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性 인식법’ 통과… 英 반대에 갈등 고조
영국 정부와 스코틀랜드 간의 반목이 커지면서 18세기 초에 만들어진 현재의 ‘연합 왕국(United Kingdom)’이 흔들릴 조짐이 보이고 있다. 스코틀랜드는 2014년 독립 투표에 실패했지만, 외교와 국방 등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영역에서 자치권을 갖고 있다.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이 여전히 독립 투표를 재추진, 영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독자적 법률 제정도 계속 시도하면서 갈등의 불씨가 계속 생겨나고 있다. 영국은 스코틀랜드의 독립이 영국의 국제적 위상은 물론 국내 정치에도 큰 타격을 줄 것으로 보고 스코틀랜드를 주저앉히려 하고 있다.
양측은 최근 스코틀랜드 자치 의회가 제정한 ‘성(性) 인식 법’을 놓고 또다시 맞붙었다. 이 법은 성 전환자들이 법적 성별 정정을 자기 선택만으로 간편하게 할 수 있도록 절차를 간소화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의 앨리스터 잭 스코틀랜드 담당 장관이 지난 16일 “이 법이 국왕의 승인을 받아 공식 제정되는 것을 막는 ‘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 밝히면서 갑자기 영국과 스코틀랜드 간의 정치적 문제로 비화했다.
영국 정부는 개인의 선택으로 너무 쉽게 성별을 바꿀 수 있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영국 내 다른 지역에 적용되는 비슷한 법률(평등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니컬라 스터전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은 이를 스코틀랜드에 대한 영국의 ‘탄압’으로 규정했다. 그는 “이는 스코틀랜드 의회에 대한 (영국 정부의) 직접 공격”이라며 “성 인식법과 함께 스코틀랜드의 민주주의를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했다. 또 “이 문제를 법원으로 가져가 끝까지 다투겠다”고 경고했다.
더타임스 등 영국 매체들은 “스터전 수반이 성 인식법 제정 거부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고 해석했다. 스코틀랜드에 대한 과도한 간섭이자, 자치권을 무시하는 행태로 몰아 스코틀랜드의 독립 여론에 불을 지피려 한다는 것이다. “스터전 수반이 이끄는 SNP는 이번 사안을 스코틀랜드 최고 민사법원으로 가져갈 전망”이라고 BBC는 보도했다. 영국 정부의 이번 결정에 제동을 거는 판결을 이끌어내 논란을 더 증폭시키려 한다는 관측이 나온다.
스코틀랜드는 2014년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55%대45%로 잔류를 선택했다. SNP는 그러나 브렉시트(Brexit·영국의 EU 탈퇴)가 스코틀랜드인들의 뜻에 반해 이뤄졌다는 이유로 독립 투표를 재추진 중이다. 지난해 10월에는 자체 통화 도입과 EU 가입 등을 골자로 한 108장의 ‘독립 비전’을 발표, 2023년 10월 19일 독립 투표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독립 투표는 그러나 지난해 11월 “영국 정부 동의 없이 독립 투표를 할 수 없다”는 영국 대법원의 전원 일치 판결로 좌절됐다. 스터전 수반은 당시 “스코틀랜드가 영국의 동의 없이 미래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은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연합 왕국이 자발적 협력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반발했다.
SNP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계속 주장하는 데는 경제적 이유가 크다. 영국 정부가 스코틀랜드에 대한 사회 인프라 및 복지 지원을 계속 줄이고 있다는 것이다. 스터전 수반은 최근 “영국은 경제가 쇠퇴하는 나라”라며 “영국이 경제적 힘과 재정적 안정을 제공해 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했다. 스코틀랜드는 영국 정부로부터 매년 410억파운드(62조원)의 재정 지원을 받고 있다. 정부 총 예산(약 1조파운드)의 약 4%다. 분리독립주의자들은 그러나 “영국이 (스코틀랜드 쪽 바다인) 북해 유전의 원유와 가스를 팔아 막대한 재정 수입을 거두면서 이 중 극히 일부만 스코틀랜드에 나눠준다”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북해 유전의 지분을 갖고 독립해 EU에 들어가는 것이 이득”이란 인식마저 커지고 있다.
영국 정치권은 스코틀랜드가 독립할 경우 북아일랜드와 웨일스의 분리주의가 더 심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영연방 해체설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영국의 국제적 위상에도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양측의 통합에 기여해온 영국 왕실의 역할마저 약해질 가능성이 크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매년 여름을 스코틀랜드의 밸모럴성에서 보내면서 통합에 공을 들여왔다. 또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자신의 관이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모두 지나게 하는 이벤트도 연출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국민적 인기가 떨어지는 찰스 3세 왕이 이와 같은 ‘통합의 상징’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적 시각이 많다. 스코틀랜드가 영국 국민의 존경을 받지 못하는 찰스 3세의 즉위를 분리 독립의 기회로 삼으려 한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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