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다

성한용 2023. 1. 2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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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한용의 정치 막전막후][한겨레S] 커버스토리
성한용 선임기자의 정치 막전막후 464
“정치 불신과 제왕적 이미지 강화”
‘○○○ 정부’라는 말이 만든 폐해
일러스트레이션 하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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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정 순헌철고순.”

학생 시절 생각나시지요? 다 아시다시피 우리나라 조선 시대 왕의 순서입니다. 그럼 이건 뭘까요?

“이윤박최 전노김 김노이박 문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성씨를 순서대로 나열한 것입니다. 정확히 써볼까요? 이승만-윤보선-박정희-최규하-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먼 미래에 역사가 됩니다. 후세의 사람들은 큰 사건이 터진 시기를 그 당시 대통령의 이름과 함께 기억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삼풍백화점은 김영삼 대통령 때 무너졌고, 세월호 참사는 박근혜 대통령 때, 이태원 참사는 윤석열 대통령 때 터졌다는 식이 될 것입니다.

MB 때부터 ‘대통령 이름+정부’ 호칭

본래 우리나라에는 정부 수립 이후 시대를 헌법에 따라 ‘공화국’으로 구분하는 방식이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시기를 1공화국, 4·19 혁명으로 1공화국이 무너지고 들어선 ‘윤보선 대통령-장면 총리’ 의원내각제 시기를 2공화국이라고 불렀습니다.

1961년 박정희 쿠데타로 2년간의 군사정부를 거친 뒤 1963년 개헌으로 들어선 박정희 대통령 시기를 3공화국, 1972년 유신헌법에 따라 6년 임기 종신 집권이 가능한 대통령에 선출된 박정희 대통령 시기를 4공화국이라고 불렀습니다.

1980년 전두환 쿠데타 이후 개정된 헌법은 7년 단임 대통령을 선거인단이 뽑도록 했습니다. 5공화국입니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국민이 5년 단임 대통령을 직접 선출하도록 헌법이 개정됐습니다. 6공화국입니다.

이처럼 헌법을 기준으로 시대 구분을 하면 지금도 여전히 6공화국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노태우 대통령부터 치면 여덟번째니까 6공화국 8기 대통령입니다. 언젠가 권력구조를 바꾸는 개헌이 이뤄진다면 7공화국이 되겠지요.

그런데 지금 이 시대를 6공화국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김영삼 대통령이 자신은 전임자인 노태우 대통령과 다르다고 차별화하면서 6공화국이라는 말 자체를 금기시했기 때문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8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대표 구호를 ‘군정 종식’으로 삼았습니다. 군 출신으로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전두환 대통령 시기를 ‘군정’으로 규정하고, 민간인 출신인 자신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1987년 대선에서 떨어진 뒤에도 ‘문민’을 자신의 정치적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1993년 대통령 취임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렇게도 애타게 바라던 문민 민주주의의 시대를 열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오늘을 맞이하기 위해 3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습니다. 오늘 탄생되는 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불타는 열망과 거룩한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자부심이 느껴지십니까?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이 이끄는 정부를 ‘문민정부’라고 불렀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이 이끄는 정부를 ‘국민의 정부’라고 명명했습니다. 대통령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부 수립 50년 만에 처음 이루어진 여야 간 정권 교체를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면서, 온갖 시련과 장벽을 넘어 진정한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킨 국민 여러분께 찬양과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인수위원회의 여론 수렴 과정을 거쳐 새 정부의 명칭을 ‘참여정부’라고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과 집권 과정, 그리고 21세기를 막 시작한 시기의 시대정신을 담은 이름이었습니다.

새로운 정부의 별칭이 사라진 것은 이명박 대통령 때부터였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실용주의를 강조한 대통령이었습니다. 새 정부의 명칭을 ‘실용 정부’로 하지 않고 ‘이명박 정부’로 정한 이유를 회고록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명칭을 놓고 논란이 있었다. 역대 대통령은 자신들의 정부를 스스로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라고 칭했지만, 임기 후에 국민들은 ‘김영삼 정부’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실용 정부’라고 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그냥 담백하게 ‘이명박 정부’라고 하기로 결정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본래부터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 정치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설명대로 대통령 이름 뒤에 그냥 정부라고 붙이면 담백한 것이 사실입니다. 정부 정책에 대한 대통령의 책임성을 분명하게 한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후 당선된 대통령들은 별다른 명칭을 짓지 않고 그냥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 윤석열 정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대통령 이름 뒤에 ‘정권’을 붙이는 경우도 있지만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 ‘전두환 정권’처럼 주로 독재 시대에 타도 대상으로 삼았던 경우입니다. 지금은 대통령에게 적대적인 사람들도 ‘문재인 정권’ ‘윤석열 정권’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 이름 정부’의 두가지 부작용

그런데 대통령 이름을 정부의 명칭으로 사용하면서 좀 이상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두가지입니다.

첫째, ‘제왕적 대통령’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제는 의회와 대통령이라는 두개의 권력을 각각 선출해서 서로 견제하고 협력하도록 만든 분립형 권력구조입니다. 총선 한번으로 하나의 권력을 창출하는 의원내각제가 융합형 권력구조인 것과 대조적입니다.

대통령제 원조 국가인 미국에서는 트럼프 행정부, 바이든 행정부라고 하지, 트럼프 정부, 바이든 정부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기도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삼권분립 체제의 행정부 수반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헌법에는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이름 뒤에 곧바로 정부를 붙일 수 있는 근거가 있습니다. 헌법 편제를 보면 3장 국회, 4장 정부, 5장 법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4장 정부 안에 1절 대통령, 2절 행정부가 있고, 2절 행정부 안에 1관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2관 국무회의, 3관 행정 각부, 4관 감사원이 들어 있습니다. 정부라는 단어를 입법, 행정, 사법 전체를 포괄하는 단어가 아니라 행정부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1948년 제헌 때부터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언젠가 개헌을 하면 4장의 제목을 정부가 아니라 행정부로 고쳐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둘째, 정치 불신을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21세기에 디지털 혁명, 모바일 혁명이 시작되면서 유권자들의 확증편향이 심해졌습니다.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이 찍지 않은 사람이 당선되면 그를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대선 불복’ 심리가 점점 더 퍼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면 오히려 그 대통령을 싫어하는 유권자들의 분노와 증오를 자극해서 정치 불신을 더 깊어지게 만드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문재인 정부라는 말 자체를 싫어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문재앙’이라고 불렀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윤석열 정부라는 말 자체를 싫어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성을 뒤집어 ‘굥’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제왕적 대통령과 정치 불신 부작용은 결국 정치 양극화를 부추겨 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약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선거 결과에 구성원들이 승복한다는 전제 위에 성립하는 제도입니다. 제왕적 대통령과 정치 불신 부작용은 “다음 대선에서 대통령만 바꾸면 정부의 정책이 바뀔 것이다. 버티면 이긴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시장 기득권 세력에게 줄 위험이 있습니다.

두가지 부작용이 아니어도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대통령이 바뀌었을 뿐인데 정부의 이름이 5년마다 바뀌는 것은 좀 이상한 일입니다.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문재인 정부, 윤석열 정부가 따로 있는 것일까요? 대통령이 바뀌면 정부가 바뀌는 것일까요?

대안은 우리도 미국처럼 문재인 행정부, 윤석열 행정부로 부르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바꿔 부르기 곤란하다면,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는 사람부터 바꿔 불러도 될 것입니다.

‘○○○ 행정부’라는 호칭의 가장 큰 장점은 삼권분립의 원리를 각인시키는 효과입니다. 대통령이 입법, 사법, 행정을 총괄하는 제왕적 대통령이 아니라, 행정부의 수반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국회나 법원이 대통령의 지배를 받는 기관이 아니라는 점을 국민에게 인식시킬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권한과 책임을 일치시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대통령이 야당과 협치를 통해 국회 입법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정책을 만들어내도록 유도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이름으로 만드는 5년짜리 정책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의 수십년짜리 정책을 만들 수 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장 이런 제안을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연초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이런 문답을 했습니다.

―2024년 총선은 윤석열 정부에 대한 중간 평가다. 그런 점에서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가 중요한데, 지금 당에서는 윤심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윤심은 뭔가.

“선거 때는 무슨 윤핵관이라더니, 대통령이 되니까 윤심 이런다. 제가 검찰에서 수사팀을 구성할 때는 이 수사를 성공시키는 데 가장 필요한 사람들을 뽑았지 옛날에 같이 일했다고 데리고 오는 경우는 없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총선에서도 여당이 다수당이 돼야 공약했던 정책을 차질 없이 할 수 있고, 그러지 못하면 거의 식물 대통령이 될 것이다. 결국 선거는 저의 2년 동안의 일에 대한 평가이자 앞으로 얼마나 일을 잘할 것이냐에 대한 기대다. 결국은 국민한테 약속했던 것들을 가장 잘할 사람들과 함께 가야 한다. 여의도 정치를 내가 얼마나 했다고 거기에 무슨 윤핵관이 있고 윤심이 있겠나.”

아시겠습니까? 윤석열 대통령은 2024년 4·15 국회의원 총선거에 대해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총선에서 이기면 공약했던 정책을 차질 없이 할 수 있고, 지면 거의 식물 대통령이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진실은 총선에서 이겨도 공약했던 정책을 차질 없이 할 수 없고, 총선 승패와 관계없이 야당과 협치하지 않으면 식물 대통령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리 어려운 얘기가 아닙니다.

첫째, 전례가 있습니다.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했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제출한 법안이 모두 국회를 통과하지는 못했습니다.

둘째, 국회 선진화법과 국회 관행이 있습니다. 국민의힘이 총선에서 이겨도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을 민주당에 양보해야 합니다. 민주당이 마음만 먹으면 윤석열 대통령이 제출하는 법안을 임기 말까지 가로막을 수 있습니다.

‘야당 외면’ 태도 이제라도 바꿔야

마무리하겠습니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입니다. 대통령 개인의 리더십으로 국정을 이끌어갈 수 없습니다. 대통령과 국회, 여당과 야당이 협치로 국정을 함께 이끌어가야 한다고 인식을 대폭 전환할 때가 됐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023년 새해 첫 행사로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의 지역구인 켄터키주 코빙턴을 방문해 초당적 법안 처리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대통령 취임 뒤 8개월이 넘도록 야당과의 대화를 외면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이 좀 보고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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