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위성·SNS···21세기 전쟁은 비밀이 없다

선명수 기자 2023. 1. 2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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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전서 쏟아지는 오픈소스 데이터
위성이 군부대 이동·학살 암매장지 포착
텔레그램·틱톡엔 실시간 군 정보 올라와
21세기 전쟁의 풍경 바꾼 ‘오신트’

“이것이 광기의 모습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 9일(현지시간) 대국민 연설에서 “모든 게 파괴돼 생명이 남아 있지 않다”며 우크라이나 동부 격전지 솔레다르의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솔레다르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군사 요충지 바흐무트로 향하는 관문으로 수주째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총공세가 벌어지고 있는 지역이다. 러시아는 솔레다르를 점령했다고 여러 차례 주장해온 반면,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자국이 통제 중이라며 양측의 공방이 이어지기도 했다. 솔레다르의 정확한 전황을 놓고 미국과 영국 정보 당국에서 각각 다른 판단을 내놓을 정도로 접근이 어려운 격전지이기도 하다.

젤렌스키의 연설 다음날, 솔레다르의 처참한 상황을 보여주는 위성사진 한 장이 공개됐다. 몇개월 전까지 멀쩡했던 건물은 포탄 흔적만 남긴 채 사라졌고, 파괴된 건물 주변에는 수십개의 포탄 분화구가 흉터처럼 깊게 패였다.

미국의 상업용 인공위성기업 맥사 테크놀로지가 지난 10일 (현지시간) 공개한 우크라이나 동부 격전지 솔레다르의 위성 사진. AP연합뉴스

솔레다르의 상황을 포착한 사진은 미국의 상업용 인공위성기업 맥사(Maxar) 테크놀로지가 촬영해 공개한 것이다. 이 회사는 매일 300만㎢ 넘는 지역을 촬영하는 4개 위성을 보유했다. 지상 30㎝ 크기의 물체까지 식별하는 고해상도 사진을 촬영한다.

이런 기술로 러시아의 침공 전 국경에 집결한 러시아군의 동향과 이후 교전 상황 등을 담은 위성사진을 공개해 주목을 받았다. 러시아군의 이동 경로 등 군의 기밀 정보를 민간에서 세상에 공개한 것이다. 과거에는 각국 정부나 정보기관들 외에는 접근하지 못했던 정보다.

이렇듯 전황을 보여주는 위성 데이터 뿐만 아니라 사용자들이 현지에서 상황을 전하는 짧은 동영상 플랫폼 틱톡, 산불 추적을 위해 개발된 적외선 센서를 활용한 화재정보 시스템 등 다양한 오픈소스 정보들이 21세기 전쟁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급증한 풍부한 오신트(OSINT·Open Source Intelligence)가 세계가 전쟁을 목격하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18일 보도했다. 오신트는 공개된 출처에서 얻은 각종 정보를 일컫는다. 국가나 국제기구, 연구기관, 비영리단체, 민간 기업 등이 불특정 다수에게 공개한 각종 통계와 영상·사진, 위치정보 등이 이에 해당한다.

지난해 2월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누구나 접근 권한이 있는 이런 공개추출정보를 활용해 사전에 감지되기도 했다. 미국 미들베리 국제학연구소의 연구원들은 구글 지도를 이용해 우크라이나 국경으로 이어지는 러시아 도로에서 상당한 교통 체증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추적했고, 제프리 루이스 연구원은 트위터에 “누군가 이동 중”이란 글을 올렸다. 1시간 후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시작했다.

지상의 병력 이동과 무기 배치, 항공기와 선박의 항로까지 추적하는 이런 공개 정보들은 1년 남짓 이어진 우크라이나 전쟁 내내 활발하게 유통됐다. 위성 사진으로 파악하기 힘든 정보 공백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빠른 속도로 번지는 각종 영상들이 메웠다. 텔레그램, 틱톡 등에 올라온 현장 사진과 영상 이미지들을 구글 지도 등의 위성 이미지와 비교해 일반인은 접근하기 힘든 전선 상황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런 정보들은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은폐되곤 했던 전쟁 범죄들을 세상에 드러내기도 한다. 지난해 3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의 도시 부차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도 위성 사진과 현장을 촬영한 영상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민간인 시신을 조작했다며 학살을 부인했지만, 3주 동안 같은 자리에 방치된 시신들이 위성사진에 포착됐다. 남동부 항구도시 마리우풀에서도 러시아가 민간인 학살을 은폐하기 위해 만든 집단 암매장지가 위성사진에 고스란히 포착됐다.

지난해 3월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외곽 도시 부차에서 자행한 민간인 학살을 보여주는 사진.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민간인 시신을 조작했다고 주장했지만, 민간 인공위성업체 맥사 테크놀로지가 부차의 야블론스카 거리를 찍은 위성 사진(오른쪽)과 이 지역 지방의회 의원이 직접 거리를 촬영한 영상(왼쪽)을 비교한 결과 최소 11구의 시신 위치가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뉴욕타임스 홈페이지 영상 캡처

작전 보안을 유지해야 해야 하는 군의 입장에서 이렇듯 자신들의 상황을 고스란히 노출시키는 데이터들은 악몽에 가깝다. 러시아는 2019년 군인들이 민감한 사진과 동영상을 업로드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을 만들고, 전쟁 중에도 위치 노출을 피하기 위해 제복과 차량 등에 부대의 표식을 가리라고 지시했지만 단속이 쉽지 않았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보도했다.

이런 ‘엉성함’ 때문에 치명적인 결과가 초래되기도 했다. 지난해 말 한 러시아 군인은 헤르손 샤히 지역의 한 컨트리클럽에 진영을 치고 있는 러시아군의 사진을 러시아 소셜미디어 애플리케이션인 VK에 올렸다. 그의 게시물에는 정확한 위치 정보가 자동 태그됐고, 이후 우크라이나 미사일이 이곳을 강타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러시아가 대부분 전쟁 경험이 없고 보안 교육을 받지 못한 수많은 신병을 전장에 동원함에 따라 보안의 취약성이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이코노미스트는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해 오픈소스 정보 또한 오도될 수 있다는 점 역시 지적했다. 기술 발전으로 가장 폐쇄적인 영역이었던 전쟁에 대한 데이터가 풍부해졌고 전선의 상황이 실시간으로 전달되지만, 이런 정보 역시 편향돼 있거나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정보들만으로는 특정 군의 의도를 파악하기 어렵고, 상대가 이를 이용해 역정보를 흘릴 위험성도 있다. 풍부한 데이터가 오히려 ‘안개’처럼 현실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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