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ituary] 별이 된 자유로운 영혼 김중만

오홍석 기자 2023. 1. 21.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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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사진작가 김중만의 카메라 앞에 서지 않은 유명인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부와 명예를 뒤로하고 돌연 다른 길을 택한다. 겉으로는 자유분방해 보였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진을 고민한 그의 삶을 되돌아봤다.

김중만 사진작가가 2022년 12월 31일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 김중만이 69세의 나이로 2022년 12월 31일 별세했다. 그는 일찍이 프랑스와 한국에서 사진작가로 이름을 알린 뒤 상업 사진작가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많은 이가 기억하는 그의 모습은 레게 머리와 몸 곳곳에 새겨진 타투. 자유로운 영혼을 꾸밈없이 표출하는 사람이었다. 생전에 그는 두 차례 추방을 경험했으며 정신병원에도 감금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동시에 김중만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2011년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사진은 육체적·정신적 노동이고 사진은 결코 행복한 작업이 아니다. 끊임없이 사진에 대해 분석하고 판단해 냉정한 쪽으로 결론을 내리기 때문에 항상 부족함을 느끼며 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2005년 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의 작품에 얼마나 만족하느냐"는 질문에 "25~30%밖에 안 됩니다. 욕심이 클 수도 있고, 내가 굉장히 냉정한 사람일 수도 있어요. 50%를 왔다 갔다 할 때도 있어요. 솔직히 70~80%를 느껴본 적은 없어요"라고 답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냉정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자유롭되 치열하게 예술의 세계를 고민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의 추방, 정신병원 감금

한때 김중만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았던 레게 머리.
김중만은 1954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1971년 국외 공공의료 전문의였던 아버지를 따라 아프리카 부르키나파소에서 유년을 보내다 프랑스 니스 국립응용미술대학에 진학했다. 원래는 서양화를 전공했으나 암실에서 친구의 사진 현상작업을 돕다 사진에 빠져들었다. 첫 개인전은 1975년 프랑스에서 열었다. 1977년에는 프랑스 '아를 국제 사진 페스티벌’에서 '젊은 작가상’을 받았다. 같은 해 프랑스 '오늘의 사진작가 80인’에 최연소 작가로 이름을 올렸다.

1979년 한국에 돌아온 그는 1985년과 1986년 두 번이나 추방을 경험한다. 나중에 귀화했지만, 당시 한국 국적을 포기한 프랑스 국적자가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전시회를 열었다는 이유에서였다. 1993년에는 마약 복용 혐의로 두 달간 형을 살고, 1995년에는 정신병원에 감금되기도 했다. 그는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 하지도 않은 마약 때문에 정신병원에 감금됐다면서 "살면서 정신병원에 가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돈 주고도 갈 수 없는 곳이죠. 그곳에서 3일 정도 있으니까 '대한민국이 나를 진짜 예술가로 만들려고 작심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웃음)"라며 특유의 낙천성을 보였다. 여러 어려움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간 그는 1991년 가수 김현식의 사진을 모은 사진집 '넋두리 김현식’과 '인스턴트 커피’(1996), '동물왕국’(1999) 등의 작품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김중만이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각인시킨 계기는 톱스타들의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다. 그가 상업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40살이 되고 보니 집 한 칸도 없는 게 가족에게 너무 미안해 2000년에 명함을 만들고 스튜디오를 차렸다"고 밝혔다. 본격적으로 상업사진에 뛰어들자 곳곳에서 그를 찾았다. 이미 사진계에서 예술성을 인정받은 작가였기에 돈을 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김중만은 한국에서 보기 드문 스타 사진작가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당대 톱스타 중 그의 카메라 앞에 서지 않은 이가 거의 없었다. 전도연, 강수연, 고소영, 비, 원빈, 정우성, 이승철 등 지금도 연예계에 톱스타로 불리는 이들이 그의 피사체가 되길 자청했다. '괴물’ '타짜’ '달콤한 인생’ 등 다양한 영화 포스터 작업에도 참여했다.

2009년 그는 한 TV 토크쇼에 출연해 "테이블이 스무 개 정도 되는 카페에 나와 미팅하는 사람들과 미팅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고 말한 바 있다. 많은 이가 기억하는 레게 머리를 하고 연신 셔터를 누르던 시점도 이맘때다. 그는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어느 날 미용실에서 충동적으로 머리를 땋았는데 사람들이 내 헤어스타일을 보고 웃는 게, 즐거움을 주는 '룩’이라고 생각해 이 스타일을 유지했다"고 밝혔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2006년 그는 돌연 상업사진 촬영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저 "어느 날 결심이 섰다"고 말할 뿐이었다. 이는 일당 2000만 원, 연 매출 17억 원을 포기하겠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좋아하던 스포츠카와 명품 시계와도 거리를 두며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 쓰는"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상업사진 중단하고 자연 사진과 자선 활동에 집중

김중만 작가가 2012~2014년 촬영한 ‘독도 연작’ 중 일부.
이후 김중만은 이전과는 다른 사진을 찍었다. 한국관광공사, 문화재청 등의 의뢰로 전국 각지를 돌며 한국의 미를 담아낸 엽서용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는 "한국은 너무나도 아름다운데 자꾸 밖으로만 나가려 했다"며 새로운 발견에 대한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가 말년까지 천착했던 한국의 미에 빠져든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후에는 유명한 '독도 연작’과 '둑방길 나무 연작’을 세상에 내놓았다.

생전에 그는 자선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2008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시작으로 아프리카 부족 마을에 골대를 세우는 '골포스트 희망기행’을 주도했다. 2011년에는 친분이 있던 김점선 화백의 이름을 딴 '김점선 미술 학교’를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 설립했다. 그리고 2014년, 자선을 목적으로 박찬욱 감독과 함께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을 선보이는 전시회를 열었다. 2018년에 연 제자들과의 공동 전시회 역시 같은 목적이었다.

그는 몸에 타투를 여러 개 새겼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 천안함 침몰, 세월호 참사 등 가슴 아픈 일이 있을 때마다 몸에 각 사건을 상징하는 숫자나 그림을 새긴 것. 그는 본인의 예술 세계에만 심취하지 않고, 어려운 이웃을 살피고 늘 세상에 관심을 두는 예술가였다.

김중만 작가가 2011년 진행한 사진전 ‘이지적 우아함’에서 선보인 사진 견본 위에 앉아 미소 짓고 있다.
말년에는 18세기 조선 화가 겸재 정선의 그림을 동경했다. 그는 지난해 1월 벨기에 브뤼셀 전시를 계기로 진행한 인터뷰에서 "겸재가 우리에게 준 그 감동을 되돌려주는 일을 해야 할 것 같다"며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신윤복의 풍속화 속 인물들을 사진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생전 그는 겸재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금강산을 렌즈에 담아내는 것을 인생의 과업으로 여겼지만 안타깝게도 그 꿈은 이루지 못했다. 김중만 작가는 2020년 말 겸재의 '인왕제색도’ 속 인왕산을 사진으로 옮기는 작업 도중 폐렴에 걸리고 말았다. 이후 긴 투병 생활이 이어졌고, 끝내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했다.

김중만 작가는 자신이 주연한 다큐멘터리 영화 '꽃은 들에 피게 하고 새들은 하늘을 날게 하라’에서 "언제 가장 행복했냐"는 질문에 "1999년 아프리카 케냐에서 야생동물 사진을 찍을 때 가장 행복했다"고 답했다. 어떤 부와 명예보다도 오로지 사진에 파묻혀 치열하게 고민할 수 있었던 시간이 그를 가장 행복하게 한 듯하다. 이제는 현실적 제약에 얽매이지 않고 평생 만족하지 못했던 예술 세계를 편안히 완성해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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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동아DB 
사진제공 벨벳언더그라운드 스튜디오

오홍석 기자 lumie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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