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의 벽돌책] 무정부주의 해커가 인턴을 제안한다면…

장강명 소설가 2023. 1. 21.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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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자기 이름을 ‘핍’이라 소개하는 우리 주인공의 본명은 ‘퓨리티(purity·순수)’. 씩씩하고 똑똑한 젊은 여성이지만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 텔레마케팅 회사는 도무지 못 다니겠고, 유부남을 짝사랑하고 있으며, 제대로 된 집도 없고, 떨어져 사는 어머니는 좋게 표현해서 괴짜인데,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절대로 말하려 들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핍은 위키리크스와 비슷한 무정부주의 해킹 집단을 이끄는, 줄리언 어산지와 비슷한 사내에게 기묘한 초대장을 받는다. 인턴 자리를 제안하고 싶다고? “젊은 여자들 불러서 재미 보려는 속셈인 거 아니까 썩 꺼져” 하고 답장을 보냈는데 그런 거 아니란다. 태도도 정중하다. 아버지를 찾는 일을 도와달라는 조건으로 핍이 제안을 받아들일 즈음 독자들도 눈치 챘을 터인데, 그렇다. 핍에게는 어마어마한 출생의 비밀이 있다.

핍이라는 주인공 이름을 들었을 때 고전문학에 조예가 있는 독자들은 이미 알아차렸을 터인데, 그렇다. 조너선 프랜즌의 소설 ‘순수’(은행나무)는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곳곳에서 노골적으로 인용한다. 디킨스의 소설을 21세기에 조금 차갑게 다시 쓰면 이렇게 될까? 선량한 주인공의 수난과 성장, 뒤틀렸지만 아주 매력적인 조연 캐릭터들, 뜻밖의 전개와 흡인력.

“나는 평생 문학을 연구해온 사람이라 인간 심리에 대해 조금은 안다고 자부해. 내가 보기에 ○○○은 너에게 맞지 않는 여자고 걔도 그걸 알아.”

전체 828쪽인 이 소설이 80퍼센트가 넘어갔을 때 나오는 대사다. ‘순수’가 프랜즌의 대표작으로 남을 것 같지는 않고, 그가 심오한 메시지를 고민하면서 이 작품을 쓴 것 같지도 않다. 인터넷과 정보 공개에 대한 고찰이 간혹 나오기는 하지만 내게는 저 대사가 이 소설의 핵심으로 다가왔다. 저자의 의도였건 아니건 간에. 맞지 않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거나 가족이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뒤틀린 인물의 내면에 대한 깊이 있는 묘사를 문학을 통해 접하게 되면 정말 인간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까? 책 뒤표지에 실린 묵직한 해외 서평들에 주눅 들지 마시기를.

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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