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엔 없는 협치 현수막… 과천 새내기 시의원들이 내걸었다
“과천 시민을 위해 한마음으로 뛰겠습니다.” 설을 앞두고 경기도 과천시 곳곳에 현수막이 걸렸다. 상대 당을 헐뜯거나 자기 당 자랑만 하는 여느 정치인들의 현수막과 달리, 이 현수막에는 여야 시의원의 얼굴과 이름, 그리고 각당의 상징색이 나란히 들어갔다. 과천시 여성시의원 4명이 힘을 합친 결과다.
화제의 주인공은 국민의힘 소속인 황선희·우윤화, 더불어민주당 박주리·이주연 의원. 의장 포함, 총원이 7명에 불과한 9대 과천시의회의 여성 초선 의원들이다. 같은 ‘나선거구(문원·부림·갈현)’에서 활동하는 황·박 의원이 먼저 이달 초 갈현동과 문현동 2곳에 현수막을 걸었다. 뒤이어 ‘가선거구(과천·별양·중앙)’에 있는 1단지 상가 앞에도 우·이 의원의 현수막이 걸렸다. 개당 8만원씩 하는 제작 비용은 반반씩 부담했다고 한다.
여야 의원들이 활짝 웃고 있는 현수막 사진이 소셜미디어(SNS)를 타고 퍼지면서 “가슴이 뭉클해진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국민의힘 황 의원은 “시의원은 시민을 위해 존재하는 동반자적 관계”라며 “과천 발전과 행복만 보고 가겠다”고 했다. 민주당 박 의원은 “설을 앞두고 정치가 시름을 달래주기는커녕 ‘정치 때문에 오히려 시름이 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며 “새해에는 정치가 드리는 희망을 꽃피워 내겠다”고 했다.
시의원들의 현수막 협치는 여야가 극한 대립·투쟁을 반복하는 여의도에도 울림을 줬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본지 통화에서 “그저 미안할 뿐”이라며 “선배들이 보고 배워야 한다. 온전히 민생을 위한 국회를 운영하자”고 했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야당 간사인 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절벽에서 뛰어내린다는 생각으로 여야가 공존할 수 있는 정치개혁을 추진할 것”이라고 했다.
과천시는 지난 2021년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 반발한 시민들이 김종천 과천시장 탄핵을 위한 주민소환 투표를 진행했을 정도로 여야 간 대립이 극에 달한 지자체 중 하나였다. 지금도 시장은 여당, 지역구 국회의원은 야당 소속이다. 정치 경험이 1년도 안 된 네 사람은 지난해 6월 지방선거 유세를 하면서 유권자들로부터 “이제 그만 좀 싸워라” “정치 양극화가 지겹다”는 얘기를 가장 많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당선 후 이렇게 다짐했다. “제발 더 이상 싸우지 말고 자주 보자. 정쟁(政爭)이 아닌 대화로 모든 걸 풀고 지역 발전을 최우선으로 놓자.”
작년 6월 제9대 과천시의회가 개원(開院)하기도 전, 당선자 신분으로 만든 공부 모임이 협치의 시발점이 됐다. 교육 전문가, 간호사와 의료 스타트업 종사자, 엘리트 운동선수 등 각자 다른 배경을 갖고 있는 이들은 전문가나 시청 직원, 전직 시의원 등을 섭외해 여러 지역 현안에 대해 공부했다. 또 시의회 회기를 앞두고는 연구실에 모여 밤을 새워가며 결산 감사, 추경·본예산 심의 등을 함께 준비했다고 한다. 국민의힘 우윤화 시의원은 “항상 밤늦게 들어가다보니 자연스럽게 저녁도 같이 먹고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됐다”며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니 서로의 성향, 스타일을 잘 알게 됐다”고 했다.
화제의 협치 현수막도 “한번 해볼까”하는 자연스러운 대화 속에서 비롯됐다. 시의회 2층에 여야 의원들 사무실이 모여있어 자연스럽게 오가며 마주칠 수 있는 구조라고 한다. 또 과천시의회 시의원들은 매주 월요일 오전 9시 현안이 없어도 정례적으로 차담회를 갖고 있다. 황선희 의원은 “현안을 놓고는 가끔 얼굴을 붉힐 정도로 충돌한다”면서도 “같이 공부하고 대화하며 쌓인 유대가 있다 보니 각자의 말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절충점을 찾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지난해 10월 열린 임시회에서 야외 빙상장, 빛축제 등 여야 간 갈등이 첨예했던 사안들도 대화 끝에 의결할 수 있었다.
현재 시의회는 국민의힘이 5명, 민주당이 2명인 여대야소(與大野小) 구조다. 과천 시의원선거는 중선거구제인데 여야가 복수공천한 가·나 선거구에서 각 3명씩, 비례대표에서 1명을 선출했다. 민주당 소속인 박주리 의원은 “정권을 뺏긴 입장에서 복수도 하고 싶고 사사건건 발목 잡기도 하고 싶은데 ‘도대체 시민들에게 뭐가 도움이 되냐’ 생각하면 도저히 정쟁을 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했다. 그는 “꼭 필요한 순간에만 비판하니 여당도 우리 의견을 존중하고 수긍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여당 황선희 의원은 “여당이 절대 과반이기 때문에 ‘굳이 야당과 협치가 필요하냐’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면서도 “정치라는 게 들어와서 보니 일방 독주가 아니더라. 다 같이 지역 일꾼으로 시의 발전만 보고 가는 게 맞는다 생각했다”고 했다. 여야가 반목만 하면 지방 정부에 대한 견제, 지역 민원 해결 같은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새내기 지방 의원들이지만 중앙 정치권을 향해서도 뼈있는 얘기를 내놨다. 민주당 박주리 의원은 “나만 돋보이길 원하는 정치인의 본능을 거스르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다”며 “욕심을 조금만 내려놓으면 대화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했다. 우윤화 의원은 “어렵겠지만 약속이나 초심, 합의 같은 것들을 소중하게 여겼으면 한다”고 했다. 소셜미디어(SNS)를 최대한 자제하고 있다는 황선희 의원은 “정치인이 실력이 없으면 항상 여론에 휘둘리게 된다”며 “자기 소신을 갖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정치인이 강성 지지자들 의견에만 영합하는 세태를 지적한 것이다.
현수막 협치는 중앙 정치권에도 울림을 주고 있다. 국민의힘 경기도당위원장인 유의동 의원은 “정치 새내기들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도 할 수 없던 일을 했다”며 “이제 국익을 위해 여야가 따로 없는 정치로 국민에게 보답해야 할 때”라고 했다. 박정하 수석대변인은 “당 대변인으로 지난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고받았던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며 “과천에서 시작된 협치의 바람이 국회를 넘어 대한민국 전체를 뒤흔들기를 바란다”고 했다. 정진석 위원장은 “새해에는 오로지 민생을 위한 국회를 운영해보자”고 제안했다.
민주당 김종민 의원은 “양자 대결로만 가면 한국 정치는 가라앉는 배가 되고 망한다”며 “과천 지역의 시도가 너무 반갑고 의미 있다. 다시 대화하고 협력하고 민생을 위해 결정하는 국회로 가야 한다”고 했다. 김영배 의원도 “자기편만 국민이라 생각하는 증오의 정치를 걷어치우자”고 했다. 과천 지역구의 민주당 이소영 의원도 “한마음으로 협치하는 시의원들을 응원해달라”고 했다. 이동학 전 최고위원은 19일 페이스북에 현수막 사진을 올리며 “세상을 바꾸는 건 비관이 아니라 낙관”이라고 썼다. 여기에는 박지현 전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지난 대선에서 이른바 ‘대장동 저격수’로 주목받았던 이기인 국민의힘 경기도의원도 똑같이 ‘좋아요’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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