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넘나드는 옥수(玉手)에 흩어지는 흑발’…여학생 출신 부인 이발사의 탄생
‘수표교 다리에서 대관원을 향하여 조금을 나가랴면 서편으로 XX이발관 이라는 간판을 붙은 적은 중에도 아담한 맵시 있는 집이 있으니 그 집이 바로 조선 최초의 여자 이발사인 정(鄭)씨라는 꽃 같은 부인이 그의 남편과 더불어 한편으로는 직업의 전장(戰場)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의 보금자리를 꾸미고 있는 세상에도 재미있는 스위-트홈인 것이다.’
1926년 마지막날 밤, 이색 직업을 소개하기 위해 기자가 이발소를 찾았다. ‘조선의 첫 여자 이발사’가 일하는 이발소였다.’대관원’은 1910년대에 개업한 중국 식당으로 비교적 저렴하고 맛있는 곳으로 소문난 곳이었다. 남편 배씨와 함께 이발소를 운영하는 스물아홉살 정씨는 여학교에 다니다 도중에 학업을 중단하고 결혼한 ‘모던 걸’이었다. 남편을 도우며 이발 기술을 배워 여성 이발사로 활약하는 중이었다. 1927년 신년 기획 ‘색다른 직업 로만스’ 3번째로 실린 이 기사 제목은 ‘넘나드는 옥수(玉手)에 흩어지는 흑발(黑髮)’(조선일보 1927년 1월4일).
당시 일반 요금은 20전, ‘하이카라’는 30전을 받았는데, 하루 평균 수입이 5,6원 정도라고 했다. 설렁텅 한 그릇에 10전씩 하던 시절이었다. 남편 배씨는 아내 자랑을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데 참 사람의 마음이란 우스운 것이야요. 똑 같은 사람이 이발을 해주지만 그 전에는 하루에 불과 10여명밖에 아니되던 것이 지금은 그의 배가 되는 20명이 훨씬 넘습니다, 그려. 아마 여자이발사라는 것이 굉장히 인기를 끄는 모양이에요.’
옆자리에서 손님 머리를 손질하던 정씨는 남편 말이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에그머니, 무엇이 그래요’하며 남편을 흘겨보았다.
◇황제 전용이발사는 농상부 주사 출신 안종호
경성의 이발소는 1895년 단발령과 함께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농상부 주사 출신 안종호(安宗鎬)가 1896년 기술을 배워 황제 전용 이발사가 됐다고 한다. 한국인이 차린 이발소는 1901년 유양호가 인사동 조선극장 터에 개업한 ‘동흥이발소’가 처음이라고 한다. 그후 세종로 네거리 비각(碑閣) 모퉁이로 자리를 옮겨 ‘광화문 이발관’을 개업했다.이어 유양호 친척인 유강호가 두남이발관을 개업해 고위 관료들이 드나드는 고급 이발관으로 키웠다고 한다. 1924년 신문 기사를 살펴보면, 종로 우미관에서 불이나 근처의 두남이발관이 전부 타버렸다는 기사가 나온다.(’우미관 全燒', 조선일보 1924년5월22일)
안종호도 광화문 근처에 태성이발소를 열었다. 1905년엔 ‘최신이발관’ ‘중앙이발관’이 문을 열었다.
◇‘개화당 제작소’로 통하기도
안종호는 1930년 매일신보 인터뷰에서 이발사 생활 25년을 회고했다. ‘나는 본시 농상부 주사로 있다가 면관이 된 이후 할 것이 없던 차에 우연히 이발소 하는 친구의 집에 놀러간 것이 시초가 되어 거의 30년 동안이나 이용업을 계속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 조선에 있는 이발소라고는 서울에 단지 네군데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25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 전 조선에 약 3000군데의 이발소에 1만4000명의 이용사가 이용영업으로 밥을 먹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감개무량합니다.’( ‘개화당제조소’, 매일신보 1930년5월2일)
처음에는 머리깎은 사람만 보면 ‘개화당’이라고 손가락질했다고 한다. 이발소는 자연히 ‘개화당 제조소’로 통했다. 안종호는 초기 이발소 풍경을 회고하면서 ‘머리를 깎으러 와서 상투를 잘리고 엉엉 통곡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머리를 깎으러 왔다가 완고한 아버지가 쫓아와서 반은 깎고 반은 깎지 않은 머리를 붙들고 도망을 하는 일이 하루에도 몇번씩 있었다’고 했다.
안종호는 1913년 ‘이발기술학습회’ 설립에 나선 주도자로 윤양훈 조성원 등과 함께 ‘매일신보’에 나올 만큼, 초기 이발업계 대표주자였다. 1926년 순종 장례식 때 봉도단에 참가할 상민대표단 45개단체 중 경성이발업조합 대표로 이름이 올랐다.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 이발소 경쟁
일제 때 조선인 이발소는 일본인과 중국인 이발소와 경쟁했다. 민족별로 조합도 따로 결성했고, 요금도 달리 받았다. 1915년 일본인 이발소는 상등 25전~30전, 중등 20~25전, 조선인 이발소는 상등 20전, 중등 15전, 하등 10전을 받았다. 그러다 중국인 이발소가 더 싼 요금을 받으면서 일본인과 조선인 손님이 중국인 이발소에 몰렸다. 그러자 요금 인하 경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 일본, 중국인 이발소의 요금 경쟁은 1920년대에도 되풀이됐다. 총독부 연감에 따르면, 1919년 당시 전국의 이발소 숫자는 2089개로 조선인 1423개, 일본인 634개, 중국인 32개였다.
이발료는 목욕탕료와 함께 당시에도 물가 통제의 주요 항목이었던 모양이다. 경찰서는 이발료가 치솟을 때마다 개입해서 요금 인하를 유도했다. 이발료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당국은 1923년 1월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 별로 조직된 이발조합을 하나로 통일시켰다. 일제 당국은 그해 이발사 자격 시험을 실시하면서 면허가 없으면 이발소를 개업하지 못하도록 단속했다. 이용사 자격시험은 조선인은 일본어로 치르고, 중국인은 중국어로 치르게 했다가 1925년에 들어서면서 중국인도 일본어로 시험을 보게했다. 이 때문에 일본어를 모르는 중국인은 자격시험을 치르지 못해 면허를 취득하지 못하게 됐다. 중국인 이발소가 쇠퇴한 이유다.
◇'이발소 안락의자처럼 불편한 의자는 없다’는 작가
소설가 겸 평론가 엄흥섭(1906~?)은 수필 ‘이발풍정(風情)’(조선일보 1936년7월5일)에 ‘이발소의 안락의자처럼 불편한 의자는 다시 없다’고 썼다. ‘생리적으로나 뼈나 살이 어디에 닿아서 아파서가 아니라 시간적으로 심히 구속을 받아 따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더워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여름의 이발소는 다른 계절보다 훨씬 사람이 많이 들끓는다. 이 의자 저 의자 머리 깎는 사람들의 물결을 헤치고 이발사의 안내로 한 귀퉁이 의자에 올라 앉으면 어느 틈에 등뒤에서는 선풍기가 쇄-하고 돌아가기 시작한다. 이발소의 선풍기는 대개 이동식 장치로 되어 새로 들어온 손님에게 써-비쓰를 하는가 하면 등에 땀도 식기 전 벌써 저편짝 의자로 방향을 옮겨버린다.’ 엄흥섭은 ‘이발소의 선풍기는 일종의 장식용에 가깝지 작열(灼熱)에 땀이 끓어오른 손님에게 그다지 흡족한 바람을 내뿜어주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엄흥섭이 소개한 1936년 당시 이발료는 35전이었다.
◇서울 미래유산된 성우, 문화이용원
서울시는 2013년 ‘성우이용원’과 ‘문화이용원’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서울미래유산은 서울 사람들이 근현대를 살면서 함께 만들어온 공통의 기억 또는 감성으로 미래세대에 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무형 유산을 모은 것이다. 서울시가 2013년부터 선정해온 미래유산은 올 초 교보문고 광화문점, 명동교자 본점 등 4곳이 추가되면서 모두 505개가 선정됐다. 서울 미래유산 중 이발소는 단 두곳뿐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이 지난달 펴낸 ‘서울의 이용원’은 이 두 이발소를 조사하고 인터뷰한 기록이다.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e북으로 펼쳐본 옛 이발소 사진과 이발 도구, 간판이 기억의 실타래를 툭 건드린 탓에 꼼짝없이 다 읽고 말았다. 1940년대부터 한 자리를 지킨 혜화동 로터리 근처 문화이용원은 2022년 4월부터 지덕용 이발사가 건강 문제로 휴업중이다. 1927년 개업한 서울 만리재 고개의 ‘성우이용원’은 창업주 서재덕과 사위 이성순을 거쳐 이성순의 다섯째 아들 이남열(74)까지 3대가 같은 장소에서 운영하고 있다.
◇참고자료
서울의 이용원, 서울역사박물관,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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