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회화로 보는 '사라진' 서울, '사라질' 서울
초이앤초이, 을지로 담는 정재호展 '나는 그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서울=뉴스1) 김일창 기자 = 이미 '사라진 곳'과 현재 '사라져 가는 곳'이 있다. '사라짐'은 영원한 것은 아니다. 본질, 즉 '땅'은 그대로다. '또다른 것'이 채워질뿐, 본질은 그대로니 추후 새로운 풍경만 마주할 뿐이다. '새로워진 곳' 이전의, '새로워질 곳' 직전의 풍경을 각각 사진과 회화로 기록한 작품들의 전시가 서울대미술관과 초이앤초이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들은 다큐멘터리 사진과 정통회화로 '재개발' 현장을 기록했지만, 흔히들 아는 연민과 아픔, 향수, 정치적 수사라는 통상적인 관념은 최대한 빼냈다. 사람이 일하고, 사는, '있는 그대로'의 터전을 담담하게 표현할뿐이다.
◇ '뮈에인, 내 마음속의 오목렌즈'…필름에 담긴 옛서울
서울대미술관은 오는 3월5일까지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서울 재개발 예정지 곳곳을 담은 사진 196점을 선보이는 '뮈에인(myein, 신성하게 하다), 내 마음속의 오목렌즈' 전시를 진행한다.
KBS 출판사진팀장 출신인 김정일 사진가는 "1982년 신문 지면에 40여개의 개발지구가 발표됐다"며 "투기의 시작이며 빈부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 시발점으로, 이 신문 쪽지를 가지고 한 군데씩 지워가며 촬영을 다녔다"고 말한다.
김정일 사진가의 말처럼 우리 사회는 개발지구 발표, 부동산 투기, 빈부의 격차 증대 등 도시재개발을 거치며 공동체적 이웃 개념을 잃어왔다.
공간을 보는 시선의 저온화, 삶의 장소를 '누추한 환경'이나 '저소득층의 주거'로 잘못 계층화하고 기억에서 삭제하는 인지적 자학이 이번 전시에서 마주하는 진실의 한 자락이다.
삶의 장소를 자원과 재개발보다 하위에 둠으로써 한국인은 신적인 것, 곧 신성하게 하기에서 분리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전시는 이제 과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포함하는, 더 넓은 전망(展望)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근시안을 교정하기 위해, 우리 마음속 오목렌즈의 배율을 더 높게 하자고 제안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촬영 시기로는 1982년 촬영한 김정일 작가의 기억 풍경 연작 53점이 가장 앞선다. 1980년대 중반 임정의 작가의 사진 36점을 그의 방대한 아카이브에서 엄선해 이를 전후한 그의 대표작 6점과 함께 선보인다.
최봉림 작가의 1990년 봉천동 출사 작업 65점은 이번 전시를 통해서 대중에게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김재경 작가의 '뮤트'(mute) 연작 32점은 1999년 세기말의 서울을, 또 그 후속 작업인 '뮤트2' 4점은 2000년대 서울의 시공간을 보여준다.
상업광고 사진의 활황기 속에서도 카메라를 들고 일명 달동네를 홀로 촬영한 이 네 명의 사진가들의 작업은 과거에 대한 관습적인 노스탤지어 대신 시각적 명쾌함을 통한 우리 사회의 큰 이슈에 대한 주체적 사유를 불러일으킨다.
도시인구 비율이 곧 90%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되는 한국사회, 지금까지는 공간을 얻기 위해 장소를 쉽게 없애버렸다면 이제 도시를 장소로 만들 실천적 삶이 필요하다고 전시는 말한다.
◇ '나는 그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하나씩 부서져 가는 '노년의, 젊은이의 성지'
서울 종로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인 세운상가가 있다. 1968년 완공돼 올해 나이 '55세'다. 언제 들어선지 알 수 없는, 세운상가만큼 오래된 낮은 건물들이 세운상가를 둘러싸고 있다. 한때 서울의 대표적 낙후지역인 이곳은 몇년 전부터 카페와 레스토랑이 들어서고, 또 기존의 노포들이 어우러지면서 젊은이들의 성지가 됐다.
현재 재개발이 한창이다. '어떤 곳'(예지동)은 이미 통째로 사라졌다. '또다른 어떤 곳'은 통째로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다.
화가 정재호는 지난 몇 년간 세운상가 등에 올라 그 주변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세운상가를 오르고 또 올라 이미 통째로 사라져 버린 곳의 '마지막'을 남겼다. 그리고 마지막이 될 지 모르는 '또다른 어떤곳'을 그렸으며, 그곳들을 찾고 있다.
세운상가 5층 데크에서 서쪽을 바라본 장면은 눈이 그칠 무렵의 풍경과 비 오는 여름 오후의 풍경으로 그렸는데 서로 다른 '적막함'을 담고 있다. 대림상가의 동쪽에 있는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을지로의 전망은 늦가을 해가 뜰 무렵 풍경으로 다시 그렸다. 지난해 12월 새로 발견한 대림상가의 외부 계단에 올라 폭설이 내리는 풍경을 더 높은 시점에서 조망한 그림은 이번 작업의 마지막 그림이 됐다.
정재호는 "실제로도 이 장소는 철거되는 운명 속에서 더는 그릴 수 없는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번에 그린 그림들은 그런 절박함 속에서 마치 시간과 운명을 놓고 경주하듯이 그린 것"이라고 회상했다.
정재호는 그렇다고 이곳을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연민, 그리움 등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으레 재개발 현장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때로는 엿보고, 때로는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정치적 함의도 전혀 없다. 본 그대로, 있는 그대로 그릴 뿐이다.
"서울에 자꾸 옛것이 사라지고 재개발되니까 이를 다룬 다큐멘터리나 사진, 그림 등을 보면 투쟁적으로 그려지는 게 있다. 그런데 그런 거 말고 그냥 눈도 오고, 비도 올 때의 모습, 그래서 그 장면이 감수성으로 펼쳐지기도 하고 따뜻하게 펼쳐지기도 하는 여러 모습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갖는 편안함 등을 그냥 보여줘야겠다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이걸 본다'는 것을 지워버리고, 그냥 다 지워버리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기 위해 정재호는 더한 노력을 기울였다. 정재호는 "어떤 풍경을 반복적으로 그리게 됐을 때 그 풍경은 더욱 잡을 수 없는 것이 된다"라며 "마치 가까운 사람의 얼굴일수록 정확하게 재현할 수 없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어 "풍경의 세부들을 알아갈수록 그것이 하나의 인상으로 환원될 수 없음을, 결국은 그 세부들을 모두 다시 그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과 같다"고 덧붙였다.
작품 속 풍경은 더는 실재하지 않는다. 점점 더 과거 속으로 멀어져 가는 풍경을 마주하는 작가에게 이 장소와 함께한 자신의 몇 년은 어느새 을지로에 스며들어 어딘가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초이앤초이는 정재호의 을지로 풍경을 모은 전시 '나는 이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How long have I been here)를 오는 2월25일까지 연다. 전시명은 정재호가 20여년 전 그린 한강 부근의 풍경화에서 따온 것이다. 회화를 통해 기억을 되살리고 과거에 파묻힌 것들을 재발굴하는 작가는 여러 해를 함께 해온 그 풍경에 애도를 표하며 과거로부터 지속되어 온 자신의 마음을 다시 바라본다.
icki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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