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를 대등한 관계로 만드는 音의 물성…사카모토 류이치 '12'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일본의 세계적인 영화음악 거장이자 뉴에이지 피아니스트인 사카모토 류이치(71·坂本龍一)가 지난 17일 발매한 음반 '12'를 듣기 전 두려웠다.
직장암 투병 중인 그의 내·외적 아픔이 스며들까봐. 하지만 피아노·신시사이저를 기반으로 한 음들은 물성을 갖춘 또 하나의 건축물이었다. 청자와 대등한 관계로 마주 보고 서 있다. 고독함을 짓는 앰비언트 음악의 미학. 그건 창작자의 고뇌나 고통이 아닌 그 음악을 듣는 자신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고수의 독야청청(獨也靑靑)이 주는 묘수.
깨진 유리판 등 위에 큰 돌덩이를 올려 놓는 이우환 화백의 작품과 맞닿는 정신이기도 하다. 사카모토와 절친한 이 화백이 이번 음반을 위해 드로잉한 작품이 '12' 커버로 사용됐다.
12곡이 실렸는데 각 곡마다 에튀드(연주기교의 연습용으로 작곡한 곡)처럼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다. 하지만 음마다 잔향이 주는 여운은 풍성하다. 사카모토가 만들어낸 것이 아닌 꾹꾹 새긴 무늬들이기 때문이다.
사카모토가 계속되는 투병생활 속에서 일기를 쓰듯 제작한 음악의 스케치 중에서 12곡을 골라 한 장의 앨범으로 정리한 작품집이다. 자신의 일흔한 번째 생일에 내놓았는데, '20210310' 등 각 곡의 제목은 곡을 제작한 날짜로 정했다.
매일 조용한 전쟁을 치렀을 그지만, 그 감정의 격랑을 청자에게까지 밀어붙이지 않는 절제가 탁월하다. 끊임없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음들은 주인 없는 혼(魂) 같다.
사카모토는 지난 2014년 갑작스레 중인두암 진단을 받고 투병을 해왔다. 하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1년 만에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 영화음악을 작업했고 동시에 새 앨범 'ASYNC'(2017)를 준비했다. 다큐멘터리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2018)는 이 음반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담았다.
사카모토는 'ASYNC'를 마지막 음반으로 생각하고 준비했다고 했다. 그는 다큐에서 "아무것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난 내가 더 많은 음악을 만들고 싶어한다는 것을 안다. 부끄럽지 않게 남길 수 있는 음악 그리고 의미가 있는 작품 말이다"라고 말했다.
'ASYNC' 이후 사카모토가 6년 만에 내놓은 오리지널 음반인 '12'는 2021년 직장암 판정을 받은 이후 만들어진 곡들이다.
트랙들은 미니멀하지만 사카모토가 공공연하게 평소 존경해온 영화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프레임처럼 저마다 정경을 펼쳐낸다. 피아노 소리에 스며들거나 부유하는 신시사이저 소리는 주술적 음경(音景)의 마력이다. 청각의 시각화인 셈이다.
명확하지만 인위적이지 않은 대위법의 미학을 보여주는 첫 트랙 '20210310'을 시작으로 조직적이지만 가공되지 않은, 장인의 솜씨가 배인 트랙들이 연이어 펼쳐진다. '20220123'은 이우환의 작품처럼 자연을 사운드 판에 그대로 가져온 듯하며, '20220302'의 우아한 따뜻함은 쇼팽, 드뷔시가 연상되기도 한다. '20220307'은 아련한 정서를 품고 있고, '20220404'는 애수가 짙다. 마지막 트랙 '20220304'는 1분여동안 금속성의 물체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들로 이뤄져있는데 삶의 아득함을 그리는 모스부호처럼 느껴진다.
트랙들은 날마다 다른 우리 나날처럼 비슷한 무늬나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색조로 자연의 변화무쌍함을 기록한 인상주의 화가의 화풍으로 매일을 스케치했다. 매일을 살아가고 있는 사카모토의 숨결이 녹아들지 않은 트랙이 없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사는데 사카모토의 '12'는 삶이 끝자락에 다다랐을 때 당신의 시간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까를 묻는다. 미국 유명 음악 평론지 '피치포크'는 '12'에 대해 "불꽃놀이로 자신의 삶을 신화화하기보다 이전 작품보다 더 섬세하게 절제된 '조용한 우아함'을 택했다"면서 "이렇게 절제된 앨범이 많은 것을 말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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