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법정]⑭66년만에 "낙태, 범죄 아니다"…대안 4년째 '감감'

심언기 기자 2023. 1. 21. 09:1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66년만에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자기결정권 침해"
보수·종교계 눈치보며 '無法' 방치…갈길 먼 여성인권

[편집자주] 판결은 시대정신이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가치와 때론 나아 가야할 방향을 담고 있어서다. 우리 사회는 짧은 기간 압축적으로 성장하면서 여러 차례 격변기를 거쳤다. 이 때문에 1년 전에는 옳다고 믿었던 시대정신이 오늘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과거와 정반대의 판결이 많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건의 판례를 통해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짚어봤다.

낙태를 처벌하도록 규정한 형법 조항의 위헌 여부가 '헌법불합치'로 결정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입장발표를 마친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서로 포옹을 하고 있다. 2019.4.11/뉴스1 ⓒ News1 이재명 기자

(서울=뉴스1) 심언기 기자 = 낙태라 불리는 '임신 종결'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생명권 사이에서 끊임 없이 충돌해왔다. 낙태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수정된 순간부터 한 인간인 만큼 '낙태=살인'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낙태를 금지하는 것은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희생을 요구하는 강제적·폭압적 권리제약이라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법으로 임신 유지를 강제하면서 낙태는 수 십년간 음지에서 이뤄져왔다. 여성은 처벌의 위험과 생명의 위협을 감수해야 하는 이중고로 고통을 받아왔다. 여성·인권 의식 신장으로 사회적 공론화가 시작된 후에도 수 십년간 논쟁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낙태죄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2021년부터는 낙태죄를 처벌하는 법의 효력도 상실됐다. 하지만 여전히 따가운 시선이 존재하고 대체·보완입법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여성의 자기 몸에 대한 권리를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1953년 형법 제정과 함께 낙태 처벌 '대못'…헌재, 2012년엔 '합헌'

대한민국에서 낙태 처벌의 역사는 19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9월18일 제정된 형법 제269조 제1항은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낙태 시술자도 동일한 형에 처하고, 특히 의사·한의사·약제사 등 의료인이 낙태하게 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명시했다.

처벌에 대한 예외사유도 없이 엄격히 적용되는 법은 1978년 2월 모자보건법이 제정되며 일부 개선이 이뤄졌다. 유전적 장애·질환, 전염성질환, 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 임신 지속시 모체 건강을 해할 우려, 근친상간 등 사유로 임신된 경우엔 인공임신중절 수술을 제한적으로 허용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이 경우에도 임신한 날로부터 28주일 이내라는 단서 조항이 달렸다.

이후에도 인공임신중절 수술 사유에 관한 미세한 조정이 이뤄졌지만 큰 틀의 변화 없이 2020년까지 유지됐다. 2009년 모자보건법 시행령 개정으로 인공임신중절 수술의 허용 기간이 임신 28주에서 24주로 축소된 정도가 눈에 띄는 정도다.대한민국 법률 체계가 기틀을 잡던 초기부터 낙태는 죄로 규정돼 엄벌 기조를 유지한 셈이다.

이같은 골격을 60여 년간 유지해온 낙태죄에 대해선 2000년대 들어 반발 목소리가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여성계와 의료계를 중심으로 법률개정 요구가 터져나와 헌재의 문을 두드렸다. 2012년 8월23일 자기낙태죄 조항에 대한 헌법소원은 합헌 결정으로 매듭지어졌지만, 재판관 의견이 4(합헌)대 4(위헌)로 갈리며 달라진 시대상과 사회의식을 실감케 했다.

◇달라진 인권의식 66년만에 낙태죄 역사속으로…"여성자기결정권 침해"

2013년 11월부터 2015년 7월에 걸쳐 69회의 임신 중절수술을 한 혐의로 기소된 산부인과 의사 정모씨는 1심 재판을 받던 중 위헌법률심판제청을 신청했다. 2017년 1월25일 신청이 기각되자 같은해 2월8일 '자기낙태죄'와 '의사낙태죄'를 대상으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2년 2개월여 숙고 끝에 헌재는 2019년 4월11일 재판관 4(헌법불합치)대 3(단순위헌)대 2(합헌) 의견으로 위헌으로 판단했다. 1953년 낙태죄가 형법에 규정된지 66년 만이다. 법 조항 즉각 무효화에 따른 제도 공백을 우려해 헌재는 2020년 12월31일까지 관련 법률을 개정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2021년 1월1일부터는 낙태죄 처벌의 효력이 상실됐다.

헌법불합치 의견을 낸 유남석·서기석·이선애·이영진 재판관은 "태아가 모체를 떠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인 임신 22주 내외에 도달하기 전이면서 동시에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기 시기까지의 낙태에 대해서는 국가가 생명보호의 수단 및 정도를 달리 정할 수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또한 "자기낙태죄 조항은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고 있어 침해의 최소성을 갖추지 못하였고, 태아의 생명 보호라는 공익에 대하여만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함으로써 법익균형성의 원칙도 위반하였으므로,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하여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고 지적했다.

이석태·이은애·김기영 재판관은 자기결정권 침해임을 분명히 밝히는데서 한발 더 나아가 "이들 조항이 폐기된다고 하더라도 극심한 법적 혼란이나 사회적 비용이 발생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단순위헌 의견을 냈다.

반면 소수 의견을 낸 조용호·이종석 재판관은 "사회적·경제적 사유에 따른 낙태를 허용할 경우 현실적으로 낙태의 전면 허용과 동일한 결과를 초래하여 일반적인 생명경시 풍조를 유발할 우려가 있다"며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어느 정도 제한되는 것은 사실이나, 그 제한의 정도가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중대한 공익에 비하여 결코 크다고 볼 수 없다"고 합헌 의견을 냈다.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401회 국회(임시회) 제5차 본회의.2023.1.6/뉴스1 ⓒ News1 이재명 기자

◇낙태죄 효력 상실 후 '無法'…대체입법 손놓은 국회, 방치된 여성인권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에 여성·인권단체와 의료계, 변호사단체 등은 일제히 환영 입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1년8개월여 간 효력이 유지되는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른 혼란이 상당했다. 계류 중인 낙태죄 관련 재판은 물론 공소기관도 헌재 결정 이후 낙태죄 관련 처분을 두고 무혐의와 기소유예, 시한부 기소중지 등의 고육책으로 대응해야 했다.

더 큰 문제는 대체입법의 부재로 '무법(無法)'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헌재는 2020년 12월31일 이전 대체입법 마련을 주문했지만 입법부가 손을 놓으면서 보완입법은 감감 무소식이다. 정부가 내놓은 개정안 및 모자보건법 개정안 여러 건이 국회에서 장기간 계류 상태로, 처리 기약도 없다.

이는 선거를 의식한 국회의원 등 정치권과 정부의 처리 의지 빈약이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힌다. 보수층과 종교계에서는 생명권을 이유로 낙태죄 부활을 요구하는 목소리까지 터져나온다. 강경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헌법재판관의 이념 성향을 문제삼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같은 반발을 의식해 법안 개정 및 처리에 총대를 매는 이가 없다는 지적이다.

국회가 대체입법에 손을 놓고 정부도 의지를 보이지 않으면서 그 피해는 가임기 여성들이 오롯이 감내하고 있다. 현행 법규정 미비를 이유로 임신중지를 위한 약물은 식품의약품안전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임신초기 저렴한 비용으로 임신중지가 가능한 약품들이 다수 개발됐지만 식약처는 품목허가를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다.

결국 임신 상태를 종결하고 싶은 여성들은 효능이 확인되지 않거나 안전성을 담보할 수 없는 약품, 또는 외국에서 상용중인 약품을 음성적 경로로 구해야 하는 처지이다. 불법유통 약품이어서 부작용이 발생해도 보호받을 수 없고, 가격 역시 터무니 없이 비싼 현실이다.

정의당 한 당직자는 "법을 만드는 입법부가 본연의 책임과 의무를 방기하는 것으로서 즉각적인 법개정에 나서 더 이상의 피해자가 없도록 해야 한다"며 "최고권위의 헌법재판소 결정 취지에 부합하는 법규정을 서둘러 마련해 여성의 권리구제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eonki@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