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 국가’ 불가리아, 어쩌다 ‘기대수명 가장 짧은 나라’ 됐나
세계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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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를까? 요구르트일 것이다. 불가리아에선 3천 년 전, 트라케(Thrace) 문명시대 때부터 요구르트를 만들어 먹었다. 유목민족인 고대 트라케인은 양을 키우며 생활했다. 이때 식물에 붙어 있던 박테리아가 양에게 붙어 젖을 짤 때 우유에 들어간 것이 지금 우리가 먹는 ‘불가리아 요구르트’의 기원이다. 불가리아 요구르트는 특유의 시큼한 맛을 무기로 세계로 퍼져나가 팔리면서 불가리아의 상징이 됐다.
또 무엇이 떠오르나. ‘장수 국가’를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요구르트 광고뿐만 아니라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같은 텔레비전(TV) 여행 프로그램에서도 불가리아는 유럽의 대표적인 ‘장수 국가’ 이미지를 보여준다. 앞에서 설명한 요구르트로 건강함을 유지한다는 스토리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불가리아는 과연 장수 국가일까.
장수하는 사람이 많은 마을이 있긴 하다. 로도피산맥 주변에 100살 넘는 사람이 많이 산다고 한다. 시골에서 농사하며 자급자족하는 사람들이다. 요구르트를 직접 만들어 먹고,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며, 많이 움직이면서 건강을 유지한다.
그러나 21세기 불가리아는 ‘자급자족하며 시골에 사는 사람’이 다수인 농업국이 아니다. 2021년 국제통화기금(IMF) 발표 기준으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만1683달러에 이르는, 산업화가 진행된 유럽연합(EU) 가입국이다. 약 683만 명의 국민 중 500만 명이 도시권에 산다. 소수의 장수 사례는 분명히 있지만 그것만으로 장수 국가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기대수명 가장 짧은 나라
통계 자료를 보면 놀라운 결과가 나타난다. 2021년 말 기준 유럽연합이 집계한 불가리아의 기대수명은 73.6년으로 유럽 평균 기대수명보다 8년이나 낮다. 유럽에서 기대수명이 가장 긴 노르웨이(83.3년)보다 거의 10년이나 짧다. 2022년 7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한국의 기대수명(83.5년)과 비교해봐도 10년 가까이 차이 난다. 놀라운 점은, 유럽연합 전체에서 기대수명이 가장 짧은 나라가 바로 불가리아라는 것이다.
‘장수 국가’ 같았지만 실제로는 장수와 가장 거리가 먼 나라였다. 코로나19 대유행 뒤 불가리아의 기대수명이 2년이나 줄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2022년 11월 현재 불가리아의 백신 접종률은 유럽연합 회원국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인 30%대여서 수명 감소 영향이 더 컸다는 분석이다.
불가리아가 예상과 다르게 기대수명이 이토록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매우 복합적이지만 대표적인 두 이유를 꼽을 수 있다.
첫째, 높은 흡연율 등 국민의 낮은 보건 의식 때문이다. 2021년 사망자 중 18%의 직접적 사망 원인은 흡연이다. 2020년 통계에 따르면 불가리아는 유럽연합 회원국 중 흡연자 비율이 28.7%로 가장 높다. 독일(21.9%), 크로아티아(21.8%) 등과 차이가 크다. 하루에 20개비 이상 담배를 피우는 비율도 12.9%로, 가장 낮은 스웨덴(1%)의 12배 이상이다.
길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불가리아인들은 아이 앞에서도, 식당에서도 자연스럽게 흡연한다. 남성과 여성의 흡연율 차이가 거의 없고, 하교하는 학생들도 담배를 피우는 대표적인 ‘애연 국가’다.
둘째, 비효율적인 의료체계다. 글로벌컨설팅기관 글롭섹(GLOBSEC)이 발표한 ‘2021년 유럽 의료체계 지수’에 따르면 불가리아의 의료체계는 유럽 내 최하위 수준이다. 가장 높은 점수를 얻은 노르웨이가 100점 만점에 80점인데 불가리아는 31점이었다. 이 지수에는 의료체계의 질과 기술, 의료시설 등 다양한 요인이 반영된다.
유럽연합 통계청(Eurostat)이 2019년 발표한 자료를 보면, 불가리아의 GDP 대비 의료비 지출은 7.1%로 11% 수준인 독일·프랑스보다는 낮지만 5%대의 룩셈부르크·루마니아보다는 높아 유럽에서 중간 정도였다. 하지만 개인 부담 의료비는 전체 의료비의 38% 수준으로 유럽 평균인 15.6%보다 두 배 이상 높아 의료 취약 계층인 고령층의 의료 접근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2021년 현재 고령자 비율이 21%가 넘어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불가리아는 고령층의 개인 의료비 지출 부담이 계속 늘고 있다. 한 달에 우리돈 30만원 정도의 국민연금 소득에 의존하는 노인들은 병원과 약국에 쉽게 가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 퇴직 뒤에도 일한다. 이로 인해 제때 치료받지 못하고 병을 키워 빨리 사망하는 것이다.
의료품 대부분 수입 의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불가리아 정부는 유럽연합 기금을 활용해 2030년까지 보건 개선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첫째, 국민의 건강 증진 사업과 질병 예방 분야에 투자한다. 사회적으로 금연 캠페인, 무료 금연 상담 서비스 확대를 통해 국민의 건강 인식을 개선할 예정이다. 질병 예방을 위한 설비 투자와 감염병 예방을 위한 시스템도 강화할 예정이다. 항암, 희소병 등 집중치료가 필요한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대해서도 국가적 투자를 강화할 계획이다.
둘째, 의료 효율화 추진이다. 병원당 병상 수를 최적화하고, 질병 연구 특화 병원을 구축한다. 비대면 진료 도입으로 집에서도 진료받을 수 있도록 해 지역 간 의료 균형을 추진한다. 또 의료행정 디지털화를 추진해 환자의 진료기록을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개선한다. 더불어 점진적으로 유럽연합 평균 국가 의료비 부담률인 80% 수준에 맞게 건강보험제도를 개선해 개인의 의료비 부담을 줄일 예정이다.
2030년까지 보건 개선 사업을 지속할 예정인 불가리아는 우리 의료 관련 기업에는 기회의 땅이 될 수 있다. 2021년 기준 불가리아는 의료기기의 80%를 수입한다. 의약품 수입 규모도 전체 수입품목 중 8위를 차지하는 등 의료 관련 품목의 수입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우리나라는 코로나19 대유행 상황에서도 우수한 방역 정책으로 ‘케이-메디컬’(K-Medical) 붐을 이뤄낸 나라다. 불가리아에서는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 진단키트를 많이 수입했다. 코로나19 치료제 중 불가리아에서 투약 승인을 받은 약품 2종 중 하나가 한국산이다. 한국 의료에 대한 신뢰 이미지를 바탕으로 가격경쟁력 있는 바이오시밀러(생명 의약품 복제약)나 혁신적인 의료기기, 디지털 의료체계 등의 수출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불가리아 시장에 진출하려면 국립병원이나 민간병원에 납품한 경험이 풍부한 현지 파트너와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불가리아는 여전히 관료주의가 있는 편이라 네트워크를 통한 행정 처리 관습이 남아 있다. 보건부에서 인증한 기업만 병원에 제품을 납품할 수 있는데, 이 인증 기업 중에서 파트너를 구하는 것이 좋다. 불가리아는 유럽연합 회원국이므로 미리 유럽연합에서 요구하는 인증을 취득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인증으로 ‘CE MDD’가 있다. 의료기기의 품질을 입증하는 인증인데 취득 뒤 절차도 까다로워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1980년대 불가리아는 공산주의 배급 제도로 의료혜택을 누구나 쉽게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자본주의 도입으로 갑자기 세계와 경쟁하게 된 불가리아는 그 약점이 드러났다. 물가가 올라 국민의 실질소득이 줄고, 의료인도 급여가 많은 서유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대도시가 아닌 지역의 병원은 하나둘 문을 닫았다. 노인들은 연금으로 기본 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이 지속하면서 젊은 노동인구는 자국에 대한 비관과 함께 서유럽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 결과, 불가리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인구가 줄어드는 국가가 됐다. 세계에서 가장 장수하는 국가에서 기대수명이 가장 짧은 나라로 추락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보건 개선 정책에서 중요한 것은 젊은 세대와의 의견통합이다. 젊은 세대의 건강보험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젊은이의 유출을 막지 못하면 노령층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세대 간 대화로 국민을 통합해야 국가에 대한 밝은 미래를 그릴 수 있고, 젊은이들이 불가리아에 남아 경제활동을 하고 아이를 낳고 노인이 돼서도 편하게 살 수 있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진다.
불가리아가 장수 국가의 영광을 되찾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장수 국가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나라 기업의 의료기기, 의약품, 의료체계도 함께 나아가길 희망한다.
박민 불가리아 소피아무역관 과장 mp920@kotr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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