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공비 청와대 습격·美푸에블로호 납치…55년 전 北도발 기억해야

허고운 기자 2023. 1. 2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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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 연휴에도 확고한 대비태세 확립
해군특수전전단 해난구조전대(SSU) 장병들이 18일 진해 군항 일대에서 열린 혹한기 내한훈련에서 단체구보를 하고 있다. (해군본부 제공) 2023.1.18/뉴스1

(서울=뉴스1) 허고운 기자 = 설 연휴가 한창인 가운데도 우리 군 장병들은 북한의 도발 가능성을 예의 주시하며 대비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한반도를 전쟁 위기에 휩싸이게 한 북한의 초대형 도발 사건 2건의 55주년이 되는 날이 이번 연휴 기간에 포함된 점에도 군 당국은 주목하고 있다.

22일 군 당국에 따르면 북한군은 현재 동계훈련 중이지만, 이날 현재 임박한 군사도발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 북한은 설 당일부터 사흘간 연휴를 갖는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북한군의 동계훈련이 일부 중지됐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군 소식통은 "북한이 탄도미사일 발사를 많이 해온데 이어 '해상 완충구역' 포격, 무인기 도발 등 도발 종류를 다양화해온 만큼, 올해 전술적 도발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대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1968년 1월21일 북한 특수부대 소속 무장대원 31명이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한 '1·21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현장에서 유일하게 생포된 1명의 이름을 따 '김신조 사건'으로도 불린다.

북한 대남공작 특수부대 '124부대' 소속인 김신조 일당은 1월13일 청와대 습격 및 요인 암살 지령을 받고 1월17일 군사분계선을 넘어 남측으로 침투했다. 이후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너 청와대 근처로 이동했다.

김신조 일당은 1월21일 세검정 고개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발각됐다. 청와대를 불과 500m 남겨둔 지점이었다. 우리 군과 경찰은 현장으로 출동해 소탕작전을 벌였고, 수색전은 열흘 넘게 경기도 일원까지 확대됐다.

13일 경기 파주 무건리 훈련장에서 열린 아미타이거 시범여단 연합훈련에서 한미 장병들이 분소대 공격방어 훈련을 하고 있다. 2023.1.14/뉴스1 ⓒ News1 사진공동취재단

이 과정에서 124부대 소속 31명의 공작원 중 29명이 사살됐다. 김신조는 투항했고 나머지 1명은 북한으로 도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 국민도 민간인 7명과 군경 23명이 희생되는 피해를 입었다. 김신조는 체포 후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라고 말하며 온 국민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1·21 사건의 여파로 군 장병들의 제대가 6개월 미뤄졌고, 영화로도 제작돼 유명한 북파공작용 '실미도'(684) 부대가 만들어졌다. 대통령 경호 차원에서 북한산과 인왕산 일대, 청와대 앞길의 일반인 출입이 금지됐는데, 이 출입통제는 문재인 정부에 들어서야 풀리기 시작했다. 향토예비군의 창설(4월1일)도 이 사건으로 앞당겨진 것으로 평가된다.

1·21 사건 이틀 후인 1968년 1월23일 동해상 원산 앞바다에서는 미국 해군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강제 나포당하는 초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북한은 초계정 4척과 미그기 2대를 동원해 푸에블로호를 납치했고, 푸에블로호가 고의적으로 자국 영해를 침범했다고 주장했다.

미 정부는 곧바로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고 원자력 추진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를 원산항 근해로 출동시켰다. 우리 군도 F-5 전투기를 전개했다. 하지만 푸에블로호에 83명이나 타고 있어 섣불리 군사작전을 펼치지 못했다. 탑승자 중 1명은 나포 과정에서 총격으로 전사했다.

미국은 북한과 수십 차례의 협상 끝에 '미국이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사과한다'는 문구를 서류상으로 남기는 조건으로 억류된 인원의 석방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82명의 승조원과 전사자 시신 1구는 나포 11개월 뒤인 1968년 12월23일 판문점을 통해 송환됐다.

미국 푸에블로호를 나포한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강사 박인호의 수기가 실린 북한 잡지.(월간지 '조선' 1월호 갈무리)

북한은 푸에블로호 나포를 미국에 대한 '승리'의 상징으로 중시하고 있다. 북한은 평양에 이 배를 반제교양 및 관광상품 차원으로 전시하고 있으며, 관련 영화와 소설 등 예술작품도 제작하는 등 적극 활용해왔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1일 자에서 2면 전면을 할애해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진입하던 순간부터 나포될 때의 상황, 이후 푸에블로호가 북한의 '전승기념관'으로 이동돼 전시되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소개했다.

북한은 북한은 푸에블로호 사건이 주는 메시지가 "침략자는 어떤 놈이든 어디서든 언제든 절대로 용서치 말며 제국주의와는 끝까지 싸우라"라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미군 고용병들이여, 다시는 조선에 얼씬도 하지 말라"라고 경고했다.

한편으론 푸에블로호 사건은 우리나라와 미국이 북한의 위협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안보 협력을 더욱 강화하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1968년 2월 린든 존슨 미 대통령은 한반도에 특사로 급파, 한미 군사현안을 협의하기 위해 매년 '국방각료회의'(국방장관 회담)을 개최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4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은 '한미 연례 국방각료회의'를 양국이 교대로 개최하기로 결정했고, 5월에 이틀간 미국에서 첫 회의가 개최됐다.

1971년 4차 회의 때부터는 한미 양국의 외교 대표까지 동참하는 정부 차원의 연례 안보회의체로 격상됐고, 그 명칭도 지금의 '한미 안보협의회의'(SCM)로 변경됐다.

군 관계자는 "한미 군은 북한의 도발에 대비해 한미 간 긴밀한 공조 하에 관련 동향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며 "북한의 어떠한 도발에도 압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기초로 확고한 대비태세를 유지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hgo@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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