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왕 피해자가 유튜브로 경매 공부하는 사연... "돈 언제 찾을지 막막"
화곡동 피해자 박모씨, 경매 불가피
선순위 세금체납, 쌓이는 매물에 한숨
편집자주
1,139채의 집을 가진 40대 남성이 죽었습니다. 상상도 못할 많은 집을 가진 이 ‘빌라왕’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그는 어떤 방법으로 이렇게나 많은 집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걸까요? 한국일보가 빌라왕의 실체와 매수 수법을 추적하고, 이 사건에서 드러난 세입자들의 피해와 제도적 맹점을 연재합니다.
"채무자(임대인)는 채권자(임차인)에게 2억 7,000만원을 지급하라."
서울 강서구 화곡동의 한 빌라에 거주하는 세입자 박모(29)씨는 지난해 8월 법원으로부터 집주인에게 전세보증금 전체를 돌려줄 것을 명령하는 결정을 받아냈다. 부모님과 지인들에게도 "보증금 돌려받는 절차가 진행되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며 안심시켰다. 법원 명령도 받아놨으니, 주변에선 더 일이 커지지 않을 거라 믿는 눈치였다.
그러나 박씨의 속은 곪고 있다. 지난해 4월 박씨는 집주인 김모 씨의 세금 체납으로 압류가 걸린 사실을 알게 됐고, 집주인이 피해자 100여명을 양산한 악성 임대인임을 뒤늦게 확인했다. 김씨의 정체는 무자본 갭투자 방식으로 1,139채의 주택을 사들인 '빌라왕'이었고,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은 채 지난해 10월 돌연 사망했다. 민간임대업자인 김씨가 의무로 가입했었야 하는 임대인보증보험 역시 '반쪽짜리' 안전장치에 불과했다. 임대차계약서에는 '보증금 2억 7,000만원 전액을 대상으로 해서 보증에 가입했다'고 기재했는데, 실상 보증금액은 1억 500만원에 불과했다. 보증기간 역시 계약기간 2년이 아닌 1년이었다.
박씨가 팔자에도 없던 부동산 경매 공부를 하기 시작한 건 이 때부터다. 김씨는 "돈이 없어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으니, 웃돈을 내고 집을 사가라"는 태도로 일관했다. 박씨가 자력으로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길은 직접 경매를 신청해 집을 낙찰 받는 방법뿐이었다. 박씨는 법률 비용을 줄이기 위해 유튜브를 보며 경매 공부에 몰두했고, 인터넷에서 만난 피해 임차인들과도 경매 정보를 공유했다.
그러나 경매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었다. 피해 임차인들 사이에선 "김씨가 내지 않은 세금 때문에 경매신청이 취소되고 있다"는 말이 퍼졌다. 법원은 경매를 진행해도 채권자에게 돌아가는 배당액이 없다고 판단될 경우(무잉여) 채권자에게 이를 통보하고 경매 절차를 취소(무잉여 기각)하게 된다. 박씨가 거주하는 빌라에도 임대차 계약 확정일자에 법정기일이 앞서는 2억 5,000만원의 조세채권이 선순위로 걸려있어, 경매절차를 진행할 수 없는 처지다.
빌라왕 김씨가 생전에 체납한 세금 등으로 인해 공매가 진행될 경우 절차가 더 복잡해진다. 경매의 경우 '상계제도'에 따라, 부동산을 낙찰 받으려는 세입자가 전체 매수대금에서 되찾으려는 전세보증금을 제외한 돈만 납부하면 된다. 그런데 현행법상 공매는 이 같은 상계제도가 적용되지 않는다. 예컨데 보증금 2억을 되찾기 위해 2억 5,000만원짜리 빌라를 낙찰 받아 매수하려면, 2억 5,000만원의 매수금을 별도로 마련해 지불해야 하는 셈이다. 박씨는 "현재 전세보증금 대출로 이자 부담이 큰데, 경락자금을 마련하려면 또 이중으로 대출을 받아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특히 박씨가 거주하는 화곡동 일대는 최근 전세사기가 반복적으로 발생해 세입자들이 내놓는 경매 매물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수많은 세입자들이 보증금을 돌려 받기 위해 원치 않는 집까지 떠안아야 하는 실정이다.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박씨에게 화곡동은 살기 좋은 새 터전이었다. 5호선 지하철역이 인접해 출퇴근도 편했고, 때가 타지 않은 깔끔한 새 집도 만족스러웠다. 악몽 같은 전세사기의 피해자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박씨는 "설 연휴에 고향에 가느냐"는 질문을 받고선 고개를 저었다. "연휴에도 화곡동에 머물 예정"이라는 그는 "답이 없는 상황에서 가족,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지치고 힘든 일"이라고 답했다. 박씨의 집은 여전히 숨진 '빌라왕' 김씨 소유이며, 이달 16일에는 지방세 체납으로 인해 또 다른 압류가 걸렸다.
이현주 기자 memor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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