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쓰는 시론 이선정 시인, '고래, 52' 수익금 전액 동해산불 기부
대형 출판사·등단 족보·대형 출판사 줄대기 비판
시쓰기 자성적 질문으로 채워…평단, “시로 쓰는 시론” 호평
선판매 수익금 1000여만원 동해산불 복구에 기부
이선정 시인은 자신의 시 ‘탈脫’에서 ‘한국 현대 시문학사 / 2000년대 시경향’으로 탈국가·탈민족·탈장르·탈서정·탈경계를 나열하고는 이렇게 끝맺는다. ‘진정, 그곳을 향해 가는건가? 탈脫 시인!’
■시의 양심을 발골하다
동해 출신 이선정 시인의 두번째 시집 ‘고래, 52’는 시를 위한 변명이자 시인들에게 보내는 경고장이다. 한국 시단의 ‘꼴불견’들에게 보내는 야유다. 대형 출판사에 줄을 대고, 문학상에 목을 매는 시인들, 등단 매체의 족보를 따지는 관료적 문단과 난해와 불통이 자랑인줄 아는 시들이 그 대상이다. 하지만 잘못은 시가 아닌 시인들에게 있다. 이 시인은 “시가 죽은 게 아니라 시인이 죽은 것이다. 마치 시계가 죽은 것이지 시간이 죽은 게 아닌 것처럼”이라고 했다.
시 쓰기에 대한 자성적 질문으로 시집 한 권을 채웠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시로 쓰는 시론”이라는 평으로 시집을 요약한 오민석 교수의 해설에 끄덕여진다. 시가 무엇인지, 특히 훌륭한 시는 무엇인지, 쓰여진 시들의 양심을 묻는다. 반면 아직 쓰여지지 않은 시들은 꿈꾼다. 주류와 비주류 시인, 문단 권력과 문학상, 상업 시와 대중 시, 시와 정치·비평·독자 등과의 관계들을 시로 파헤치고 있다.
“너는 촌스럽게 아직도 행갈이를 하니?”(시 ‘트렌드거나 트랜스포머’), “알고리즘 풀가동!/내게 특별한 외래어를 데려다줘요 /엔터(Enter) / 아무도 쓰지 않은 독특한 것이어야 해요 / 엔터(Enter)”(시 ‘미래시’) 같은 표현들에서 시라서 허용되는 각종 역설을 본다. 그런 시 작법에 대한 불신을 숨기지 않는다.
■시인과 시집을 직격하다
평소에 술에 절어 살고, 여자와 돈을 밝혀도 ‘깨끗만 문장’만 발굴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 그렇게 더럽지 않은 문장 뒤에 꽁꽁 잘 숨은 ‘시인’들을 시원하게 직격하기도 한다.(시 ‘참 시인’에서 인용)
시 ‘귤의 장례식’ 속 비유는 더 노골적이다. 시 전문은 이렇다. “귤이 죽었다 // 차에 두었던 귤 하나가/밤새 꽁꽁 얼어 죽었다 // 소통을 거부한 시인의 시집처럼/소통을 거부당한 독자의 죽음처럼 // 한때 주홍을 자랑하던 / 딱딱하게 죽은 귤 하나 / 따뜻한 아랫목에 모셔 3일장을 치렀다”
소통을 거부한 시인을 시집을 차 안에서 얼어 죽은 귤에 비유하고, 그 유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리석음을 안타까워 한다. 그러면서도 따뜻한 아랫목에서 3일장을 치렀다고 하니 아주 못 볼 시는 아니었을 듯 하다.
이번 시집 편집을 맡은 박제영 시인은 “시인을 발가벗기고 시를 뜯어먹는 여자”라며 이렇게 덧붙였다. “시인들이라면 시비 붙지말라고 조언한다. 다만 그를 무사히 통과한다면 빛나는 시를 만날 수 있을테니 시인이라면 부디 그를 만나거나 부디 그를 만나지 마시라”고.
■52헤르츠의 노래
시집 제목이자 표제시 ‘고래, 52’는 52㎐라는 독특한 주파수로 다른 고래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고래에서 따왔다. 독자들, 동료 시인, 때로는 스스로의 내면과도 완전히 공명하지 못한채, 쓰고 지우고 또 써야 하는 시쓰기의 외롭고 지난한 과정을 상징한다. “가장 신선하고 난해한 바다를 입에 문 / 슬픈 52㎐를 꿈꾸며”라는 문구를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바다를 치열하게 헤엄쳐 나가겠다는 푸른 의지가 엿보인다.
방탄소년단의 2015년작 ‘화양연화 pt.2’의 수록곡 ‘whalien52’라는 겹쳐 떠오른다. 역시 주파수 52㎐로 노래하는 외로운 고래를 떠올리며 ‘고래(whale)’와 ‘외계인(alien)’을 합쳐 만든 노래다. “이 넓은 바다 그 한가운데/ 한 마리 고래가 나즈막히 외롭게 말을 해 / 아무리 소리쳐도 닿지 않는 게/ 사무치게 외로워 조용히 입 다무네 (중략) 저 푸른 바다와/ 내 헤르츠를 믿어 / 이렇게 혼자 노래불러/ 외딴 섬 같은 나도 / 밝게 빛날 수 있을까”와 같은 이 노래 가사가 읽지 않고, 또 읽히지 않는 시집을 앞에 두고 턱을 괸 채 고민에 빠져 있는 이들의 상념과 맥을 같이 한다.
시인은 물론 시에 관심있는 누구나 아주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2016년 ‘문학광장’으로 등단한 시인은 계간 ‘동안’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중이다. 시에세이집 ‘나비’, 시집 ‘치킨의 마지막 설법’을 펴냈다.
이번 시집은 소셜네트워크사이트를 통해 예약 판매했는데 선주문 수익금 1146만 원 전액을 동해시에 기부했다. 지난 해 3월 동해안 대형 산불 피해 복구를 위한 차원이다. 그런 결정도 시적이라고 볼 수 있을까. “아침이 쓴 시를 저녁이 지운다고 / 우리가 펜을 놓겠는가”(시 ‘령’)하고 단언한 시인의 생각이 궁금하다.
김여진 beatle@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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