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키즈존 논란 그후] ④"유리창에 낙서해도 돼"…홍제동 '웰컴키즈존'
어린이 손님 덕에 매출 늘고, 아이들은 공공예절 배워 '상부상조'
(서울=연합뉴스) 이상서 기자 정한솔 인턴기자 = '어린이 손님 환영해요', '반려견과 어린이 손님 모두 반가워요'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일대 상가에선 이런 포스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2년 전 이 동네에 일러스트 작업실을 차린 윤나리(39) 작가의 작품이다.
3살 아들을 둔 윤 작가는 지난해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아 포스터를 제작했다. 그림 속 캐릭터는 아들 '마꼬'(별명)와 반려견 '포카'를 본뜬 것이다. 작품을 완성하자마자 트위터 등 온라인에 무료 배포했지만, 오프라인으로 확대하기까지는 약 2개월을 고민했다고 한다. 발품을 팔아 포스터를 나눠주기엔 힘이 많이 드는 데다 상인들의 거절도 걱정됐기 때문이다.
"작업실 주변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혹시 여기 아이 데려올 수 있는 곳인가요?'라고 물어보고, '그렇다'고 하면 포스터를 드렸어요. 다행히 대부분 반겨주시면서 가게 앞에 부착하신 것 같아요. '어린이 손님은 받고 싶지 않다'며 거절하신 사장님은 딱 한 분밖에 없었습니다."
'출입금지' 대신 장난감으로 아이들 관심 사로잡아
'노키즈존' 운영을 두고 찬반 여론이 꾸준히 이어지는 가운데, 어린이 손님과의 공존을 택한 윤 작가를 비롯한 홍제동 사람들의 '웰컴키즈존 실험'은 일단 성공적이다.
지난 10일 오전 찾은 윤 작가의 작업실과 인근 식당 3곳에도 '어린이 손님 환영해요' 포스터가 부착돼 있었다. 작업실 오른쪽에 자리 잡은 우동 가게도 그중 한 곳이다.
우동 가게 사장 엄광현(48) 씨는 웰컴키즈존 운영에 대해 "특별히 어린이 손님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하진 않았다"며 "이 가게에 오는 분들은 모두 우리 손님이고, 그중에 어린이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엄 씨의 식당은 어린 자녀를 둔 부모 사이에서 유독 평이 좋다. 아기 전용 의자부터 유아용 식기, 피겨(모형 장난감)와 퍼즐까지 마련해뒀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아동 친화적인 환경이 조성된 것은 아니었다. 어린이를 동반한 손님과 그렇지 않은 손님 모두 편하게 식사하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장난감을 하나씩 들여놨다. 7세 미만의 유아는 고양이 피겨를, 7세 이상의 아동은 두뇌를 써야 하는 와이어 퍼즐을 선호한다고 한다.
남편 엄 씨와 함께 일하는 김정은(53) 씨는 "장난감은 아이가 5∼10분 한 곳에 몰입하는데 효과적인 도구"라며 "아이가 가게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뛰어다니는 건 지루하기 때문인데, 놀거리를 던져주면 자리에서 조용히 집중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유리창 전용 펜인 글라스 마카는 나이를 불문하고 가장 인기가 많다. 가게 유리창 한 면이 2∼3일 정도면 어린이 손님이 끄적인 그림과 글씨로 가득 찬다고 한다.
엄 씨는 "스케치북에 그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며 "집에서는 벽에 함부로 낙서를 못 하는데 여기서는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 아이들이 정말 좋아한다"고 전했다.
최근에는 단골 어린이 손님 덕분에 장사하는 보람까지 느꼈다고 한다. 1년 전 미니우동만으로도 배부르게 먹던 아이가 얼마 전부터는 한 그릇을 말끔히 비웠다는 것이다.
엄 씨는 "어린 친구들이 점점 커가는 걸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며 "이런 손님을 어찌 거절하겠냐. 앞으로도 계속 환영할 것"이라고 했다.
이병호 덕성여대 유아교육과 교수는 "성인 중심으로 설계된 공간에서 아동은 지루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며 "장난감이나 색연필 등 손에 쥘 무언가가 있다면 아동의 주의를 끌 수 있어 미국의 많은 식당에서도 이런 물건을 마련해둔다"고 전했다.
웰컴키즈존 덕에 상인·부모 모두 '웃음꽃'
상인들은 웰컴키즈존이 도덕적인 가치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매장 운영에도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윤 작가의 포스터를 매장 입구에 내건 중식당 사장 김혜경(38) 씨는 "특정 연령층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매장이 아니라면 어른·아이 가리지 않고 받는 것이 매출에도 이득"이라며 "아이가 소란을 피우거나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보호자와 직원이 더 주의를 기울이면 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식당 사장 A씨도 "나이와 상관없이 한 명 한 명이 다 음식을 팔아주는 분 아니냐"며 "아이들이 오면 우리도 수입이 늘어나는데 굳이 손님을 가려 받을 이유가 없다"고 밝혔다.
어린이 손님을 환영하는 가게가 하나둘씩 늘자, 누구보다 반색한 쪽은 바로 양육자들이다.
5살 아들을 둔 홍제동 주민 박혜윤(42) 씨는 "식당에서 아이가 인테리어 소품을 궁금해하면 (주인이)꺼내서 만질 수 있게 해주고, '눈치 보지 말고 아이 속도에 맞춰 천천히 드시라'고 말해주신다"며 "지나가는 곳마다 (윤나리) 작가님이 만든 포스터가 붙어있으니 아이를 데리고 마음 편히 입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아이가 공공예절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도 있는 게 웰컴키즈존의 큰 장점이라고 입을 모았다.
세 딸을 키우는 같은 동네 주민 류빛나(35) 씨는 "외출하기 전 자녀에게 꼭 '우리가 가는 곳은 이런 곳이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 따라 하라'고 일러준다"며 "실제로 매장에 가면 아이들이 주변을 관찰하고 공공장소 예절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그는 "아동이 소리 지르며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전용시설만큼이나 모든 연령대가 어울리는 공간이 필요한 이유"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홍제동 사례처럼 공감과 이해를 밑바탕에 깔고 아동 친화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이병호 교수는 "장사가 잘되길 바라는 가게 주인을 비롯해 조용한 식사를 원하는 고객, 아이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부모 손님, 에너지를 분출하려는 아이 등 한 공간에서 상충하는 각자의 욕구가 있다"며 "이를 서로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이 갈등 해결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hansol@yna.co.kr
[글 싣는 순서]
①방학때 아이와 간 카페가 하필 '아동 출입금지'
②"꼬마 손님 돌려보낸 주인 맘은 편했겠어요?"
③영업자유 vs 차별행위…해법은 '상대방 존중'
④"유리창에 낙서해도 돼"…홍제동 '웰컴키즈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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