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취 짬밥 20년 차 만술이 형의 꽁치찌개 [밥 먹다가 울컥]

박찬일 2023. 1. 22.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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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의 ‘밥 먹다가 울컥’] 만술이 형은 명석하고 성실했지만 똑부러지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 모두 그 형을 좋아했고, 안타까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취방에 돌아오면 묻지도 않고 꽁치찌개를 끓였다.
만술이 형은 옆집 상도슈퍼에서 외상으로 산 꽁치 통조림으로 찌개를 끓이곤 했다.ⓒGetty Images

1989년도인가. 복학해서 아직은 찬 봄바람을 맞으며 교정을 어슬렁거리던 때가 있었다. 학교는 변했다. 안기부와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대놓고 돌아다니던 입학 전 시절과 달랐다. 이른바 민주화 바람이 불었다. 그 무렵까지만 해도 복학생은 데모 같은 건 안 하는 게 일반적 정서였다. 취업 준비해야지, 뭐 그런 정도의.

매일 집회가 있었다. 아이템은 늘 넘쳤다. 새 학기니까 하고, 조금 지나면 4·19였다. 그리고 5월이었다! 그다음엔 6월항쟁 기념 달! 나는 어정쩡하게 집회 대열 저 밖에서 지켜보거나 제 버릇대로 어디 낮술 마시러 막걸리집에 들르곤 했다. 나로서는 아주 제 세상 만난 것이었는데, 툭하면 강의가 데모 때문에 취소되니 나처럼 원래 강의 안 들어가는 애들도 묻어서 출석 처리가 되는 셈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막걸리 마시고 학과 복도를 어정거리고 있는데 누가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학우 여러분, 지금 수업 들을 때입니까. 문학도 좋지만 집회가 열리고 있으니 모두 참여합시다.” 어둑한 복도에서 비겁한 복학생의 태도로, 슬쩍 강의실 문 뒤에 숨어서 누구지 하고 봤는데 맙소사 만술이 형이 아닌가. 그러니까 학번도 까마득히 높은, 우리 과 조교였다. 조교가 학생들더러 수업하지 말고 데모 가라는데 안 가고 배길 재간이 없었다. 만술이 형은 그때 매일 교수들에게 깨졌다고 한다.

“조교 선생님!(야이, 만술이 새꺄!) 학교는 강의와 연구로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그걸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하물며 조교로서 만류해야 할 처지에 오히려 독려를 하십니까!”

대충 이런 얘기였다고 나중에 본인에게서 들었다. 교수와 대학원생의 관계를 아는 분들이라면 이게 어떤 상황인지 알 거다.

하여튼 그래서 나도 어정쩡 데모에 가게 되었다. 어어, 하다가 체포조에 잡혀 닭장버스에까지 태워졌다. 연행된 것이다. 나는 그때 이런 말을 듣고 뭔가 눈에서 퍽! 하고 불이 튀는 걸 느꼈다.

“아이 좀만 한 것들이 데모를 해서 간만에 고참님들 고기 좀 먹고 쉬려고 했는데 말이야, 이 ××는 뭐야.”

체포조가 쓰고 있던 ‘하이바(오토바이 헬멧처럼 생긴 방호구)’로 내 뒷머리를 내려친 것이었다. 버스에서 하차해 연행자들이 동료의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2층 형사과로 올라가는데, 나는 몇 번 쓰러졌다. 사물이 서너 개로 보였다. 뒤통수를 맞은 충격 때문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뇌에 충격을 받으면 시신경에도 타격이 온다. 나이 사십이 되어 한쪽 눈이 잘 안 보여서 녹내장과 황반변성, 망막염 같은 진단을 받게 되었는데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런 말을 했다.

“혹시 머리에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나요? 젊은데 이렇게 노인성 질환이 한꺼번에 생기기도 쉽지 않은데….”

그랬다는 얘기다. 그때는 다 피해자였다. 만술이 형도 나도, 우리 모두.

만술이 형은 그럭저럭 대학원을 다녔다. 그가 쓴 논문 주제는 기억하건대 설정식 같은 월북 작가에 관한 연구였다. 조교가 학부 학생을 데모에 내보낸다고 혼냈을 교수들이 ‘그해의 석사 논문’이라고 했다고 한다. 잘 썼다는 뜻이다. 하지만 박사과정을 할 형편은 안 되었다. 먹고살아야 했다. 대학원 석사 졸업장을 손에 쥐었지만 취업할 데가 만만치 않았다. 그는 대전의 D고를 나왔다. 수재들만 간다는 비평준화 시절의 그 학교. 그는 두뇌 명석하고 성실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뭔가 똑부러지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우리 모두 그 형을 좋아했고, 안타까워했는지도 모른다.

그 형을 처음 본 건 갓 입학해서였다. 아침 일찍 학교를 들어서는데 누군가 열심히 유인물을 돌리고 있었다. 푸른색의 촌스러운 봄 점퍼, 작달막한 키에 어울리지 않는 쫄쫄이 스판 청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은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해는 학도호국단이 폐지되고 민주적인 총학생회가 부활된 때였다. 그는 총학생회장에 입후보한 동기를 돕기 위해 아침부터 유인물을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다고 한다.

“데모 같은 건 하지 마라. 군대도 갔다 왔으니 공부 열심히 해서 취직해라.”

그는 운동권도 아니었지만, 민주 총학생회를 만들려는 친구를 위해 항상 집회 맨 앞에서 섰다. 그러다가 조교가 되어서도 데모를 했던 것이다.

그는 대학원 다닐 때 서울 상도터널 앞 허름한 자취방에 살았다. 집 구조가 얼마나 웃기냐면, 방으로 들어가려면 담벼락과 주인이 사는 본채 건물 사이를 지나가야 하는데, 어깨를 틀어서 지나지 않으면 옷이 담벼락에 다 쓸릴 정도였다.

나는 종종 그를 만나러 그 집에 갔다. 화분 밑에 숨겨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수업을 마친 그가 왔다. 전화도 없던 때니까 밤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술을 마시고 밤에 귀가한 그가 깜짝 놀라면서 엄청 반가워했다. 늘 그랬듯이. “찬일아! 미안하다 야.”

하긴 그 형은 누구에게나 잘했다. 미움이라는 게 없는 사람 같았다. 세상은 그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팔아줘야 한다고 식당에 온 날

그는 자취방에 돌아오면 묻지도 않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부엌(이랄 것도 없는 수챗구멍 있는 시멘트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도마질을 했다. 마늘을 다지고 파를 썰었다. 자취 짬밥 20년의 솜씨로 기막히게 기술이 좋았다. 외상으로 집 옆 상도슈퍼에 가서 꽁치 통조림을 가지고 와서 찌개를 끓였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통조림 꽁치찌개. 뭐 넣은 것도 없는 만술이 형표 찌그러진 양은냄비 찌개. 소주 몇 병을 마시고 그 방에서 잤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 형이 결혼을 해서 모두들 너무 좋아했다. 흑석동 어느 골목 구석의 신혼집. 전봇대를 돌고 세탁소와 지물포와 분식집을 지나면 나오는 골목, 그 안에 어스름한 가로등 하나 켜 있던 다세대 한 칸이었을 거다. 그 신혼집에 몰려가서 술추렴 하고 ‘이제 갈 시간이야’ 하면서도 소주를 몇 번 더 사러 갔다 오면 그는 허허, 웃었는데 형수의 표정은 불안했다. 우리 중 몇 명은 쓰러져 그 신혼 단칸방에서 같이 잤다. 그날 밤 형수가 울었다고 한다.

2003년도인가. 내가 처음 식당 주방장이 되고 보니 그가 기어이 왔다. 언제 적 옷인지 모를 양복을 입고 있었다. 입에도 안 맞는 ‘두 가지 치즈로 맛을 낸 피에몬테 스타일의 셰프 컬렉션 크림스파게티’와 와인을 주문했다. 홀에서 ‘후룩후룩!’ 하는 커다란 소리를 내면서, 중년의 만술이 형이 크림스파게티를 먹었다. 아이구, 소리 좀 내지 말지, 하면서 이 속 좁은 후배의 가슴이 졸아붙었다. 그 식당은 아주 우아한 인테리어와 세련된 트렌드 세터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후배 식당에서 팔아줘야 한다고, 그가 무슨 돈을 들고 온 것이었을까. 아직도 그가 고개를 묻고 후룩후룩 크림스파게티를 먹던 장면이 떠오른다. 그리고 괜히 속이 상하고 분한 것이다.

“어쩌다 나는 세상을 떠돌다
이 산골 구석에 들어와 살고 있는지
세상의 부귀영화 모든 영광이
서울에 있다는데 나는 어쩌자고
공공근로 비정규직 산불감시원이 되었는지
세상을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다던 친구의 말
아직도 귓가에 빙빙 맴도는데
가슴은 산막리 골짜기 물처럼 차갑기만 하다”
(시집 〈복숭아나무를 심다〉 중 ‘산막리에서’ 부분)

그는 시집을 두 권 냈다. 산막리는 영동 산골짜기 그의 고향이다. 서울에서 그는 끝내 배척되었고, 고향에 갔다. 거기서 그의 이름은 ‘봉선화 1호’이기도 하다. 공공근로 산불감시원을 하며 농사도 조금 짓고 복숭아나무도 심고 마을 구판장도 운영하고 그렇게 산다. 억울하게도 세상이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너무도 좋아한다. 그의 이름은 성백술이다. 거꾸로 하면 술백성. 입에 올려서 발음하면 술 생각도 나고, 무지 보고 싶어서 울컥하기도 하는 이름.

박찬일 (셰프)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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