정세라는 2017년 앨리스온(AliceOn)과의 인터뷰에서 ‘느리지만 유연하게 움직이는 아카이브 플랫폼’을 만들어 가고 싶다고 했다. 전문 자료를 보존 및 관리하는 아카이브 활동은 연구자의 진중한 책임감을 요구한다. 앞으로의 긴 시간을 전제하고 시작해야만 하는 일이다. 더 스트림이 오래 자리를 지킨 것은 그의 시간이 그렇게 흐른 덕분일 것이다. 생동하는 시간이 차게 굳지 않도록, 느리지만 유연하게 움직여왔기 때문에 말이다. 더 스트림은 시간의 강물을 한 움큼 떠다 놓은 새들의 둥지 같다. 온라인 플랫폼의 첫 화면에서 작품 이미지를 클릭하면 비디오아트를 실시간 재생해 볼 수 있다. 그 곁에 작품 소개와 작가의 인터뷰 기록이 정갈한 문체로 더해진다. 작품의 시간을 오롯이 보존하는 데서 나아가 작가의 시간을 기다랗게 확장하는 작업이다.

#일상을 멈추어야 재생되는 시간, 더 스트림 스크리닝

연대 앞 번화가에서 한 걸음 비껴난 골목 어귀에 좁다란 4층짜리 건물이 있다. 이곳의 옥탑에서는 홀수 달 마지막 월요일의 해질 무렵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난다. 입간판이 말해주는 그 밤의 이름은 ‘더 스트림 스크리닝’.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오프라인 상영회다. 어렵고 난해한 비디오아트에 가까이 다가갈 기회를 만들고자 기획한 자리다. 기존의 국내 미술계에 좀처럼 없던 시도였다. 첫 3년은 연희동 소재의 자체 공간에서 운영했고 2018년 이후 최근까지 창천동 신촌극장에서 진행했다. 권혜원, 김세진, 김아영, 김민정, 염지혜, 정연두, 박경근, 박민하, 신기운, 신이피 등 총 35명의 동시대 작가가 더 스트림 스크리닝에 참여했다.
제24회 더 스트림 스크리닝: 정연두 작품 상영 현장(2020). 더스트림 제공
2020년 찾아온 코로나19 유행 탓에 현장 관객을 40인에서 20인으로 축소하게 됐다. 방역 지침에 따라 규모와 일정을 조정하며 어려움을 겪었으나 중단하지는 않았다. 온라인과 구별되는 오프라인 경험을 강조하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당해 5월 진행된 제24회 스크리닝에서는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정연두(54)가 ‘소음 사중주’(2019)라는 영상 작품을 선보였다. 광주비엔날레 출품 예정이던 신작을 우선 공개했기에 뜻깊은 자리였다. 하나의 공간에서 네 개 채널 영상을 동시 재생하는 방식으로 선보여 관람 효과를 극대화했다. 이듬해 7월 진행한 김민정(40) 작가의 스크리닝에서는 디지털 및 16㎜ 필름으로 촬영한 영상을 교차 상영하는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기도 했다. 관객의 호응도 컸다.

그해 가을 더 스트림 스크리닝에 처음으로 방문해 보았다.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대유행) 시대의 신촌 거리는 여느 때보다 한산했다. 저마다의 목적지로 바삐 향하는 사람들을 지나 도착한 더 스트림의 공기는 바깥세상과 사뭇 달랐다. 찾아온 발걸음이 하나둘 모이자 스무 평 남짓한 장소에 불이 켜졌다. 단정한 스크린 앞에 의자가 여럿 놓였다. 김가람(39)의 영상 작품이 상영되자 모두가 스크린 속 사건에 몰두했다. 이후 알맞게 상기된 분위기 속에서 작가와의 대화가 이어졌다.

여러 차례 그 밤에 대하여 생각했다. 바깥의 날들에 멈춤 버튼을 눌러 두고 또 다른 시간을 여행하고 온 경험과 같아서다. 비디오아트는 시간을 다루는 미술이다. 작가가 수집한 시간을 오려내고, 짜깁기하고, 채색해서 만든 움직이는 그림이다. 나아가 비디오아트는 시간을 약속하는 미술이다. 감상을 위해서는 작품의 시간을 고스란히 겪어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각자의 해석에 앞서 약속된 시간 동안 작품에 귀 기울이는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제작에는 디지털 기술이 동원되지만, 관람의 측면에 있어 비디오아트는 가장 아날로그적인 미술인지도 모른다. 시간을 할애하여 몸으로 감각해야 한다는 점에서다. 그래서 오프라인 만남이 필요했을 것이다. 작품 속 시간은 일상을 정지해야 재생된다.
제32회 더 스트림 스크리닝: 안유리, 작가와의 대화(2022). 더스트림 제공
#모두의 00시 00분에 대하여

새해 첫 단추를 여미며 모든 시작에 대하여 생각한다. 삶의 어떤 일에나 처음이 있다. 들뜬 설렘만큼 두렵고 초조한 순간, 떨리는 날숨을 조심스레 다잡는 그런 시간 말이다. 미술을 창작하는 이들에게도 저마다의 처음이 있다. 도약을 위한 준비의 시간은 누군가에게 수년, 다른 누군가에게는 수십 년이 될 수도 있다. 누군들 자신의 살점 같은 작품을 이름난 자리에서 선보이고 싶지 않을까. 꿈에 한 걸음 다가서기까지 버텨야 하는 날들이 꽤나 모질다. 다행히 시간은 누구도 멈추어 있도록 두지 않아서, 물결 위에 모두 싣고 내일로 나아간다. 긴 시간을 미리 약속하자.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

더 스트림은 새해를 맞아 또 다른 방식의 스크리닝을 기획하고 있다. 지난 8년간 지속된 프로그램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발판을 다지는 중이다. 비디오아트 기반 작가들의 지원 체계 구축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더 많은 이들이 창작을 지속할 환경을 가꾸어내기 위해서다. 지금 더 스트림의 온라인 플랫폼에 들러 재생 버튼을 누르면 지나간 처음의 순간이 다시 시작된다. 00시00분에서부터 지켜보자. 다양한 이들의 소중한 처음을…. 모든 시작은 저마다의 절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느리지만 유연하게, 오늘까지 지속되어온 정세라의 시간처럼.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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