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저 말고, 젊은 세대에 맡겨라 [한국이 갈 길: 원로에게 묻다]
편집자주
2023년 대한민국 국력은 교차점에 있다. 과거의 성취를 모은 오늘의 국력은 단군 이래 정점에 섰다. 그러나 잠재성장률, 인구통계, 사회갈등 등 현재의 변화를 추적하면 미래는 암담하다. 성취를 지키고 밝은 미래를 유지하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원로 5인의 냉정하지만 따뜻한 조언을 5회에 나눠 소개한다.
김병익(85) 문학과지성사 상임고문은 역시 어른이었다. 세월 속에 어쩔 수 없이 쇠약해짐에 스스로는 비애에 잠길 망정, 자기 밖 세상은 따뜻하게 바라보고 여느 때처럼 큰 희망을 걸고 있었다. 겨울비 속에 나무 지팡이 짚고 느린 걸음으로 일산의 한 카페에 들어선 김 고문은 “생각의 속도가 예전 같지 않고 ‘노인의 비애’를 부쩍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2시간 가까이 이뤄진 인터뷰 내내 “젊은 세대와 한국의 미래는 희망적”이라고 강조했다. 다만 제 역할에서 벗어난 우리 정치권과 언론에 대해서는 성찰과 분발을 당부했다. ‘균형감 있는 보수주의자’로 통하는 김 고문이 후배들에게 들려준 조언을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한다.
_코로나 시국에 어떻게 지내셨는지.
“생각도 잘 돌아가지 않고 말도 자꾸 더듬게 된다. 자꾸 회상에 잠기는데, 주로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이다. 회상의 주제는 최근이나 한창 때 일보다는 초등학교 혹은 중학생 때 일이다. 막상 인터뷰 약속을 잡고 난 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하나 걱정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요즘 시대상과 관련, 내가 말해줄 게 거의 없는 것 같다. 차 한잔 마시면서 편하게 세상 얘기를 하겠다는 심정으로 나왔다.”
_우리 사회 ‘어른’으로서 세대 단절에 대해 말씀해주신다면.
“세대 간의 거리감을 제일 많이 느끼는 나라가 우리나라가 아닐까 싶다. 내가 태어난 시대는 식민지 시대다. 해방, 6·25전쟁, 4·19, 5·16, 유신을 거치며 탄압과 억압, 혼란, 저항의 시절을 보냈다. 1990년대 들어서야 사회가 안정되고 민주화도 이뤄지고 경제적 여유도 찾았다. 내게 손녀가 있는데, 1990년대 중반 태어났다.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한국에서 학교 다녔으니, 나와는 환경이 전혀 다르다. 할아버지 세대가 경험한 어려움, 혼란, 억압감을 느낄 수 없고 그래서 감정의 생성 조건 자체가 나와 다르다. 내 얘기를 요즘 젊은 독자들이 이해는 할지언정 적응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_원로 대담에서 요즘 세태를 ‘예의 없는 사회’라고 개탄하셨다.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다면.
“국민 일반은 안정되고 수준도 높아지고 예의도 차리게 됐는데, 지도자라고 할 만한 정치인들이 잔망스럽다고나 할까, 품위가 없어졌다. 지도자부터 품위와는 멀어지는 꼴들을 많이 보게 된다. 한 세대 전의 ‘3김씨’(김영삼ㆍ김대중ㆍ김종필)는 박정희 시대로부터 극복하는 과정에서 서로 경쟁하면서도 상호 존중하고 의견을 받아들였다. 요즘 정치인들은 국가의 방향성이나 정책이 아니라, 정치 지도자 부인네들이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옷을 입었는가에 더 매달리는 것 같다.”
_언론도 그에 대해 자유롭지 못한 측면이 있다.
“나도 그런 부분에서 신문을 좀 비판적으로 본다. 언론이 그런 묘사들은 피해줘야, 국민들도 정치인과 지도자들을 존중하지 않을까 싶다. (정치 지도자) 부인들이 어쩌니저쩌니하는 속물적인 보도가 나오면, 그게 정치의 진면목인 것처럼 잘못 전달된다. 이 부분에서 언론계 탓을 하고 싶다. 언론도 지도자로서의 마땅한 표정이나 화법이 아니라면, 그걸 가려주는 포용이 필요하다.”
_사실 보도가 중요하다고 반박하는 분들에게는 어떻게 말씀하실 건가.
“사실 보도, 언론 자유가 중요한 건 맞다. 그러나 그 자유에는 예의와 품위란 게 필요하다. 정치 지도자의 부인 이슈를 갖고 이렇게 화제를 삼은 적은 별로 없었다. 그건 양식으로 판단할 문제지, 옳고 그름이나 자유와 억압 그런 기준으로 따질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있는 걸 그대로 다 밝히는 게 언론의 사명이라지만, 가려야 할 건 가려주고 또 그런 사실이 있음에도 그냥 없는 것처럼 배려해주는 건 언론의 양식이다. 우리 사회 전반적으로 그런 분노와 경멸, 할큄의 정서가 강한데 그런 것이 자유이고 진실인 것처럼 오해하는 것 같다. 정치 지도자와 관련, 존중해줘야 할 부분에 대해서는 관용이라고 할까 못 본 척하는 부분도 필요하다.”
_평소 젊은 세대에 대해 자주 기대감을 드러내셨다. 2년 전 인터뷰에서는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에 대한 기대감도 내비치신 바 있다.
“나는 정치를 모르고 이준석이나 그런 비슷한 정치인들의 실제 모습을 모른다. ‘이준석이를 보고 배워라’ 하는 뜻이 아니라, 젊은 세대의 등장에 주목한 것일 뿐이다. 당시는 이 전 대표가 기성 정당에서 선배들 위에서 정치를 시작했기 때문에 그 분위기가 신선하게 보였다. 프랑스나 이런 데서도 30대 대통령이 나오고 뭐 그랬다. 그런 게 부러워서 이준석 이름이 언급됐을 뿐이다.”
_젊은 세대에 대한 긍정적 기대감은 유지하시는 건가.
“그렇다. 1990년대 이후 태어난 사람들이 30대가 되어 사회의 주축이 되고 있다. 이 세대는 이전 세대와 달리, 식민지 콤플렉스와 분단의 억압감, 전쟁에 대한 공포감 그런 것을 느끼지 않고 자랐다.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디지털 기기를 생활 속에서 이용하고 적응한 첫 세대다. 앞으로의 세계는 디지털 문명세계이기 때문에 이 세대가 제일 자연스럽게 적응하고 우리를 이끌 것이다. 그래서 기대를 많이 하게 된다. 우리 세대는 우리를 둘러싼 시대와 세계에 대해서 늘 불만스러워하고 대결하고 싸웠다. 그러나 지금 젊은 세대는 자기를 둘러싼, 그리고 자기들이 이용하는 기기를 이용해 자기 자신과 세계를 위해서 누구나 보탬이 될 수 있는 세대다. 그런 운명적 혜택을 얻은 세대들이 자연스럽게 자란다면, 우리나라는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발전된 나라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_젊은 세대에게 들려주실 말씀이 있다면.
“젊은 세대에 대해 내가 기대를 하고 좋게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만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건 관용이라고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인간 역사 속에서 인성의 변화를 추구하며 바라온 게 관용이다. 실제로 인류 사회 자체가 전반적으로 그런 방향이고 수천 년 역사를 통해서 그렇게 조금씩 밟아왔다. 그 결과 오늘날 같은 세계가 됐다. 앞으로도 더 시정하고 계획할 일이 많겠지만, 제도적으로든 교육적으로든 인성의 개발을 통해서라도 그런 쪽으로 흘러가야 한다.”
_극한 경쟁 때문에 요즘 젊은 세대가 가장 불행하다는 일부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어느 시대나 갈등은 있다. 세대와 세대, 직업단과 직업단 간에 갈등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다행인 거는 이 세대의 가치관이 매우 다양해졌다는 거다. 희망이나 지향하는 바가 다양하게 됐다. 내가 어렸을 땐 ‘뭘 하겠냐’ 물으면 무조건 ‘대통령 되겠다’는 어린애들이 많았다. 지금은 권투선수가 되겠다, 사진작가가 되겠다고 한다. 스스럼없이 옛날에 고려할 수 없던 그런 일이나 직업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서로 경쟁한다 하더라도 그 경쟁은 선의의 경쟁이라 그럴까, 서로 잘하기 위한 경쟁이 될 수 있다.”
_젊은 세대가 이전 세대보다 미래지향적이고, 개방적이고, 역사 현실에 대해서 더 관대하게 생각한다고 보시는지.
“그거는 자신할 수 없다. 우리 세대처럼 격변을 많이 겪은 세대가 더 관대할지, 아니면 편하게 우호적 경쟁을 통해 성장한 사람들이 더 관대할지는 말할 자신이 없다. 다만 우리 사회가 좀 더 화해와 관용적인 사회로 갈 수 있다면은 그런 기대를 할 수는 있겠다.”
_우리 사회의 갈등 양상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면.
“사회 발전이라는 게 한편으로는 긍정적 방향으로 가면서도, 다른 한편은 그에 저항하듯이 부정적인 비판적 물결이 생기게 마련이다.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우리 사회는 사회갈등이 상당히 줄었다. 그런 점에선 많이 좋아지고 낙관할 수 있는데, 대가 없는 진전이란 게 없다는 생각이다. 이제는 작은 갈등을 보다 심각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살짝 스친 것이 때론 더 큰 화를 불러내듯이, 그리고 막상 정면으로 부딪치면 웃고 지나갈 수 있듯이 사람들이 이중적이랄까 그런 심정인 것 같다. 큰 잘못에는 관대하게 넘어가기도 하고, 작은 결례에 대해서 오히려 크게 비난하기도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이란 게 그렇게 편하고 안정적이고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갈등의 총량은 줄었는데 작아진 갈등에 대해서 더 민감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_요즘 언론에 대해 말씀하신다면.
“내가 기자생활을 하던 1960년대 1970년대는 우리 사회가 전근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면서 갈등을 일으키던 때다. 민주화하느냐, 경제개발로 가느냐 하는 갈등으로 언론이 권력으로부터 억압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기자들의 우선적 관심사는 언론자유 문제였다. 그러나 지금은 언론자유란 말이 심각한 문제는 아닐 것 같고, 보도가 일으킬 순응적 효과에 주목해야 한다. 언론보도가 얼마나 사회의 중심적 문제를 짚으며,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지가 중요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사소한 세속적 문제, 예컨대 대통령이나 정치 지도자들 부인에 대해 얘기하는 걸 보면 언론이 과거에 비해 잘아졌다는 느낌이 든다. 그 부분은 우리 언론이 지양해야 할 일이 아닐까 싶다.”
_윤석열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좀 긍정적으로 보는 쪽이다. 딱히 정파적인 게 아니라, 신선한 통치력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전임 문재인 대통령 때도 초기에는 그랬다. 그러다가 정권 자체가 잘못을 저지르면 심경에 변화도 생긴다. 한 번 좋아한다고 해서 끝까지 지지하고 그럴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_우리 상황에 대해 평가하신다면.
“우리 역사에서 가장 행복한 시대가 지금 시대가 아닌가 싶다. 인류 전체적으로도 계속 발전하고 있다. 잠깐의 불화와 싸움 이런 게 있지만 발전의 격차나 갈등을 희석화시키는 단계에 있다고 본다. 우리 사회도 다행히 그런 단계 속에 합류하고 있어서, 참으로 ‘행운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다. 다만 미래에 대한 전망에서, 이전에는 100년이나 70년씩 전망했지만 요즘은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50년도 안 되고 30년밖에 못 하고 있다. 인류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그만큼 예측하기 어렵게 됐다.”
_역사에 대한 관대함을 강조하셨는데,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나는 친일파도, 일본 때문에 탄압받은 집안도 아니지만 일본에 대해 좋은 감정이 없다. 그냥 평범한 식민지 백성이지만 알게 모르게 반일교육을 받아왔던 탓일 수도 있다. 지금 와서 보면 일본이 성장을 멈춘 것 같다. 일본 사람들이 개방을 두려워하고 다양화를 억제하고 그렇게 해서 내부적으로만 단합한 탓인 것 같다. 2차 대전 이후 일본에서는 한 정권이 거의 80년 동안 집권했다. 물론 잠깐 1년 정도 야당이 집권한 적도 있지만, 정권이 바뀌지 않으니 활력을 잃은 것 같다. 우리는 전쟁도 있었고, 혁명도 있고, 여야 정권교체가 번갈아 이뤄지면서 이제는 일본을 얕보게 됐다.”
_긍정적 사회의 구체적 모습을 ‘성장 없는 발전’, ‘경쟁하는 공존’ 등 형용모순 변증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하신 적이 있다.
“그럴듯하게 그리 말했지만, 사실 설명하기가 까다롭다. 모든 사실에는 그걸 배반하는 현상이 뒤에 숨어 있는데, 그런 상태를 긍정적인 쪽으로 보고 싶어서 쓴 말이다. 예컨대 성장 없는 발전, 경쟁하는 공존, 인공의 자연화, 겸손한 자신감 같은 거다. ‘성장 없는 발전’은 자원 고갈이나 인간 삶의 조건을 악화시키는 기후변화 없는, 양적 성장이 아닌 지속가능한 성장을 뜻한다고 보면 된다. 인공의 자연화는 제러미 리프킨이 ‘회복력 시대’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멘트화한 세상에 나무를 심거나 공기를 정화하는 등의 중요성을 말한다고 보면 된다.”
▲김병익 상임고문은
1938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대전에서 성장했고,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동아일보 문화부에서 기자 생활(1965~1975)을 했고, 한국기자협회장(1975)을 역임했다. 김현 등 이른바 ‘문지 4K’와 함께 문학과지성사를 창사(1975)하여 대표로 재직했다. 2000년 퇴임 후 인하대 국문과 초빙교수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초대위원장(2005~2007)을 지냈다.
조철환 오피니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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