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FP는 ‘에밀리, 파리에 가다’ INTP는 ‘킬 빌’ ‘성향 저격’ 작품 정주행하다보니 나흘 연휴 순삭~!
MBTI 없이 ‘나’를 말하기 어려워졌다. 자기소개 필수 요소다. 복잡다단한 존재인 인간을 16개 성격유형지표로 나눌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우린 자꾸 분석한다. ‘너’를 더 알고, 이해하기 위해. 문화부 기자들이 MBTI 테스트를 했다. 작당한 것도 아닌데 다섯 명이 모두 달랐고, 아주 조금씩 닮아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MBTI별 볼 만한 드라마, 영화, 음악, 책을 소개한다. 그런데, MBTI가 같으면 문화 소비 스타일과 감응도 같을까. 시험해 보시고 알려주시길.
MBTI 검사 결과를 보고 ‘허걱’ 했다. 추진력 강하고 아랫사람에게 엄격한 경영자라니. 조직 관리에 집중하느라 타인의 감정엔 무심한 유형이라니. ‘내가 모르는 나’를 보는 것 같아 몇 번 더 검사했는데 같은 결과가 나왔다. 내 안에 ESTJ의 속성이 숨어 있음을 받아들이며 아끼는 책 목록과 연결 지을 키워드로 ‘질서와 안정’ ‘관찰’ ‘가족’을 골랐다.
‘ESTJ는 질서를 중시한다’는 거창한 문구를 읽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을 떠올렸다. 그는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서두에서 글쓰기 지론을 꺼낸다. 그에게 글짓기는 집짓기와 유사하다. ‘공학적 배치’를 준칙 삼아 필요한 단락 수를 계산하고, 각 단락의 길이를 맞춘다. ‘시각적 균형’이 곧 사유의 ‘구조적 균형’을 반영한다는 믿음으로. MBTI의 예견(?)대로 언젠가 관리자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하루하루 쓰는 글은 균형과 질서를 향해 나아가기를.
김혜리는 글의 질서에 매달리는 신형철이 “바로 이 사람처럼 잘 쓰고 싶다”고 했던 영화 저널리스트다. 김혜리의 ‘묘사하는 마음’은 ESTJ의 능력 중 하나인 관찰력이 좋은 비평의 조건임을 일깨운다. 그는 오랜 세월 영화를 따라다니며 한 일은 결국 ‘묘사’였다고 말한다. 영화의 ‘이목구비’를 꼼꼼히 관찰하고 묘사한 초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애써 어려운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고 스크린에 집중하는 그의 글은 같은 영화를 본 관객에게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ESTJ의 약점은 낮은 공감력이라는데, 오래 자세히 관찰하면 ‘공감도 잘하는 ESTJ’가 될 거라 믿는다. 실은 군대에 있을 때 김혜리의 첫 비평집 ‘영화야 미안해’를 읽고 애정 넘치는 팬레터를 보낸 적이 있다. 어쩌면 내 안에 이미 따뜻한 공감의 기운이 있는지도.
소설가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엔 부족한 재능에 절망하는 영화감독 지망생 소녀가 무뚝뚝한 할아버지로부터 뭉클한 위로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비 오는 날 손녀가 사는 서울의 허름한 원룸을 찾아간 할아버지는 말한다. “네가 이렇게 큰사람이 될 줄 몰랐다.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거, 멋지다고 본다.” 자신을 향한 안쓰러움을 마음에 없는 칭찬으로 포장한 말임을 알면서도 소녀는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ESTJ는 가족을 끔찍이 아낀다’는 설명을 보며 소설 속 할아버지처럼 대놓고 말하지 않아도 가족에게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지난 주말 나의 부모님을 만났고, 연휴엔 아내의 부모님에게 인사드린다. 벌써 지난 주말의 술자리가 그립지만, 다가오는 만남이 있어 괜찮다.
갑작스러운 번개 약속? 환영이다. 친구와 만나고 있는데 친구가 전혀 모르는 다른 친구를 데려온다고? 대환영이다. 좋은 게 좋은 것. 활동적인 ‘핵인싸’이자 자유로운 ‘흥순이’ ESFP가 환호할 콘텐츠를 신나게 골랐다.
뉴요커 ‘캐리’의 화려한 삶에 빠졌던 ESFP라면 ‘에밀리’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프랑스 파리의 홍보 회사에서 일하는 미국인 에밀리의 일상을 다룬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 날마다 열리는 파티에 유명 디자이너와의 협업, 그 사이 멋진 셰프와의 로맨스까지. 활동적인 ‘핵인싸’ ESFP에게 에밀리는 영혼의 단짝이다. 낭만의 도시 파리의 풍경과 에밀리의 화려한 패션을 감상하는 재미도 크다.
설 연휴, 신나는 영화로 기분 전환을 하고 싶다면 엘비스 프레슬리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엘비스’를 추천한다. 무명 가수에서 단숨에 스타로 올라선 그의 인생이 화려하고 감각적인 영상으로 펼쳐진다. 진지하고 우울한 것을 싫어하는 ESFP에게 영화 후반부는 다소 무겁지만, ‘흥’ 넘치는 ESFP라면 영화가 끝난 후 백이면 백, 엘비스처럼 다리를 흔들며 ‘하운드 도그’(Hound Dog)를 부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덤, 엘비스 역시 대표적인 ESFP로 알려져 있다.
ESFP는 길고 지루한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트렌드에 뒤떨어지는 것도 ESFP로선 싫은 일 중 하나다. 쿠팡플레이 ‘SNL 코리아 시즌3’는 ESFP를 ‘위한’ 콘텐츠다. 요즘 가장 ‘핫’한 데다 코너별 길이가 10분 안팎이어서 보는 데 부담이 없다. 특히 MZ세대 회사원의 모습을 현실감 있게 그려낸 ‘MZ오피스’는 큰 화제를 불러모으고 있는데 ‘공감’에 특화된 ESFP라면 “맞아, 맞아” 하며 재미있게 볼 것이다.
친구를 좋아하는 ESFP는 ‘사랑꾼’보단 ‘우정꾼’. 걸그룹 뉴진스의 ‘디토’ 뮤직비디오는 옛 친구들을 떠올리게 한다. 교복을 입은 멤버들이 학교를 배경으로 구형 캠코더를 든 채 깔깔거리는 모습은 저마다의 학창시절을 소환한다. 친구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는 ESFP라면, ‘디토’를 보자마자 단체카톡방에 공유할 것이다. ‘얘들아 보고 싶어. 만나자!’라는 말과 함께.
ESFJ는 계획적이다. 변수가 생기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정이 필요한 상황이 발생하면 대처도 빠르다. 그렇기에 “넌 다 계획이 있구나”라는 대사로 유명한 영화 ‘기생충’을 추천한다. 영화 ‘헤어질 결심’이 미국 아카데미를 노크하는 상황 속에서 해당 시상식에서 4관왕에 올랐던 ‘기생충’을 곱씹어보는 것도 의미 있다. “이미 봤다”고 하는 분들께는 흑백 버전을 추천한다. 넷플릭스, 티빙에서 볼 수 있다.
조직 순응, 동료애, 강한 책임감도 ESFJ의 속성이다. 느슨함을 용납지 않지만 그만큼 먼저 지칠 수 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의미에서 ‘백종원의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를 다시 꺼내본다. 코로나19 이전, 마스크 없이 평화롭던 해외의 모습과 푸짐한 길거리 음식을 양껏 즐길 기회다. 티빙에서 볼 수 있다.
세세한 추억까지 간직하는 꼼꼼함도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기억력이 좋고 추억을 곱씹길 즐긴다. 만약 아직 ‘재벌집 막내아들’을 보지 않은 ESFJ라면 이번 연휴, 꼭 정주행하길 추천한다. 서태지와 HOT, 2002월드컵 등이 다시 당신의 피를 끓게 할 것이다. 넷플릭스, 티빙 중 편한 곳에서 찾아보면 된다.
‘눈치’, 좋게 말하면 센스가 있고, 나쁘게 말하면 눈치를 본다. 주변 분위기가 망가지는 것을 몹시 꺼리기 때문이다. 그런 ESFJ에게 백년노장 ‘눈치 100단’ 형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형사록’이 연휴간 큰 재미를 줄 수 있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진양철 회장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형사로 분한 배우 이성민의 명연기를 맛볼 기회다. 오직 디즈니+에서만 볼 수 있다.
‘INFP’를 둘러싼 이야기 중 가장 충격적인 건 ‘회사 면접에서 INFP는 믿고 거른다’는 말이었다. ‘평화로운 중재자’라는 근사한 분석에도 불구하고, 왜 환영받지 못하는 걸까. 혼자 있어야 에너지를 얻고(I), 논리보다 감정을 중시하고(F), 즉흥적(P)이라서 조직생활과 맞지 않는다는 것. 규칙과 약속에 취약하고 단체 활동에 쉽게 지치며, 감정의 파도에 자주 울렁거리는 내 자신을 돌아보니, 저항할 겨를 없이 수긍도 된다. 그래도 15년째 큰 사고 안 치고 직장생활 중. 뭔가 장점이 있겠지. 온갖 분석을 뒤져 마음에 드는 키워드를 골라냈으니 바로 ‘공상’ ‘낭만’ ‘공감’이다.
INFP를 키우는 건 8할이 ‘공상’이다. 나는 사소한 것에서도 곧잘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가끔은 망상의 단계에 이르기도. ‘맞아 맞아’ 하고 있을 동지들에게 구아진 작가의 웹툰 ‘미래의 골동품 가게’를 추천한다. 먹고 사는 데 바빠 봉인됐던, 당신들의 자유로운 상상 욕구가 부족함 없이 충족될 것이다. 이야기는 신비한 골동품 가게에서 일하는 주인공 ‘미래’가 한반도의 모든 귀신과 혼백을 찾아다니며 퇴마 활동을 펼치며 전개된다. 미래 주변의 괴이한 사건들이 다양한 무속 신앙, 신화 등과 어우러지며 해결된다. 지금 제일 잘나가는 K-웹툰. 이미 영상화가 결정됐다. 한국적 색채가 짙어 ‘한국형 오컬트’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낭만’도 INFP의 삶을 좌우하는 요소. 이성보다 감성, 논리보다 느낌이니까. 그래서 흔히 로맨티스트라 불리지만 냉정하게 보면 현실감 떨어지는 부류이기도 하다. 따라서 연애와 사랑에 작동하는 ‘계급’을 곱씹는 드라마 ‘사랑의 이해’ 같은 건, 제목부터 INFP에겐 난제인 셈. 그래서, 오히려, 이혁진 작가의 동명 원작 소설을 더욱 권하고 싶다. 철저한 계급 사회인 은행을 배경으로 청춘 남녀의 일과 사랑을 그린 소설은 INFP에겐 공부도 되고 위안도 된다. 우리가 ‘낭만’이라 부르는 그것은, 수많은 이해의 과정을 거쳐 나온 이성의 총합일지도 모른다는 것. 또한, 그것은 나름의 결론이다. INFP에게 최적화된 사랑의 방식으로서 말이다.
얼마 전 오디오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다시 읽었다. 국내에서만 150만 부 넘게 팔린 초 베스트셀러다. 소설엔 수많은 ‘고민이’들의 사연이 시공을 초월해 쏟아진다. 지금의 고객뿐만 아니라, 미래의 고객들의 고민까지, 그리고 그 모든 이들의 삶의 행방까지 상상하고 염려했던 잡화점 주인 나미야 아저씨. 그는 아마도 극강의 INFP가 아니었을까. 미래도 과거도 바꿔놓는다. ‘공감’이 하는 일을 보고 싶다면, 이 책이다.
학창 시절엔 INFJ였는데, 어느 순간 ENTP와 INTP가 번갈아 나오더니 INTP에 정착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고작 16가지 분류에 나를 욱여넣을 순 없지. 그런데 나 MBTI 검사를 수시로 해봤구나. MBTI 검사, 뭐 그런 걸 하느냐고 무시할 것 같지만, 실은 16개 성격 유형별로 이미 파악해 본 사람. 그런 게 INTP 아닐까.
아서 펜 감독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 원제 보니 앤 클라이드)만큼 INTP의 ‘즉흥성’을 꿰뚫은 제목이 있을까. 보니(페이 더너웨이)와 클라이드(워런 비티)는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르고, 이따금 뒹굴며 구체적인 계획 없이 도망 다닌다. 프랑스 누벨바그 스타일을 빌려와 폭력을 거침없이 표출한 영화는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의 지평을 열었다. 영화의 마지막, 계획성 없이 움직이던 두 남녀는 총 세례에 벌집이 된다. 영화의 결말은 흥미로운 일에 정신이 팔리면 해야 할 일을 기약 없이 미루는 INTP에게 경종을 울린다.
우마 서먼(베아트릭스 키도·블랙 맘바)이 노란 트레이닝복을 입고 복수에 나서는 모습이 눈에 선한 ‘킬 빌’(2003·2004, 연출 쿠엔틴 타란티노)은 사실 ‘사회성 부족’이 빚어낸 참극이다. 최종 살해 목표인 빌부터 그녀의 애인이자 보스였고, 그 밖에 그녀가 죽여야 할 인물들은 조직의 일원들이었다. 모두 그녀의 직장 동료였단 얘기다. 일로 만난 사이라고 정서적 교류엔 소홀했을 테고, 그녀의 결혼식을 망칠 때 아무도 그녀를 위해 나서지 않았을 것. 조직 문화에 대해 거부감을 호소하는 ‘독립적’ 성향이 강한 INTP로선 뜨끔할 순간. 그렇지만 블랙 맘바는 끝내 승리한다.
영화 ‘도약선생’(2011, 연출 윤성호)에서 룸메이트 우정(이우정)과 헤어진 원식(나수윤)은 ‘크고 높고 늠름한’ 무엇을 한다면, 마음을 돌릴 수 있다는 우정의 얘기에 장대높이뛰기에 도전한다. 실현 가능성에 상관없이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이상주의적’인 성향은 INTP의 속성. 원식은 전영록 코치(박혁권)의 지도 아래 트레이닝을 시작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제대로 된 육상 장면 하나 없이 성도착과 계급 문제가 뛰어든다. 영화는 산만하지만 볼수록 따스함이 감돈다. 군중 속 외로움을 느끼는 INTP 동지들이 보면 좋을 거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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