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살아나 대리 손님 많았으면”
지난 17일 새벽 1시 서울 강동구 길동의 이동노동자 지원센터에서 만난 18년 차 대리기사 고병석(63)씨는 “저도 옛날에 건설사 대표였어요. 한 12년쯤. 지금 경기남부경찰청이랑 통영구치소 그때 제 회사에서 지은 거예요”라고 했다. 종이컵에 든 율무차를 살살 불어가며 마시던 그는 “여기 오가는 대리기사들 다 예전에 날고 기었던 사람들인데...”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고씨는 “코로나다 뭐다 해서 최근 몇 년은 어려웠지만 새해에는 경기가 살아나서 손님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라며 “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아 번듯한 임대주택에서 가족들과 사는 게 목표입니다”라고 했다.
강동구가 운영하는 이곳 지원센터는 대리운전이나 배달 기사 등 ‘거리’가 일터인 이들이 한파 속에서 몸을 녹이거나 다음 일감을 찾을 때까지 잠시 머무르는 일종의 쉼터다. 자정부터 오전 2시까지가 손님을 찾으려는 대리운전 기사들로 가장 붐빈다고 한다. 설을 앞두고 최근 이틀에 걸쳐 새벽 시간에 이곳을 찾아가 대리운전 기사들 40여 명을 만났다. 대개 다양한 형태로 굴곡진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고 설을 앞두고도 환하게 웃기 어려운 처지도 상당수였다. 하지만 저마다 자기만의 꿈이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새해에도 열심히 달릴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힘겹게 사연과 꿈을 털어놨다. 서울 강동구에 사는 소모(55)씨는 20여 년 전 은행 등에 두는 장식용 조화를 빌려주는 사업으로 한때 3년간 3억원을 벌어들인 적도 있는 사업가였다고 했다. 하지만 사업이 잘될 무렵 잇따라 지인에게 수억 원대의 사기를 당했고, 이를 메우려고 손댄 도박에 빠져 40대 후반이 될 때까지 한참을 방황했다. 그는 “나는 당뇨나 고혈압 같은 지병이 여럿 있는 데다 나이도 많아 일반 직장을 다니기 어려운데, 이런 나도 할 수 있는 대리운전 일은 나에게 축복 같은 것”이라며 “하루하루 몸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했다.
4년 전 운영하는 식당을 그만두고 대리운전을 시작했다는 송영대(66)씨도 비슷한 마음이라고 했다. 그는 “할 줄 아는 게 운전이어서 이 일을 시작했다”면서 “60대가 매일 밤새 일하는 건 정말 힘들고 스트레스도 많지만 꿈이 있어서 열심히 달린다”고 했다. 그의 새해 목표는 개인 택시를 하나 장만하는 것이다.
서울 도봉구에서 왔다는 4년 차 대리기사 성길현(52)씨는 지난 20년간 피자 배달 오토바이를 도색하는 사업을 했다고 했다. 그러다 2020년 말 코로나 여파가 길어지면서 사업을 접었다. 그는 “코로나로 배달 수요가 늘면 도색 사업도 잘될 줄 알았는데 배달하는 사람들은 오토바이 색깔에는 신경도 쓰지 않더라”고 했다. 성씨는 “경기가 나빠 이번 연말은 연말 같지도 않았다”면서 “이제 실내에서 마스크도 안 쓴다고 하니 손님이 다시 많아지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서울 강동구에 사는 19년 차 대리기사 이종헌(57)씨도 올해 경기가 계속 나쁘지 않을까 걱정이 컸다. 그는 “요즘 같은 불경기에는 대리 콜 수가 줄어들어, 자정 전까지 콜 잡기 경쟁이 아주 치열하다”며 “내년에는 더 많은 사람이 대리운전을 이용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이들과 마주친 이곳 강동구 지원센터의 경우 이 와중에 5월 말 문을 닫는다. 현재 서울시와 강동구청 예산으로 건물 일부를 빌려 이 지원센터를 운영했는데 서울시가 예산을 줄이면서 이런 시설이 점차 캠핑카나 간이 천막 같은 이동형 시설로 바뀐다는 것이다. 다만 강동구에 대체 시설이 생길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이곳을 자주 찾는다는 한 대리기사는 “혼자 살며 우울증도 있는 기사들끼리 만나서 그나마 서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사랑방이 여기인데...”라며 “사라진다는 소식을 들으니 아쉽기만 하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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