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보우소나루, 이재명의 공통점
● “‘민주주의 끝내자’에 한 표 던진다”
● 경찰특공대원들이 체포한 정치인
● 선거 상대 후보 집에 총격 가하다
● 트럼프의 열혈 지지자이자 전과자
● ‘우리 편 많은데 내가 틀릴 리 없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투표를 하는 거죠."
"투표의 내용은요?"
"저는 '민주주의를 끝내자'에 한 표 던집니다."
BBC에서 인기리에 방영중인 가짜 다큐멘터리 '컹크의 색다른 지구 이야기(Cunk on Earth)'의 '민주주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한 장면이다. 저 이상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영국의 코미디언 다이앤 모건(Diane Morgan). 필로메나 컹크(Philomena Cunk)라는 캐릭터로 분장해 지구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문, 역사, 지리, 사회 등 다양한 분야를 섭렵하고 전문가와 대담을 나눈다. 마치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자인 배우 김상중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엉뚱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행정과 헌법을 가르치는 로버트 하젤(Robert Hazell) 교수는 잠시 당황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다. "그 결과를 어떻게 밀어붙일 수 있죠?" 예리한 질문이다. 민주주의를 끝내자고 투표를 하면 그 결과를 누구에게 어떻게 강제할 수 있단 말인가. 이미 민주주의는 끝났고 투표에는 아무런 힘이 없을 텐데. 컹크의 말문이 막히자 그는 설명을 이어나간다.
"무엇으로 대체할지 알지도 못하는 상태로 어떤 정치 체계를 중단해버리는 것은 그다지 현명한 일이 아닐 겁니다. 그건 마치 '어디로 갈지 다음에 살 곳이 어딘지도 모르지만 일단 집에서 나가자고 투표로 정하자'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아무도 그런 짓을 하지 않겠죠."
할 말이 궁색해진 컹크는 "당신은 같이 휴가를 보낼 상대로 최악인 것 같군요"라고 억지를 피우며 대화를 끝내버린다.
‘컹크의 색다른 지구 이야기'는 가짜 다큐멘터리 형식의 코미디다. 문제는 '민주주의를 끝내버리자는 투표'가 농담으로 끝나지 않는 현실이라는 데 있다. 2022년 초, 지금 세계의 모습이 그렇다. 게다가 이 문제는 상대적으로 '정치 후진국'이라 여겨지는 국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민주주의는 지금 민주적으로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있다.
그가 말하는 '대안'
현지시각 1월 16일 오후, 미국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의 한 주택에 경찰특공대원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이 체포한 사람은 39세의 솔로몬 페냐(Solomon Peña). 그는 불과 몇 개월 전인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서 뉴멕시코 주 하원의원 후보(14지구)로 출마했던 정치인이었다.페냐는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 과정에서 멕시코와의 국경에 담을 쌓자며 히스패닉을 조롱하고 멸시했다. 그런데 페냐는, 그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 히스패닉이다. 어째서 히스패닉인 페냐는 트럼프의 열혈 지지자가 될 수 있었을까? 모순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미국에 일찌감치 이민을 왔거나 이민 2세, 3세인 히스패닉들 중 상당수는 공화당을 지지한다. 합법적인 미국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하기 때문에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 Again)' 같은 구호를 외치며 같은 인종의 불법 이민자들을 향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페냐가 정치인으로서 보여준 자질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1월 19일 현재 그의 트위터 계정(@SolomonPena2022)을 살펴보면, 86명을 팔로우하고 있으며 팔로워는 단 313명에 불과하다.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가 정치인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건 아니지만 진지하게 당선을 꾀하는 후보의 SNS라 보기엔 너무도 초라한 숫자다.
게다가 그가 맞선 상대는 현직인 미겔 가르시아 민주당 후보. 결과는 74% 대 26%, 무려 48%포인트나 차이가 벌어졌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트위터 팔로워가 단 313명에 불과한 후보가 26퍼센트나 득표했으니 그것이 더 놀라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페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긴 선거를 '도둑맞았다'고 생각했다. 민주당이 선거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2022년 11월 16일 그가 올린 마지막 트윗의 내용. "방금 트럼프는 2024년 대선 도전을 발표했다. 나는 그와 함께 한다. 나는 14구 투표 결과에 절대 승복하지 않는다. 현재 가능한 대안을 모색 중이다."
당시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폭력배를 고용하여 선거 상대방의 집에 총격을 가하는 게 그가 말하는 '대안'이라는 사실을.
미국은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탓에 온갖 사건이 다 벌어지는 나라다. 그럼에도 선거에서 졌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집에 총을 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지자 미국은 발칵 뒤집혔고, 솔로몬 페냐의 이력이 새삼스럽게 화제가 됐다. 놀랍게도 그가 저지른 범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강도와 절도 등 총 19건의 중범죄 전과를 가진 인물로, 지난 2007년 4월부터 2016년 3월까지 9년간 복역한 바 있었다.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법이 정한 바에 따라 처벌을 받았다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올바른 민주주의다. 하지만 사소한 범죄도 아니고 중범죄를 연거푸 저지른 사람이 어떻게 선거에, 그것도 거대 양당 중 하나인 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할 수 있단 말인가?
‘트럼프 현상'의 끝이 아니라 시작
또한 미국의 선거는 현역에게 매우 유리하다. 신인이 현역 의원을 꺾는 일이 어지간해서 벌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선거의 많은 부분을 선거법으로 미리 정해놓고 있는 나라다. 선거에서 어떤 후보가 얼마나 많은 돈을 쓸 수 있는지 등이 모두 정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은 그렇지 않다. 법에서 정한 테두리가 있긴 하나, 기본적으로 후보는 정당의 공천을 받는다 해도 자신이 쓸 돈과 동원할 인력을 자체 조달해야 한다.
이번에 페냐가 도전한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 14지구는 '민주당 지역'이다. 공화당의 정치 꿈나무 중 제대로 야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애초에 출마하지 않는다. 게다가 민주당 경선에서 현역 의원을 꺾고 신인이 후보로 나오는 이변이 연출된 것도 아니다. 승산이 없다시피 한 지역구이니 공화당으로서는 누구라도 신청하면 공천을 줄 법한 곳이었다. 문제는 그 '누구라도'의 범주에 중범죄를 저지르고 몇 년 전에 출소한 사람이 포함될 수 있느냐다.
그런 일이 가능한 이유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트럼프 때문이다. 트럼프의 열렬한 지지자라고 목청을 높이고 다니던 페냐가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겠다는데, 대안으로 내세울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그를 주저앉히는 것은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지난해 11월에 치러진 미국 중간선거는 트럼프가 정치적으로 부활할지 가늠하는 시금석 역할을 했다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소위 '트럼프 키드'들이 트럼프가 불러온 정치적 바람을 타고 대거 공천을 받아 출마했던 그런 선거였던 것이다.
본인이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선거 사기를 주장하는 전직 대통령. 그런 인물을 무조건 추종하며 다른 후보와 지지자들을 폭력적으로 위협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세력. 현지시각 2021년 1월 6일 벌어졌던 연방의회 습격 사건은 '트럼프 현상'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을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떨치기 어렵다.
민주주의가 민주주의에 의해 파괴되는 이런 현상은 미국에서만 벌어지고 있지 않다. 현지시각으로 1월 8일,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에서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의회, 대법원, 대통령궁 등에 난입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던 것을 떠올려 보자. 미국에서 벌어진 일이 2년 후, 그것도 거의 동일한 날짜에 브라질에서 반복됐다.
보우소나루는 트럼프가 하던 행동을 고스란히 반복하는 중이었다.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본인이 상상했던 것보다 일이 커지자 재빨리 '손절'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대선 결과를 받아들이고 지지자들을 다독였다면 애초에 벌어지지 않았을 사건이었다. 브라질 경찰은 현재 1000여 명이 넘는 보우소나루 지지자들의 범죄 혐의를 조사하고 있다.
자신들만의 에코 챔버
특히 법치주의가 중요하다. 물론 법은 국회에서 만들고, 국회는 선거를 통해 뽑힌 국민의 대표자 국회의원으로 구성된다. 따라서 법치주의 안에는 다수결의 원리가 포함돼 있다. 하지만 이미 만들어진 법을 해석, 적용, 집행하는 문제는 군중의 함성에 따라 결과가 오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독립적인 재판을 할 수 있도록 판사의 신분을 보장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온 세상이 입을 모아 옳다고 해도 법의 정신에 따를 때 옳지 않다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지지한다 해도 범죄자는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한다. 이 법치주의의 원칙이 흔들리는 순간 민주주의도 위기에 빠진다. 트럼프가 2021년 1월 연방의회 폭동을 부추기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그는 처벌받아야 한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이며 아직도 막강한 대선 후보인 그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는 것은 실로 부담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좌고우면하는 사이 미국의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유사한 일이 우리의 정치적 현실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성남FC 사건처럼 증거가 분명한 사안에 대해서조차 '검찰이 없는 죄를 만들어서 누명을 씌운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를 지지하는 이들은 윤석열 대통령이 사퇴해야 한다고 매 주말마다 거리에서 목청을 높이는 중이다. 이는 미국이나 브라질에서 벌어진 일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자신들만의 에코 챔버(Echo Chamber‧같은 목소리만 메아리 치는 공간)에 갇힌 사람들, '우리 편이 이렇게 많은데 내가 틀릴 리 없다'는 확신에 가득한 이들이, 민주주의를 앞세워 법치주의를 부정하며 결국 민주주의 자체를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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