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낡은 은마아파트에 사는 꼴”…한국 대학원의 민낯
<한국에서 박사하기> 펴낸 청년 연구자들 한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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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의 정의에 대학원생을 포함한다.”
2020년 7월 국회에 제출된 근로기준법 개정안(태영호 국민의힘 의원 대표발의)의 한 대목이다. ‘근로자’의 정의(2조1항1호)를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사람(대학원생을 포함한다)”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대학원생들이 지도교수의 사적 업무에 동원되거나 연구비를 떼이고 폭언·폭행에 시달리는 등 이른바 ‘갑질’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 취지였다.
당시 법 개정은 불발됐지만, 대학원생들 사이에서 반향은 컸다. 과학기술학을 공부하는 연구자 조승희씨는 “드디어 대학원생이 ‘사람’이 되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다”며 “지금도 학생 연구원이 노동을 하고 있다는 데 대한 사회적 공감은 부족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교육개발원의 교육통계를 보면, 지난 40여년간 대학원생 수는 10배 가까이 늘었다. 1980년 3만3939명이었던 대학원생 수는 2022년 33만3907명에 이르렀다. 특히 1995~2005년 사이에 빠르게 늘었다. 대학원 설립 기준 완화와 고급 인력에 대한 수요 증가, 고등교육의 보편화 등에 따른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덩치가 커진 데 견줘, 연구 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중론이다.
외려 고등교육의 현장은 ‘떠나고 싶은 곳’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영문학과 지성사를 공부하는 이우창 연구자는 “사람들이 어딘가를 떠나려고 하는 이유는 바뀔 것이란 기대가 생기지 않을 때 그렇다”며 “한국의 대학은 대학원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놀랄 정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곳”이라고 말한다. “석사는 국내에서 하더라도 박사는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들어오는 게 글로벌 기준이라는 인식이 있다. 한국에서 연구자를 양성하는 일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이유”라는 유현미(사회학·여성학 연구자)씨의 지적은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지난 연말 <한국에서 박사하기>(북저널리즘)라는 책을 펴낸 청년 연구자 8명(강수영·김보경·유현미·이송희·조승희·전준하·현수진·이우창)은 이런 현실에 주목한다. 강수영씨는 도시계획학을, 김보경·이송희씨는 각각 국문학과 한문학을 공부했다. 전준하씨는 과학기술정책을 연구했고, 현수진씨는 사학 전공자다.
모두 국내 대학에서 석·박사 과정을 수료했거나 학위를 받았다. 각기 대학원 총학생회 활동 등을 하다가 만났고, 대학원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목소리를 내자는 생각에 뭉쳤다. 아래 인터뷰는 필자들이 지난 11일 서울 중구 ‘비케이제이엔 숍’에서 책 출간을 계기로 연 북토크 내용과 <한겨레>가 추가로 진행한 질의응답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학계 위계서열 맨 아래층의 그들
인터넷에는 각종 대학원생 ‘밈’이 넘쳐난다. 인기 웹툰 <대학원 탈출일지>는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치킨공학과 대학원에 입학한 주인공 요다가 입학한 뒤로 겪게 되는 ‘애환’이 절절하게 그려진다. 미국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서 대학원생을 묘사하는 장면도 대표적 밈으로 전파돼왔다. 바트가 박사과정 학생을 흉내내며 “작년에 60만원을 벌었지”라고 말하자, 그의 엄마는 “인생에서 형편없는 선택을 한 사람들”이라고 폄하한다.
‘소년이 잘못하면 소년원에 가고, 대학생이 잘못하면 대학원에 간다’는 자조 섞인 소리도 흘러나왔다. 청년 연구자들은 수직적 위계질서가 공고한 학계의 맨 밑단에 있는 대학원생들이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주목해달라고 주문한다.
―책에서 명문대 대학원을 서울 강남에서 수십년간 재건축을 추진해온 은마아파트에 비유한 대목이 흥미롭다. 어떤 의미인가?
“몇달째 실험도 못 하고 연구비를 따기 위해 제안서에만 매달린다던 선배, 매일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지도교수 눈치를 보느라 집중이 안 된다던 친구, 지도교수를 본 지 한참 되어서 다른 교수들한테 조언을 구하러 다닌다는 후배…. 연구자인 대학원생들이 어떻게 연구 활동을 하고 있는지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은마아파트처럼) 거의 업데이트가 없는 공간이다. 은마아파트는 시설이 너무 낡았지만 투자가치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지 않나. 어차피 학위나 자격증을 따고 학연을 맺기 위해 꾸준히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보니, 내부에 문제가 있어도 고치려는 시늉도 안 한다.”
―내부의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면?
“대학원의 본질적 기능은 연구자 양성에 있다. 체계적인 교육이 제공되고 안정적 연구 환경을 만들어 학문 후속 세대의 연구력을 길러줘야 하는데, 그렇게 작동되고 있지 않다는 얘기다. 한 예로, 대학원생들은 너무 많은 일을 떠안고 있다. 우리 스스로는 이를 학계가 돌아가도록 만드는 ‘그림자 노동’이라고 한다. 여러 연구 프로젝트의 연구 보조원, 학계 행사 지원, 번역, 자료 코딩, 학회 간사, 과제 채점 등으로 생활비와 학비를 마련해야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오죽하면 ‘알바천국’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싶다.”
―책 출간에 대한 교수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불편한 시선은 없었는지?
“교수님들이 큰 소리 내지 않고 조용히 불이익을 줄 수도 있을 거다.(웃음) 우리가 낸 책에 맞대응해 <한국에서 교수하기>를 내야겠다는 농담을 들은 적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대학원생들이 체감하는 실상이 어떤지 궁금했다는 분들도 있었다.
다만 우리가 이런 책을 내고 관련 활동을 할 수 있는 데는 지도교수와 관계가 좋은 편이라는 배경도 작용하고 있다. 더 열악한 곳의 연구자일수록 문제를 제기하기조차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을 내게 된 목적 중 하나도 다양한 환경에 속한 대학원생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자는 데 있다.”
―그동안 대학원의 문제가 공론장에 나오기 어려웠던 배경으로 들린다.
“학부생과 대학원생을 대하는 교수님들의 태도가 많이 다르다. (교수님들은) 학부생들을 더 두려워한다. 학부생들은 학내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길이 열려 있기도 하고, 문제가 있으면 집단행동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대학원을 바꿔보자는 목소리 자체가 거의 없었던 데는 이런 점도 영향을 끼쳤다.”
지도교수 한명이 모든 걸 좌지우지
웹툰 <대학원 탈출일지>의 요다는 대학원에 입학하자마자 ‘컨택’에 공을 들인다. ‘컨택’은 대학원생들이 지도교수를 고르는 과정을 일컫는 말로 통한다. 교수들의 연구 능력과 자질 등에 대한 평가를 볼 수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 ‘김박사넷’은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지침서가 됐다.
실제로 대학원에서 연구 활동과 관련된 모든 권한과 자원은 지도교수 한 사람에게 쏠려 있다. 지도교수가 누구인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대학원생의 몫이다. 요즘 시대정신을 반영한다는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의 줄임말)은 대학원생들을 억누르는 기제로 작동한 지 오래다. ‘네가 선택한 공부이니, 네가 책임지라’는 식이다.
―‘갑질’ 교수 문제는 꽤 오래전부터 공분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2015년 무렵부터 대학원생에 대한 인권침해 사례가 언론의 주목을 받아온 것은 사실이다. 교수 집에 개밥을 챙겨주러 가는 대학원생의 이야기가 보도되기도 하고, 제자를 노예처럼 다루고, 심지어 인분을 강제로 먹인 충격적 사건이 알려지기도 했다.
또 다른 사례로, 대학원생들에게 수만장의 논문과 책을 스캔하도록 지시한 일명 ‘스캔 노예 사건’이 불거져 파문이 인 적도 있다. 문제는 이런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해왔지만, 교수 사회는 일부의 극단적 사례로 치부해왔다는 점이다.”
―바뀐 것은 별로 없다는 얘기인가?
“학내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지도교수로부터 성희롱을 당해서, 문제제기를 하고 지도교수를 교체해달라고 해야 하는데 그조차도 지도교수의 사인이 필요하다. 교수들이 앙심을 품고 조교 일을 못 하게 하거나 연구실 출입을 금지하는 등 2차 가해가 벌어지기도 한다.
대학원에서 어떤 수업과 연구 활동을 하게 될지, 박사학위까지 몇년이 걸릴지, 향후 진로를 어떻게 모색할지 등 에이(A)부터 제트(Z)까지 모든 것이 지도교수에 의해 결정된다. 교수와 학생 간의 비대칭적 계약 관계가 초래하는 문제가 적지 않다는 얘기다.”
지난해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서 벌어진 부당해고 사례는 이런 주장을 뒷받침한다.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 석·박사 통합과정으로 입학해 연구원에 들어온 학생 연구원 ㄱ씨는 2022년 8월, 지도교수와의 마찰로 해고됐다. 학생 연구원들은 유에스티 가이드라인에 따라 근로계약을 체결해왔는데, 지도교수가 근태 불량과 저조한 연구 실적 등을 이유로 더 이상 지도할 수 없다고 통보한 것이다.
병역특례복무를 병행하고 있던 ㄱ씨는 근로계약이 갱신되지 않으면, 학업을 마치지 못할 뿐 아니라 군대에도 가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에 충남지방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냈고, 지난해 11월 부당해고가 인정된다는 판정이 내려졌다.
ㄱ씨를 대리한 법무법인 ‘여는’의 박용원 노무사는 “다른 교수와 학회 콘퍼런스 발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연구에 참여하지도 않은 지도교수가 자기 이름을 넣어달라고 했는데, ㄱ씨가 이를 거부하면서 사이가 틀어진 것 같다”고 전했다. 이 지도교수는 ㄱ씨에게 ‘새해 인사를 왜 하지 않느냐’는 등의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다. 새로운 지도교수를 구하는 일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약한 고리’를 악용해, 지도교수가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른 셈이다.
불안정한 연구 환경 너머로
한국 사회에서 대학원이 사라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청년 연구자들은 입을 모은다. 갈수록 사회가 요구하는 전문성과 인적 역량의 수준은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어떤 대학원을 만들 것이냐’는 8명의 청년 연구자들이 품고 있는 공통의 질문이기도 하다.
―‘떠나고 싶은’ 대학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쏟아낸 것 같다. 그렇다면 ‘남고 싶은 대학원’은 어떤 모습인가?
“한동안 대학원생의 위치가 드러나고 피해 사례에 대한 대중적 공감을 끌어냈다면, 이제는 그 이후와 그 너머를 말할 때라고 본다. 학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가속화된 학계’라는 표현이 있는데, 한정된 연구비와 정규직 지위를 두고 벌어지는 경쟁 속에서 연구자들이 느끼는 시간 압박을 담고 있는 개념이다.
빠르게 논문을 찍어내는 것이 성공 공식처럼 여겨지고 있다. 모든 분야가 이론을 제대로 정립할 새도 없이 바삐 굴러가다 보니 안정적인 연구 환경이 조성될 리 만무하다. 부실 학회나 가짜 학회가 왜 나왔겠는가. 국가 차원의 재정 지원사업에 속도를 맞춰선 안 된다. 이는 대학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지식 생산을 위한 학술장이 겪는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인문·사회계 대학원의 경우, 투자와 재생산이라는 선순환 구조가 끊긴 상태다. 인문학이 이 사회에서 어떤 쓸모가 있는지까지 증명하고 설득해야 한다.”
지도교수 한명이 모든 권한을 갖는 현행 지도 체제의 폐해가 드러난 만큼, 이 역시 시급히 개선되어야 할 과제로 꼽힌다. “교수 집단 간 견제나 책임 분산의 장치를 만들거나, 연구 재단 혹은 학내 다른 기구의 견제와 개입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를 고려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 차원의 대학원 육성 정책이 지금보다 정교하게 짜여야 하고, 그 과정에서 신진 연구자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통로가 있어야 한다. 기존 학과와 대학 간 장벽을 넘어서야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올 것”이라는 제안도 나온다.
마지막으로 청년 연구자들은 “아이를 낳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공간, 자신과 타인을 돌볼 여유나 지원이 없는 공간은 매력적이지도, 지속가능하지도 않다”고 강조한다.
학계에서도 여성의 경력단절은 빈번하게 목격된다. “문정희 시인의 작품 가운데, ‘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1997년에 나온 시다. 당시는 사립대 총장들이 여학생 수가 30%를 넘었다며 교세가 기운다는 걱정을 쏟아내던 시절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2023년인 지금도 유효하다. 학사→석사→박사→박사 후 과정으로 갈수록, 여성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에게도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
황보연 기자 whyn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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