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필요하다면…" 설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베이비박스 상담사·거리상담 복지사
'명절 배고픔'은 무료급식이 책임져
2년 전 설날 새벽이었다. 동이 막 틀 무렵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 위기영아 긴급보호센터(베이비박스)’ 스피커가 ‘띵동~’ 하고 울렸다. 누군가 베이비박스 문을 열었다는 신호였다. 당직을 서던 이혜석(59) 선임상담사는 급히 뛰쳐나갔다. 문 앞엔 앳된 얼굴의 20대 여성이 서 있었다. 그는 피에 흠뻑 젖은 옷을 입은 채 두꺼운 외투로 감싼 아기를 안고 있었다. 여성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안심부터 시켜야 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니 조금 안정을 찾은 듯했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어머니, 힘들겠지만 용기를 내보는 게 어때요? 도와줄 사람이 많답니다.”
"도움 필요한 엄마, 365일·24시간 기다려요"
3년 만에 찾아온 대면 설 연휴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생각에 들뜬 이들이 많다. 하지만 올해 설에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명절에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을 보듬기 위해, 또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 기꺼이 휴식을 반납했다.
베이비박스의 문은 365일 열려 있어야 한다. 이 선임상담사는 20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엄마들이 요일이나 시간을 정해놓고 오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했다.
상담사들도 24시간 상주한다. 단순히 아이를 받기 위한 목적만은 아니다. 엄마가 베이비박스 손잡이를 열고 아기를 내려놓는 짧은 순간이 센터 입장에선 ‘골든타임’이다. 산모를 설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여서다. 이 선임상담사는 “출산 전 냉정하던 엄마들이 막상 아기를 낳고 나면 마음이 많이 흔들린다고 말한다”며 “이때 위로와 도움을 통해 아기의 가정 복귀를 돕는 게 우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엄마와 아기 맞을 준비를 하며 휴일을 포기한 지 햇수로 벌써 5년이다. 생활의 일부를 버리는 삶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지만, 이 직업에는 형언할 수 없는 ‘끌림’이 있다. 그는 “조그만 손발가락 스무 개를 꼬물거리는 아기들이 계속 일할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라고 미소 지었다.
"설 한파에도 새벽까지 '거리'의 안부 물어요"
서울 영등포보현노숙인희망지원센터 소속 4년 차 사회복지사 박강수(49) 희망지원팀장은 매년 설 연휴에 칼바람을 맞는 일이 익숙하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노숙인들을 만나는 ‘거리상담(아웃리치)’ 활동이 그의 업무다. 그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응급지원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임시 거소ㆍ급식 등이 제공되는 노숙인종합지원센터로 연결해 준다. 박 팀장은 “노숙인 대다수가 일정한 주거 없이 길에서 생활하고, 사회복지망 안으로 잘 들어오려고 하지 않아 힘든 점이 많다”고 털어놨다.
그래도 거리상담은 하루도 빼먹지 말아야 한다고 굳게 믿는다. 특히 설이 끼어 있는 겨울엔 노숙인들이 건강상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아 더 긴장한다. 때론 아무리 추워도 야외취침을 고수하는 노숙인들을 설득해 ‘응급구호방(7~10명 수용)’이나 ‘응급쪽방’으로 데려오기도 한다. 기온이 확 떨어지는 밤 7시부터 새벽 5시 사이가 취약 시간대다. 그는 “건강 상태와 필요한 생필품, 생활 불편 등을 묻는 거리상담 활동마저 없다면 노숙인들은 사회와 완전히 단절될 것”이라며 “남들처럼 못 쉬는 건 힘들지만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을 한다는 자부심 하나로 산다”고 말했다.
"배고픔이 가장 큰 고통... 매일 밥 퍼요"
배고픔이 명절이라고 건너 뛸 리 없다. 가난하고 곤궁한 이들의 소중한 한 끼를 책임지는 ‘급식봉사’가 연휴에 문을 닫을 수 없는 이유다. 서울 영등포 쪽방촌 옆 대로변에 있는 무료급식소 ‘토마스의 집’은 이번 설 연휴 때 정기 휴일인 일요일(1월 22일)을 제외하고 3일간 정상 운영한다. 외려 설이나 추석 땐 평소보다 100~150명 많은 사람이 찾는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 외롭고 지친 이웃이 생각보다 많다는 의미다. 박경옥(64) 토마스의 집 총무는 28년째 단체 살림을 책임지고 있다. 조리 준비부터 최종 배식까지 전 단계를 총괄하는, 급식봉사계 ‘마에스트로(거장)’다.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탓에 명절은 당연히 언감생심이다. 박 총무는 “언제 추석, 설을 챙겼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며 웃었다.
명절까지 이어지는 고된 일상에 지쳐 ‘꾀’를 부리고 싶은 적도 많다. 그 때마다 며느리의 급식봉사를 자랑스러워하던 시아버지의 말을 떠올린다.
“인간의 가장 심한 고통이 배고픔이다. 우리 며느리가 외로운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일을 하니 참 고맙다.”
칭찬의 몫은 여럿이 나눠야 한다. 수많은 자원봉사자의 노력이 지금껏 토마스의 집을 지킨 힘이다. 이번 설에도 자원봉사자 30여 명이 배식 도우미로 나선다. 박 총무는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분들이냐”며 “덕분에 ‘우리 님’들에게 따뜻한 떡국 한 그릇 대접할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우리 님은 박 총무가 토마스의 집을 찾는 이들을 부르는 애칭이다.
나광현 기자 nam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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