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한국인, TSMC는 대만인” [민족주의로 쪼개진 반도체①]
[헤럴드경제=김지헌·김민지 기자] “반도체 제조와 같은 핵심 기술에 대해서는 외부 유출 가능성 때문에, 아무래도 인재들의 국적을 따져 채용하는 흐름으로 갈 가능성이 있습니다.”(이창한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근부회장)
“톱 인재들은 드물어요. 그러니 자국 인재가 자국 기업으로 회귀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죠. 동양권은 여전히 모국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할 분위기도 되고요.”(반도체 장비 업체 고위 관계자)
흔히 글로벌 기업에 ‘국적’이 없다고 한다. ‘다양한 국적의 인재가 모여 창의적 성과를 낸다’는 것이 대중의 뇌리에 박힌 글로벌 기업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반도체 설계·제조와 같은 핵심 기술에 점차 ‘국적’이 인재 채용의 중요한 바로미터로 자리잡아 가는 모양새다. 소위 ‘핏줄’이 글로벌 기업간 총성 없는 전쟁의 새로운 인계철선으로 부각되고 있다. 실제로 반도체 칩 인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삼성전자는 한국인, TSMC는 대만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이 비중이 점차 높아지는 추세마저 감지된다.
특히 인텔, 퀄컴, 애플 등 글로벌 기업으로 떠나갔던 인재들이 역량을 쌓은 뒤 최근 한국이나 대만의 자국 기업으로 회귀하는 흐름이 거세지고 있다. 반도체 업계에선 이같은 경향이 앞으로 더 강화될 것으로 내다본다.
최근 삼성전자의 주요 기술 임원으로 글로벌 칩 기업 출신 한국인들이 속속 영입되고 있다. 특히 파운드리(반도체 칩 위탁생산) 사업이 삼성의 미래 먹거리로 부상하면서, 글로벌 칩 기업에서 3~20년간 근무한 인재들의 수혈에 속도가 한층 붙은 모습이다.
삼성은 글로벌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1위 기업인 퀄컴과 대만 등 기업에서 수년간 경력을 쌓은 윤세승 부사장을 지난해 상반기 삼성 파운드리 디자인 플랫폼 개발실 담당임원으로 영입했다. 삼성의 경우 글로벌 1위 파운드리인 TSMC의 시장 점유율을 빼앗기 위해 고객사 유치가 절실한 상황이다. 이를 위해 고객사에 편의를 제공하는 칩 서비스가 필요한데, 윤 부사장 영입을 통해 고객사에게 훨씬 수월한 작업 플랫폼을 구축해 줄 수 있을 것으로 업계는 내다보고 있다.
인텔에서 21년간 경력을 쌓은 극자외선(EUV) 전문가 이상훈 부사장 역시 지난해 8월 삼성에 영입돼 차세대 파운드리 공정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EUV 활용 기술은 7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이하 첨단 미세 공정을 진척시키기 위한 핵심 기술로 평가된다.
최첨단 칩 경쟁이 진행되면서 미세화뿐 아니라 패키징 기술의 중요성 역시 부각되고 있다. 삼성은 지난해 7월 반도체 후공정 분야 강화를 위해 미국 패키징 솔루션 센터를 설립하고 텍사스인스트루먼트(3년), 퀄컴(3년), 애플(7년) 등에서 이력을 쌓은 김우평 부사장을 센터장으로 영입했다.
설계 역량 역시 무시 못할 요소다. 최근 삼성은 애플 아이폰에 대항하기 위해 갤럭시 관련 MX(모바일경험)사업부 내에 새로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솔루션개발팀을 만들며 AP아키텍처그룹을 구축했다. 이 그룹에서 갤럭시 전용칩의 개발을 이끌 인물로 아이폰 AP의 코어를 설계하는 등 애플에서만 12년간 근무한 이종석 상무를 영입했다. 메모리 부문 주요 임원 역시 인텔에서 수년간 경험을 쌓은 한국인들이 지속적으로 영입되고 있다.
글로벌 파운드리 1위인 대만 TSMC도 마찬가지다. TSMC는 대만 정부가 전체 지분의 6.4%를 보유하고 있다. 반도체가 국가 핵심 전략 산업인 만큼, 인재 ‘국적주의’에서 더욱 자유로울 수 없다.
TSMC의 ‘2021년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주요 임원급 29명 중 23명이 대만 국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국적을 가진 나머지 6명 임원도 상당수가 대만계 미국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TSMC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는 릭 캐시디를 제외하면, 모두 동양계다.
한국·미국·일본 등에 법인을 둔 글로벌 기업이라고 하지만, 결국 주요 리더급 임원들은 모두 뿌리를 대만에 둔 뼛속까지 ‘대만인’인 것이다.
반도체 차세대 기술을 전담하고 있는 TSMC 연구개발(R&D)부문의 경우, 대만 국적의 웨이 젠 로 전무와 Y.J. 미 전무가 진두 지휘하고 있다.
이들 주요 임원 상당수가 다른 글로벌 반도체 기업에 근무하다 TSMC로 돌아온 것으로 분석된다. 예를 들어 현재 TSMC R&D 부문 ‘집적 상호연결·패키징(IIP) 조직장’을 맡고 있는 K.C. 슈 상무는 미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에 근무하다 지난 2021년 11월 합류했다. 준 헤 상무는 TSMC에 입사했다가 인텔로 이직한 후 지난 2017년 다시 TSMC로 되돌아 온 사례다. 제프리 입 상무도 TSMC에서 퀄컴으로 옮겨 상무 자리까지 올랐다가 지난 2016년 복귀했다.
인텔, 퀄컴 등의 이력을 가진 임원은 많지만, 삼성 출신은 없다는 점도 흥미롭다. 업계 관계자는 “TSMC와 삼성 각각 대만과 한국 경제의 주축을 맡고 있는 회사고, 워낙 경쟁 구도가 치열하다보니 임원급으로 가기에는 다소 눈치가 보이지 않겠냐”며 “삼성 실무자들도 인텔이나 애플, 퀄컴으로는 이직해도 TSMC로는 가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임대근 한국외대 대만연구센터 센터장은 “대만인들의 상당 부분이 혈연관계를 중시하고, 동시에 대륙으로의 기술 유출을 우려하는 경향이 클 것으로 보인다”며 “TSMC 주요 책임자들을 자국인 중심으로 채우려는 흐름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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