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 글로벌 시티가 된 이유요? 동네가 강한 도시여서예요”

김현미 기자 2023. 1. 21.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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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 덕후’ 경제학자 모종린

● 유력 대선후보와 ‘골목길 경제학자’는 왜 ‘연희동’에서 만났을까
● ‘작은 도시 큰 기업’에서 ‘머물고 싶은 동네’로
● 홍대 앞 골목상권 분화, ‘동’ 빼고 연남·망원·상수·합정
● 15분 거리에서 일, 삶, 놀이 해결하는 동네 생활권
● 229개 동네 잡지, 3500개 동네 브랜드 나와야
● 은퇴 후 살고 싶은 곳 1순위, KTX 역에서 도보 20분 거리

모종린 연세대 국제학 대학원 교수는 2010년대 ‘골목길 경제학자’로 이름을 알리며 일찌감치 골목상권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박해윤 기자]
2년 전 윤석열 대통령과 모종린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의 첫 만남은 여러모로 화제였다. 대통령선거를 열 달 앞두고 윤 전 검찰총장의 정치 행보에 시선이 집중되던 시기인 2021년 6월 1일 그가 정치인도 아니고 관료 출신도 아닌 '골목길 경제학자'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만난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이들이 그 배경과 의도를 궁금해했다.

두 사람은 복합문화공간 '연남장'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인근 또 다른 복합문화공간 '캐비넷 클럽'을 찾아 전시 작품을 관람하고, 마지막에는 청년이 홀로 운영하는 식당을 찾아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4시간가량 이어진 이 회동의 주제는 골목상권과 청년. 모종린 교수는 "특색 있는 골목상권을 바탕으로 지역경제를 살리는 것이 한국 경제의 새로운 대안"이라며 "이런 '동네 대기업'이 성장해 지역을 살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2012년 결혼 전까지 30년 넘게 연희동에 살았던 윤 전 총장은 "그때와 너무 달라졌다. 청년들이 골목상권을 바꾸면 지역이 이렇게 달라진다"며 "골목상권을 살리는 게 지방을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고 했다.

연희동을 만남의 장소로 선택한 모 교수의 의도는 적중했다. "이름만 듣고 연남장이 중국집인 줄 알았다"고 말한 윤 전 총장은, 단순히 맛집이나 핫플레이스가 아닌 지역산업의 새로운 생태계로서 골목상권을 이해하고 골목 문화를 만들어가는 중심에 로컬 크리에이터가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한 달 뒤(6월 29일) 발표한 대선 출마 선언문에서 '청년'을 여덟 번 언급했다. 이듬해 모 교수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지역균형발전특위 위원으로, 새 정부의 6번째 국정목표인 '대한민국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

"로컬이 미래다" 외친 '골목 덕후'

연남장을 운영하는 '어반플레이'(대표 홍주석)는 '로컬 크리에이터'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공식화한 기업이기도 하다. 모 교수에 따르면 로컬 크리에이터란 지역에서 콘텐츠 기반의 혁신적인 사업을 통해 새로운 가치와 지역문화를 창출하는 사람이자 소상공인 기업이다. 기술로 스타트업과 일반 중소기업을 구분하듯이, 로컬 크리에이터는 로컬 기반 콘텐츠가 있다는 점에서 일반 소상공인과 구분된다. 특정 동네에서 복합문화공간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어반플레이' 자체가 로컬 크리에이터인 셈.

"로컬의 핵심은 공간이 아니라 크리에이터"라고 강조하는 모종린 교수는 현장 활동가들 사이에서 최고의 멘토로 꼽힌다. 2019년 어반플레이스에서 펴낸 무크지 '로컬전성시대'는 모 교수를 이렇게 소개했다.

"문화자원이 풍부한 골목에 사람이 모이고 있다. 개성 있는 상인과 창작자 그리고 그들의 제품을 소비하려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골목은 시간이 지나며 하나의 골목상권으로 자리매김한다. 모종린 교수는 이런 곳들을 한국의 미래 성장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커뮤니티 기반 골목산업 생태계 구축'이 그 골자다. 전국에 홍대, 이태원, 성수동같이 기업 생태계로 전환된 골목상권을 만드는 것이 요즘 모 교수의 최대 화두다."

이때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 '골목 덕후' 경제학자다. 시작은 골목길이 아니라 도시였다. 지역균형발전의 실마리를 찾다가 시애틀의 스타벅스, 포틀랜드의 나이키, 알름훌트의 이케아가 궁금했다. 왜 글로벌 대기업의 본사가 상대적으로 작은 도시에 있는가. 모 교수는 이 도시들을 직접 걸으면서 도시의 라이프스타일과 산업 발전의 관계를 연구해 '작은 도시 큰 기업'(2014)을 발표했다.

한국으로 눈을 돌리니 골목길이 도시 문화의 변화를 주도하고 골목상권이 지역산업의 새로운 생태계가 되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 무렵 '홍대 앞'에서 시작된 골목상권은 2000년대 중반 급성장해 이태원, 삼청동, 가로수길, 성수동, 문래동, 쌍문동 등 서울에만 70여 개 지역으로 확장됐다. 지방은 전주 한옥마을, 경주 황리단길, 부산 감천동 문화마을, 해운대 달맞이고개, 대구 김광석거리 등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주택지였던 곳이 상권으로 부상하고 젊은이들이 여행을 가듯 특정 동네를 찾아가는 새로운 '경제현상'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이가 없었다. 미국 코넬대 경제학 학사, 캘리포니아공대 사회과학 석사,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정치경제학 박사를 거쳐 미국 텍사스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친 다채로운 이력과 경험이 그를 편견 없이 거리로 나가게 했다. 무엇보다 경제학을 전공한 경영학 박사로서 로컬 브랜드는 어디서 탄생하고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알고 싶었다.

2022년 전국 골목상권 200개 넘어

전국 곳곳을 누비며 골목상권을 발굴하고 이를 3개월 단위로 업데이트하자 사람들은 이를 '대동여지도'에 견주어 '골목여지도'라 불렀다. 그리고 2015년 '골목길이 창조경제다'라는 칼럼을 신호탄으로, 각 지역 골목상권을 분석한 책 '골목길 자본론'(2017),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메가트렌드의 역사를 통해 도시와 산업의 미래를 통찰한 '인문학,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다'(2020), 로컬 크리에이터들을 위한 창업 가이드북 '머물고 싶은 동네가 뜬다'(2021)까지 이른바 '로컬 비즈니스 3부작'을 완성했다. 그의 이름 앞에는 자연스럽게 '골목길 경제학자'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골목상권 찾기에서 나아가 로컬 지향, 로컬 브랜드, 로컬 크리에이터, 크리에이터 이코노미, 나다움, 동네다움, 직·주·락(職·住·樂)센터, 라이프스타일 비즈니스 같은 용어가 일시적 유행어로 끝나지 않도록 개념화하고 다양한 캠페인을 통해 확산시킨 공도 빼놓을 수 없다.

골목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뭔가.

"미국의 도시 비평가인 제인 제이콥스가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을 발표한 것이 1961년이다. 도시학의 고전이라 불리는 이 책에서 제이콥스는 공동체 문화와 소상공인 산업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요인으로 골목길에 주목했다. 5층 이하의 저층 건물, 작은 블록 단위로 거리는 짧고 촘촘하게 이어지고 낡은 건물과 신축 건물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골목에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골목 문화의 원동력이라고 했다. 사실 미국이나 유럽의 대도시들은 기본적으로 한국 기준에서 골목상권이라고 불리는 저층 상업지역이고 해외여행은 결국 골목길 관광이다. 여행자들은 파리 샹젤리제, 뉴욕 5번가, 도쿄 긴자처럼 골목길을 중심으로 형성된 가로상가를 통해 거리 문화를 즐긴다. 하지만 그 무렵 한국에서는 원도심 골목을 밀어버리고 대단위 중심의 신도시로 만드는 재개발 사업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얼마 전 프랑스의 석학 기 소르망이 '도시의 풍경이 고층 빌딩 위주로 변해 가는 것은 전 세계적 재앙'이라며 '베이징은 완전히 망가졌고 서울은 반쯤 망가졌다'고 하지 않았나. 더 늦기 전에 골목상권을 찾아내는 일부터 시작했다."

현재 전국에 골목상권은 몇 곳이나 되나.

"2017년 '골목길 자본론'이 나올 무렵 서울에 30개, 전국이라야 50개 수준이었다. 그러다 2021년 155개로 늘어났다. 2022년 6월 'EBS 초대석'에 출연하면서 180개까지 파악했는데 연말쯤 다시 헤아리니 200개가 넘더라."

골목상권이 3년 만에 4배로 늘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탈중앙화, 개인 중심 사회, 작은 도시화는 이미 글로벌 트렌드다. 광역이나 지역이 아닌 동네 생활권 중심으로 간다는 의미다. 코로나 시대에 생활 반경이 좁아진 것도 영향을 끼쳤다. 과거에는 시내와 변두리로 구분했지만, 이제 시내라는 개념이 사라졌다. 신촌, 여의도, 영등포, 강남역 같은 부도심(副都心·대도시의 주변에서 도심의 기능을 분화 담당하는 지구) 개념도 무너졌다. 사람들은 시내가 아니라 동네를 찾아간다. '홍대' 일대는 행정구역상 마포구지만 마포 간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요즘 젊은이들은 '홍대 앞'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동' 이름으로 통한다. '동'도 빼고 연남, 망원, 상수, 합정이라고 한다. 서울도 탈중앙화로 가고 있는 것이다. 지방에 강의를 가면 꼭 던지는 질문이 있다. '서울에 가면 어디를 찾아가나.' 누구는 홍대, 누구는 성수, 누구는 을지로, 누구는 압구정이라고 대답한다. 과거와 같이 명동이라고 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동네가 강한 도시가 글로벌 도시다. 서울이 드디어 글로벌 도시가 된 것이다."

골목상권은 기존 상권과 무엇이 다른가.

"2000년대 초 오프라인 상권은 도심(명동, 강남역, 부산 서면, 대구 동성로 등 도심 중심지), 전통시장, 근린상권(이면, 대로변), 단지형 상권(백화점, 쇼핑몰, 할인마트)으로 구분됐다. 최근 10년 사이 골목상권이 급부상했다. 골목상권이란 주거, 근린, 공업 시설이 있던 골목 지역에 새롭게 들어선 '독립기업' 중심의 상권을 말한다. 홍대 앞, 삼청동, 가로수길, 이태원이 서울의 1세대 골목상권이라면 익선동, 망원동, 후암동, 부암동, 을지로는 최근에 뜬 골목상권이다. 경주 황리단길, 전주 객리단길 등 지방에서도 골목상권이 꾸준히 늘고 있다. 이런 골목상권은 단순히 상품을 소비하는 곳이 아니라 로컬 크리에이터가 그 지역과 골목의 오래된 문화를 새로운 도시 문화 트렌드와 접목해 콘텐츠를 만들고, 소비자는 이것을 경험하기 위해 찾아오는 '문화지구'로 봐야 한다. 문래동, 을지로, 해방촌, 만리동처럼 쇠퇴한 지역이 순식간에 문화지구로 되살아난 것은 콘텐츠의 힘이다."

中路와 골목길이 실핏줄처럼 이어져야

상권이 발달하는 골목의 특징은 무엇인가.

"골목의 사전적 의미는 '동네 안의 길'이다. 동네와 동네를 이어주는 길은 간선도로다. 골목상권이 발달하려면 이 간선도로가 4차로 이하여야 한다. 이를 중로(中路)라고 하는데 폭이 12m 이상 25m 미만의 도로(2~4차로)를 가리킨다. 이 중로를 중심으로 골목길이 실핏줄처럼 연결되는 지역에 골목상권이 형성된다. 중로와 골목길이 바둑판처럼 네모반듯하게 연결된 격자형 도로망을 갖추고 저층 지역이 넓게 분포할 수록 유리하다. 홍대 지역이 대표적이다. 마포구 서교동, 동교동, 상수동, 합정동, 대흥동, 연남동, 성수동, 망원동 8개 행정동이 홍대 지역에 포함되고 전부 평지인 데다 동교로, 성산로, 와우산로, 주차장길 같은 중로들이 2~3㎞씩 뻗어 있다. 그중 망원동에서 시작해 연남동 굴다리를 지나 서대문구 연희동까지 이어지는 동교로가 4.2㎞로 가장 길다. 서울 전체로 보면 그런 지역이 강남보다 강북에 주로 분포돼 있다. 현재 70개에 달하는 서울의 골목상권 중 강남3구는 7개뿐이다. 4차로 이하의 중로와 멋진 가로가 있고, 걷기 좋고, 장사하기 좋은 길에 골목상권이 형성된다고 보면 된다. 이를 C-READI 모델로 설명하는데, 뛰어난 창업자(Entrepreneurship)가 접근성(Access), 골목 자원(Design), 문화자원(Culture)이 풍부하고 임대료(Rent)가 싼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창업하고, 이를 본 다른 창업자가 주변에서 새로 가게를 열어 지역만의 정체성(identity)이 뚜렷한 하나의 상권으로 발전시켜 간다는 것이다."

한옥·적산가옥·단독주택이 먹여 살린다

골목상권의 3가지 성공 요건으로 도로망, 건축물, 문화자원을 꼽았다.

"골목상권을 먹여 살리는 건축물 3가지가 있다. 조선시대 한옥, 일제강점기 적산가옥, 1970년대 토지구획지역에 있는 단독주택. 이 3개 건축물이 없는 동네는 골목상권을 못 만든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조상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조상들이 남겨준 건축물 가지고 먹고사는 셈이니까. 나는 새로운 지역에 가면 택시기사에게 1970년대 부자 동네가 어디인지 물어본다. 70년대 부자 동네 단독주택은 필지가 넓고, 도로가 잘 만들어져 있고, 카페 같은 가게가 들어가기 적당한 큰 집이 많고 주차도 가능해 임대수입을 올릴 수 있다. 이런 단독주택은 희소가치가 있어서 갈수록 비싸진다. 서울 서교동, 연희동이 대표적이다. 다 밀어버리고 아파트를 짓자고 하면 이곳 주민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익선동이나 서촌이 남아 있는 것도 지금의 골목 건축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이익이 크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반면 1980년대 이후 지어진 아파트는 그런 문화적 가치가 없다. 특히 고층 주상복합 건물은 나중에 큰 골칫덩어리가 될 것이다."

골목상권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업종이 있나.

"독립서점, 커피전문점, 베이커리, 게스트하우스. 나는 이 4개를 골목상권 핵심 업종이라고 한다. 특히 동네를 제대로 살펴보고 싶으면 독립서점 사장님과 대화하는 것이 가장 빠르다. 독립서점은 그 동네 플랫폼이기 때문이다. 동네잡지를 발행하면 더 좋다. 성공한 동네잡지로 홍대 지역의 'STREET H', 대전 '월간토마토', '리얼제주매거진 iiin'을 꼽을 수 있다. 전국 229개 기초자치단체마다 하나씩 이런 동네잡지가 있어서 여행자들이 자주 찾는 곳에 공급해야 한다. 미국 호텔에 가면 동네잡지를 넣어주지 않나."

동네 생활권 중심으로 바뀐다고 했는데 동네와 로컬은 다른 개념인가.

"일반적으로 지역색과 개성이 강한 상권이나 지역을 로컬로 부르지만 한국에서 로컬은 상권 중심으로 형성되고 확장된다. 한국에서 로컬을 독립된 문화를 창출하는 크리에이터 상권으로 정의할 수 있는 이유다. 로컬이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는 상권으로 머물지 않고 소상공인 성장 동력, 지역 기업 생태계, 크리에이터 이코노미 플랫폼 등 세 방향으로 확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은 동네가 로컬일 수도 있고, 도시 전체가 로컬일 수도 있다. 2010년 이후 등장한 '로컬 지향' 현상은 귀농귀촌, 제주 이민, 동네 지향, 장소 지향, 고향 지향 다섯 가지를 꼽을 수 있다. 그중 동네 지향은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슬세권(슬리퍼 신고 활동할 수 있는 지역), 스세권(스타벅스 매장이 있는 지역), 홈 어라운드 소비(집 주변에서 소비) 같은 신조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네 중심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서울에서 같은 자치구 내 직장과 거주지가 있는 사람이 50%에 달한다는 수치도 이런 변화를 말해 준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살고 싶은 삶을 살기 위해 지역에 정착하는 것이 바로 '나다움'이다."

‘슬세권' '스세권' 선호하는 밀레니얼의 동네 지향

2016년 이후 마·용·성(마포, 용산, 성동)의 부동산 가격이 급상승한 이유를 직주락(職住樂) 개념으로 설명한 것이 흥미롭다.

"직주락은 일, 주거, 놀이(Live-Work-Play)가 근거리에서 이뤄진다는 개념으로 도시학에서는 2010년대 중반 등장했다. 콤팩트 도시, 15분 도시, 무지개떡 건축(건축가 황두진이 제안한 개념으로 길과 면한 저층부에는 외부 계단과 상가가, 중간층에는 사무실이, 상층부 주거에는 옥상마당 등이 들어가는 도시건축 유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도시계획의 관점에서 '마·용·성'의 부상이 의미 있는 것은 락(樂·상권)이 이를 견인했다는 데 있다. 홍대 앞, 이태원, 성수동이라는 골목상권이 청년문화를 선도하는 문화지구로 자리매김한 뒤, 청년세대가 선호하는 일자리가 늘고, 이들이 실제로 이주하는 락-직-주 순서로 진행됐다. '노·도·강'(노원·도봉·강북)의 부상도 골목상권과 떼어놓고 얘기할 수 없다. 이는 원도심 주택 공급이 골목상권과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함을 말한다. 골목 자원을 훼손하는 대규모 주택공급 사업은 재고돼야 한다. 처음 쌍리단길(도봉구 쌍문동 쌍문역 2번 출구에서 시장으로 이어지는 골목상권)에 갔다가 한 젊은이의 말을 듣고 짠했다. '4호선 지옥철로 출퇴근하기도 피곤한데 노는 것은 동네에서 하고 싶다.' 나는 구청장들에게 '마·용·성'이 되고 싶으면 로컬 크리에이터와 골목상권을 육성하라고 말한다. 서울시 자치구 평균 인구가 40만 명인데 골목상권이 하나도 없는 자치구가 무려 10곳이다"

3500개 읍·면·동이 브랜드 돼야

지역경제를 살리려면 '동네 대기업'을 키워야 한다고 했다.

"로컬 크리에이터가 지역 발전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크게 두 갈래다, 첫째 전국 브랜드로 성장하는 것이다. 대전 성심당, 군산 이성당, 강릉 테라로사와 카페 보헤미안, 통영 남해의봄날, 부산 삼진어묵과 덕화명란, 제주 리얼제주매거진 iiin, 서교동 로컬스티치, 연남동 연남방앗간의 참깨라테. 이들은 로컬 브랜드에서 전국 브랜드로 성장한 이른바 '동네 대기업'이다. 둘째, 동네 자체가 브랜드가 되는 것이다. 동네에 골목상권이 들어서면 동네가 브랜드가 되고, 동네가 브랜드가 되면 인재와 기업이 들어온다. 수년 전부터 연예기획사, 대기업, 해외 명품 기업이 성수동, 한남동, 연남동처럼 MZ세대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본사를 이전하거나 매장을 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로컬 브랜드가 단위 기업에 의한 지역 발전이라면, 동네 브랜드는 생태계에 의한 지역 발전이다. 요즘 강연 때마다 전국 3500개 읍·면·동을 '브랜드'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기껏 상권을 키워놓으면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피해를 본다. 1세대 골목상권인 삼청동의 쇠락이 그 예다.

"골목상권의 경쟁력은 독립 가게들의 독특한 개성에서 나온다. 이것은 대기업이 원천적으로 경쟁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스타벅스조차 제주도에 가면 로컬 음료를 출시한다. 로컬 크리에이터들과 협업할 수밖에 없다. 골목상권에서는 가게를 가게라고 하지 않고 '공간'이라고 부른다. 물건을 파는 가게가 아니라 서점, 카페, 공연장, 전시장이 함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동네 아티스트들과 협업은 필수다. 이미 동네가 대기업을 이기고 있다. 대기업들이 오히려 동네를 흉내 낸다. 쇼핑센터 안에 로컬 브랜드를 유치하고, 인위적으로 골목 분위기 상권을 만드는 시도를 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에 사람들이 몰리지만 금세 활력이 떨어진다. 여기에는 '나다움'으로 일하며 로컬 문화를 만들어가는 '플레이어'들이 없기 때문이다. 삼청동의 쇠락을 얘기하지만 그곳에서 시작한 현상이 익선동, 을지로, 서촌으로 확산됐다. 청와대, 송현동 등 광화문 일대 문화자원을 기반으로 5년 이내에 삼청동도 다시 일어설 것이다."

골목상권을 문화지구로 키워낸 소상공인의 힘

[박해윤 기자]
로컬의 핵심은 공간이 아니라 크리에이터라고 했다. 이들을 어떻게 육성하고 지원해야 하나.

"누가 크리에이터인지에 답이 있다. 우리는 지나치게 엘리트 문화 중심이다. '문화지구'라고 하면 예술인마을 만들고 미술관, 박물관 지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역발전을 위해 선택하라고 하면 골목상권을 선택하겠다. 소상공인이 들어갈 공간이 없는데 어떻게 활력이 생기겠나. 그런데 정작 이들이 만든 공간을 골목상권이라고 하지 문화지구로 인정하지 않는다. 굉장히 인색하다. 현재 크리에이터 이코노미를 이끌어가는 것은 온라인 콘텐츠 크리에이터, 온라인 셀러, 그리고 오프라인에서 콘텐츠를 만드는 로컬 크리에이터 세 그룹이다. 이들을 지원하고 육성할 별도의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 이들은 소상공인이기도 하고 스타트업이기도 하다. 아직까지 크리에이티브 이코노미와 관련한 정부의 컨트롤타워가 없어 정확한 통계도 알 수 없다. 네이버 생태계에서 활동하는 콘텐츠 크리에이터가 전 세계적으로 1000만 명이고 이 중 한국인이 몇 명인지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적어도 10%는 될 것으로 추정한다. 여기에 국내 온라인 셀러 50만 명, 국내 스마트플레이스 운영자 217만 명이라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뿐이다.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상권 활성화, 도시재생, 문화도시, 스타트업과 크리에이터 육성은 따로따로가 아니라 함께 가야 한다. 상권이 문화지구가 되고 문화지구가 상권이 되는 세상이다. 결국 문화를 창출할 수 있는 동네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동네다움'이다."

대통령실이 용산으로 이전한 뒤 청와대의 활용과 서촌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서촌은 길, 건축자원, 문화자원이라는 골목상권의 성공 요인을 다 갖췄다. 중로가 많은 격자형 도로망으로 확장 가능성이 많다. 한옥, 근대건물, 현대건물, 건축가들이 새로 지은 건물 등 시대별로 다양한 건축자원을 갖고 있고, 경복궁을 중심으로 대림미술관, 박노수미술관, 공방 등 문화자원은 다른 어떤 동네보다 많다.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많이 살고 있는 것도 크리에이터 타운으로서 장점이다. 실험적인 식당과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가게가 많아서 로컬 브랜드도 풍부하다. 서촌이야말로 '직주락'이 가능한 곳이다. 서촌, 삼청동, 북촌, 계동을 동서로 경복궁, 광화문, 청계천을 남북으로 통합한 어마어마한 문화지구를 조성할 수 있다. 그러려면 서촌과 삼청동을 연결하는 청와대길부터 바꿔야 한다. 차 없는 거리를 만들고 공원 만드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데 한계가 있다. 상업시설이 들어가야 한다. 나라면 청와대 춘추관 쪽에 스타벅스 리저브 로스터리 같은 상업시설을 넣어 랜드마크로 삼겠다. 프리미엄급 커피 공장으로 전 세계에 5군데밖에 없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지역발전 담론, 균형이 아니라 자립에 방점

윤석열 정부의 국정목표가 '살기 좋은 지방시대'다. 여전히 지역균형발전이 답인가.

"지난 연말에 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지역을 돕는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국가 주도의 재분배 정책인 지역균형발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0년대 이후 지역발전 담론을 주도해 온 진보 진영은 중앙정부와 중앙 산업의 자원을 재분배하는 균형발전을 추진했다. 노무현 정부는 공공기관을 지방으로 이전하고 혁신도시를 건설했고, 문재인 정부는 중앙정부의 권한을 지역정부에 대폭 이관하는 자치 분권을 강조했다. 그중 핵심은 지방 재정 확충으로 8대 2인 국세·지방세 비율을 점진적으로 6대 4로 조정하는 것이 목표였다. 새 정부가 진보 진영의 균형발전론을 그대로 계승하는 것은 답이 아니다. 보수라면 재분배를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지역발전을 지원해야 한다. 또 균형발전은 지역의 다양성을 저해한다. 보수정당의 지역발전 정책은 독립적인 산업 개발과 추진 능력 강화를 중심으로 구성해야 한다. 지역의 자생적 성장 기반은 지역 대학, 연구기관, 대기업을 연결하는 R&D 지원 시스템과 지역 대학, 문화와 관광 지원 기관, 로컬과 콘텐츠 크리에이터를 연결하는 콘텐츠 지원 시스템 구축에 달렸다. 전자가 지역의 혁신 생태계라면, 후자는 창조 생태계다. 지역균형발전이 아니라 지역 자립 발전이다."

덧붙여 모 교수는 "지역발전을 저해하는 많은 걸림돌 중 하나가 지역 능력 무시"라며 "지역 정부가 자체적으로 할 능력이 없으니 예산과 권한을 못 주겠다는 중앙의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독립서점 운영자로 은퇴 후 삶 준비

모 교수에게 연락하면 늘 기차 안이거나 현장이다. 물론 강연이나 회의 중이어서 연락이 닿지 않을 때도 많다. 그는 2026년 정년퇴임을 하면 연구자에서 활동가로 변신할 준비도 차근차근 하고 있다. 첫 번째 작업이 은퇴 후 살 곳을 찾는 것이다. 충남 홍성이 고향이지만 굳이 고향을 고집할 생각은 없다. 그가 제시한 귀로컬(은퇴 후 살고 싶은 지방도시) 적합지 기준 8가지를 보면서 자신만의 은퇴 후보지 기준을 작성해 보는 것도 좋겠다.

△KTX 역에서 도보 20분 거리, △2층 단독주택 기준 3억 원 안팎 △간단히 수리하고 입주할 수 있는 곳 △차 한 대 주차 가능한 집 △1970년대 부자 동네 △독립서점 없는 동네 △근거리에 대학이 있는 곳 △상가건물 전환 가능 주택.

그는 자신의 SNS에 이 기준을 공개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가 각자 로컬을 어떻게 도울까 고민해야 한다면 독립서점을 추천합니다. 평소 독립서점을 이용하고 여유 있으면 은퇴 후 서점을 창업하세요. 저도 지역 소도시에서 1인 연구소 겸 독립서점을 운영할 계획입니다. 독립서점이 있다는 것 자체가 동네의 품격을 높이고 그 동네를 로컬 지도에 올립니다. '독립서점 운영자 학교' 많습니다. 거기 가서 필요한 것만 배우세요. 오후에 은퇴 후보지 갑니다. 외곽에 독립서점 하나 있는 도시입니다. 중앙 원도심에 독립서점 5개 들어가면 좋겠습니다."

그가 '픽'한 은퇴 후보지는 아직 비밀이다.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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