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ituary] 별이 된 자유로운 영혼 김중만
2000년대 사진작가 김중만의 카메라 앞에 서지 않은 유명인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부와 명예를 뒤로하고 돌연 다른 길을 택한다. 겉으로는 자유분방해 보였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진을 고민한 그의 삶을 되돌아봤다.
동시에 김중만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2011년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사진은 육체적·정신적 노동이고 사진은 결코 행복한 작업이 아니다. 끊임없이 사진에 대해 분석하고 판단해 냉정한 쪽으로 결론을 내리기 때문에 항상 부족함을 느끼며 살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2005년 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의 작품에 얼마나 만족하느냐"는 질문에 "25~30%밖에 안 됩니다. 욕심이 클 수도 있고, 내가 굉장히 냉정한 사람일 수도 있어요. 50%를 왔다 갔다 할 때도 있어요. 솔직히 70~80%를 느껴본 적은 없어요"라고 답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냉정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자유롭되 치열하게 예술의 세계를 고민했음을 알 수 있다.
두 번의 추방, 정신병원 감금
1979년 한국에 돌아온 그는 1985년과 1986년 두 번이나 추방을 경험한다. 나중에 귀화했지만, 당시 한국 국적을 포기한 프랑스 국적자가 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전시회를 열었다는 이유에서였다. 1993년에는 마약 복용 혐의로 두 달간 형을 살고, 1995년에는 정신병원에 감금되기도 했다. 그는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 하지도 않은 마약 때문에 정신병원에 감금됐다면서 "살면서 정신병원에 가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돈 주고도 갈 수 없는 곳이죠. 그곳에서 3일 정도 있으니까 '대한민국이 나를 진짜 예술가로 만들려고 작심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웃음)"라며 특유의 낙천성을 보였다. 여러 어려움에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간 그는 1991년 가수 김현식의 사진을 모은 사진집 '넋두리 김현식’과 '인스턴트 커피’(1996), '동물왕국’(1999) 등의 작품집을 세상에 내놓았다.
김중만이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각인시킨 계기는 톱스타들의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다. 그가 상업사진을 찍게 된 계기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는 여러 인터뷰를 통해 "40살이 되고 보니 집 한 칸도 없는 게 가족에게 너무 미안해 2000년에 명함을 만들고 스튜디오를 차렸다"고 밝혔다. 본격적으로 상업사진에 뛰어들자 곳곳에서 그를 찾았다. 이미 사진계에서 예술성을 인정받은 작가였기에 돈을 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김중만은 한국에서 보기 드문 스타 사진작가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당대 톱스타 중 그의 카메라 앞에 서지 않은 이가 거의 없었다. 전도연, 강수연, 고소영, 비, 원빈, 정우성, 이승철 등 지금도 연예계에 톱스타로 불리는 이들이 그의 피사체가 되길 자청했다. '괴물’ '타짜’ '달콤한 인생’ 등 다양한 영화 포스터 작업에도 참여했다.
2009년 그는 한 TV 토크쇼에 출연해 "테이블이 스무 개 정도 되는 카페에 나와 미팅하는 사람들과 미팅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고 말한 바 있다. 많은 이가 기억하는 레게 머리를 하고 연신 셔터를 누르던 시점도 이맘때다. 그는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어느 날 미용실에서 충동적으로 머리를 땋았는데 사람들이 내 헤어스타일을 보고 웃는 게, 즐거움을 주는 '룩’이라고 생각해 이 스타일을 유지했다"고 밝혔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2006년 그는 돌연 상업사진 촬영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저 "어느 날 결심이 섰다"고 말할 뿐이었다. 이는 일당 2000만 원, 연 매출 17억 원을 포기하겠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좋아하던 스포츠카와 명품 시계와도 거리를 두며 "있으면 쓰고 없으면 안 쓰는"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상업사진 중단하고 자연 사진과 자선 활동에 집중
생전에 그는 자선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2008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시작으로 아프리카 부족 마을에 골대를 세우는 '골포스트 희망기행’을 주도했다. 2011년에는 친분이 있던 김점선 화백의 이름을 딴 '김점선 미술 학교’를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 설립했다. 그리고 2014년, 자선을 목적으로 박찬욱 감독과 함께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을 선보이는 전시회를 열었다. 2018년에 연 제자들과의 공동 전시회 역시 같은 목적이었다.
그는 몸에 타투를 여러 개 새겼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 천안함 침몰, 세월호 참사 등 가슴 아픈 일이 있을 때마다 몸에 각 사건을 상징하는 숫자나 그림을 새긴 것. 그는 본인의 예술 세계에만 심취하지 않고, 어려운 이웃을 살피고 늘 세상에 관심을 두는 예술가였다.
김중만 작가는 자신이 주연한 다큐멘터리 영화 '꽃은 들에 피게 하고 새들은 하늘을 날게 하라’에서 "언제 가장 행복했냐"는 질문에 "1999년 아프리카 케냐에서 야생동물 사진을 찍을 때 가장 행복했다"고 답했다. 어떤 부와 명예보다도 오로지 사진에 파묻혀 치열하게 고민할 수 있었던 시간이 그를 가장 행복하게 한 듯하다. 이제는 현실적 제약에 얽매이지 않고 평생 만족하지 못했던 예술 세계를 편안히 완성해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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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동아DB
사진제공 벨벳언더그라운드 스튜디오
오홍석 기자 lumier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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