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집터·타버린 신분증…'화마 상흔' 안고 설연휴 맞은 구룡마을

이비슬 기자 2023. 1. 22.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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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평 넘는 면적이 새카만 곤죽 상태…상흔 여전
"옷도 신분증도 불에 타"…임시숙소에서 명절 맞이
21일 오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4지구에 불에 탄 생필품과 집기가 널려있다. 2023.01.21/뉴스1 ⓒ News1 이비슬 기자

(서울=뉴스1) 이비슬 기자 = 잿더미에서 김치 냄새가 진동했다. 깨진 장독대 밖으로 쏟아져 나온 열무와 고추장아찌는 부서진 연탄과 함께 시커먼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물에 씻겨 허옇게 널브러진 배추김치는 양념 대신 까만 재를 뒤집어썼다. 쿰쿰한 냄새는 허허벌판이 된 이곳에 사람이 살았다는 기척이라도 내듯 탄내보다 진하게 주변을 맴돌았다.

설 연휴를 하루 앞두고 구룡마을 판자촌을 덮친 화마는 60명 삶의 터전을 앗아갔다. 설 연휴 첫날인 21일 오전 다시 찾은 구룡마을 4지구는 화재 진압을 위해 뿌린 물과 연탄재, 진흙이 뒤섞여 800평 넘는 면적이 새카만 곤죽 상태로 변해있었다.

축축한 땅에 박힌 수저와 깨진 접시, 물에 젖은 뒤 밤사이 얼어붙어 열리지 않는 가족 앨범과 은행 통장은 이곳이 한때 집터였다는 사실을 짐작게 했다. 곡괭이와 삽을 든 주민들은 복구 작업에 애를 먹고 있었다.

전날 새벽 급히 피신한 뒤 다시 마을에 돌아온 주민 2~3명은 허수아비처럼 각자의 집터 위에 섰다. 손에 검댕을 묻혀가며 한때 집이었던 것을 뒤적이던 한 주민은 가족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며 오열했다.

무너진 집 사이 열기가 남은 나뭇가지에선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 번 사용조차 못 해본 연탄은 차곡차곡 선 채로 불에 타 검은 빛깔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4지구에서만 20년 넘게 거주한 A씨는 "안방 자리에서 금반지 2개를 겨우 찾았는데 녹아서 서로 붙어버렸다"며 "우리 집은 불에 많이 타지 않았는데 잔불을 정리하려고 했는지 포클레인으로 다 뒤집어 헤쳐놓았다"고 하소연했다.

21일 오전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 4지구에 불에 탄 생필품과 집기가 널려있다. 2023.01.21/뉴스1 ⓒ News1 이비슬 기자

화재 피해를 본 이재민 60명은 구청이 마련한 인근 임시 숙소에서 설을 보내게 됐다. 미리 준비한 제수부터 신분증, 옷가지까지 모두 불에 타 주민 대부분이 지원 물품에 의존하는 상황이다.

임시 숙소에서 돌아온 주민 신모씨(72·여)는 "(화재 당시) 내복 바람으로 뛰쳐나오는 바람에 입을 옷이 없어서 아는 지인에게 옷을 빌려 나오는 길"이라며 "설을 앞두고 집에 불이 나서 입이 마르고 마음이 아파 미치겠다"고 말했다. 신씨 양손에는 두툼한 겨울 외투가 가득 들려있었다.

화재를 가까스로 피한 인근 주민들도 수도와 전기, 가스가 끊겨 큰 불편을 겪었다. 일부 세대는 이틀째 전기 복구가 되지 않아 휴대전화조차 충전하지 못 한 채 어두운 밤을 보내야만 했다.

강남구의 마지막 판자촌인 구룡마을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며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정부가 개포동 일대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면서 이주민들이 형성한 동네다. 현재 구룡마을 1~8지구에 거주하는 세대는 559세대다.

주거지 대부분은 비닐과 나무판자를 덧대 만든 임시 가건물이다. 곳곳에 전기를 끌어 쓰는 노후 전선이 얽혀있고 연탄과 LPG 가스통이 야외에 방치돼 있어 주민들도 평소 화재를 극도로 조심했다고 한다.

겨울마다 되풀이되는 화재 사고에 주민들 표정엔 망연자실한 기색이 역력했다. 구룡마을에서 40년 넘게 거주한 이모씨(61)는 "그저 '또 그랬다'는 생각뿐"이라며 "앞으로 마을에 두, 세 차례 더 불이 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고 말했다.

화재가 발생한 4지구에서부터 마을 어귀로 내려가는 좁은 비탈길 약 100m 거리는 검은 재와 연탄, 물이 뒤섞여 흘러 까만 살얼음이 덮였다. 대부분 70~80대인 고령의 주민들은 "겨울에 넘어지면 크게 다친다"며 염화칼슘과 연탄재를 길에 연신 흩뿌렸다.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 구룡마을에도 설은 성큼 다가왔다. 이날 오전 강남구청에서 나눠준 떡국 재료를 저마다 손에 든 주민들은 두 명이 채 지나가지 못할 정도로 좁은 골목길에서 서로를 마주칠 때마다 살갑게 인사말을 건넸다.

종종 "저 집은 빌딩 몇 채를 가진 아들도 있으면서 기초생활수급을 받아챙긴다"는 소문이 도는 동네가 구룡마을이다. 동시에, 60명이 하루아침에 살던 집을 잃거나 구청에서 받은 떡국을 연탄난로에 데우는 동네도 구룡마을이었다.

20일 오전 화재가 발생한 서울 강남구 구룡마을에서 소방대원이 잔불 진화작업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 2023.1.20/뉴스1 ⓒ News1 조태형 기자

b3@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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