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치 않은 손흥민의 장기 부진, 팀 탓인가 개인 탓인가
지난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리그(EPL) 득점왕이자 대한민국의 카타르 월드컵 16강 기적의 주역인 손흥민(30·토트넘 홋스퍼)을 둘러싸고 위기론이 커지고 있다. 이번 시즌 토트넘에서 꾸준히 선발 출장하고 있음에도 저조한 득점력과 경기력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 현지 팬과 언론에서도 “이제 손흥민을 벤치로 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당장 득점 페이스만 봐도 예전 같지 않은 건 분명하다. 손흥민은 지난 21-22 시즌 EPL에서만 35경기에 출전해 23골을 넣으며 득점왕에 올랐다. 손흥민은 토트넘으로 이적한 첫 시즌은 15-16시즌에 리그에서 4골을 넣은 이후 시즌마다 리그에서 두 자릿수 득점을 해왔다. 하지만 이번 시즌에는 18경기에서 단 4골에 그치고 있다. 지금 페이스라면 이번 시즌에는 리그 두 자릿수 득점이 무산될 위기다.
손흥민의 부진한 퍼포먼스가 장기화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팬들 사이에서도 원인을 두고 가지각색의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국내 최고 축구 전문가로 꼽히는 한준희, 임형철 축구 해설위원 등 다수 전문가들에게 손흥민의 부진 원인에 대해 물었다.
◇ “손흥민, 현재 폼 떨어진 건 맞다.”
전문가들 대부분은 “현재 손흥민이 평소보다 폼이 떨어져 있는 상태로 보인다”고 입을 모았다. 한준희 위원은 “손흥민이 절정기에 비해 폼이 떨어진 인상이 있다”며 “과거보다 턴 오버(실책)가 더 잦아졌고 슈팅의 정확도도 떨어진 상태”라고 말했다. 임형철 위원도 “장기였던 드리블도 이전 시즌보다는 무거워 보인다. 얼굴 부상으로 마스크를 장기간 쓴 것도 영향을 주고 있고 분명 몸이 무거워 보이는 건 사실”이라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이번 시즌 전 프리시즌부터 몸 만들기와 회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영향과 월드컵 여파도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지난 시즌이 끝난 이후 손흥민이 여러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피로도가 커졌고, 특히 토트넘의 방한 행사와 월드컵 준비가 쭉 이어지면서 전 시즌의 피로를 충분히 회복하지 못한 채로 이번 시즌에 돌입하다 보니 절정의 기량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또다른 축구계 인사는 “이번 시즌 전 안토니오 콘테 토트넘 감독이 강한 체력 훈련을 실시했는데, 그게 오히려 토트넘 선수들의 피로도를 키웠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고 했다.
한준희 위원은 “경기력이 예전같지 않다 보니 심적 부담이 더 커지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스스로 원하는 경기력이 나오지 않다 보니 조급한 마음이 커지면서 폼이 더 떨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손흥민보다 더 큰 문제는 ‘토트넘 그 자체’
하지만 전문가들은 “손흥민의 부진은 개인의 폼이 떨어진 영향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토트넘의 경기력 자체가 저조한 영향이 가장 크다”고 입을 모았다. 당장 손흥민의 부진만 탓하기에는 토트넘 전체의 경기력이 너무 좋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 토트넘은 리그 20경기에서 10승 3무 7패 승점 33점으로 리그 5위를 기록하고 있다. 시즌 전 브라질 국가대표팀 에이스 히샬리송을 비롯해 EPL 상위권 선수들을 줄줄이 영입하며 우승을 노리겠다는 기세를 보였지만, 현재 성적은 기대 이하다. 리그 4위인 뉴캐슬보다 1경기를 더 치렀음에도 승점 차이는 5점으로 벌어졌고, 리그 1위 아스널(승점 47점)보다 2경기를 더 치렀음에도 승점 차가 14점까지 벌어졌다.
전문가들은 “현재 저조한 경기력에 비춰보면 5위를 유지하는 것도 선방하는 것”이라고 했다. 토트넘의 레전드이자 핵심 선수인 해리 케인이 이번 시즌 현재까지 15골을 넣으며 이른바 ‘꾸역승’을 만들어준 덕분이라는 것. 임형철 해설위원은 “그럼에도 케인 역시 경기 내용으로 만 보면 지난 시즌보다 경기력이 떨어졌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수비적 운영+중원의 부진+과도한 윙백 의존
의아한 점은 안토니오 콘테 감독이 지난 시즌과 동일한 3-4-3, 3-5-2 전형을 유지하고 있는데도 경기력은 판이해졌다는 점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임형철 위원은 “콘테 감독이 지난 시즌보다 더 수비적이고 조심스런 경기 운영을 하는 게 가장 큰 차이”라고 말했다. 지난 시즌보다 토트넘의 전체적인 진영이 수비적으로 내려 앉은 상태로 경기를 하면서 답답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런 수비적인 운영은 스피드를 이용해 상대 진영 깊숙히 침투하는 손흥민의 장점을 살리기 어렵다. 임 위원은 “토트넘이 수비적으로 운영하면서도 공격이 잘 되려면 수비진부터 빌드업이 잘 이뤄져서 공격진까지 패스가 잘 이어져야 하는데, 빌드업을 맡고 있는 수비진과 중원 미드필더들이 계속해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빌드업이 되지 않는 탓에 손흥민이 아군 진영으로 내려와서 볼을 받는 움직임이 많아지면서 자연히 득점 찬스와 멀어지고 상대 미드필더들의 강한 압박을 받으면서 턴 오버도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시즌 토트넘 중원의 핵심으로 떠오른 호드리구 벤탕쿠르가 부상으로 경기에 빠진 영향도 크다. 한 전문가는 “지난 시즌 토트넘은 벤탕쿠르와 호이비에르가 빌드업을 분담했는데, 벤탕쿠르가 부상으로 빠지다보니 호이비에르에게 너무 많은 빌드업 부담이 주어지면서 호이비에르의 빌드업 능력도 저하되고 있는 양상”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지난 20일 열린 맨체스터 시티와의 경기에서 부상으로 빠져있던 벤탕쿠르가 복귀하자 토트넘은 평소보다 좀 더 활기있는 경기를 펼쳤다.
더 큰 문제는 수비진과 미드필더에서 제대로 패스 연계가 되지 않으면서 토트넘이 측면 윙백들에게 공격 전개를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한 전문가는 “수비 뒷공간을 노리는 정교한 패스나 빌드업 없이 윙백들의 크로스에 의존한 공격 패턴이 반복되다 보니 손흥민의 장점을 살릴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다른 전문가는 “왼쪽 윙백인 이반 페리시치(크로아티아)가 손흥민보다 더 깊이 상대 진영으로 올라가다 보니 손흥민이 상대 골문 앞으로 쇄도하기 어렵고, 윙백이 비운 뒷공간을 메워야 하는 부담이 큰 탓에 공격적으로 경기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겉도는 손흥민-페리시치 조합... 변화 없는 콘테 감독
윙백에 의존된 공격 전술을 펼치는데, 이마저도 호흡이 맞지 않아 삐걱댄다. 특히 왼쪽 라인 공격을 맡은 손흥민과 페리시치는 같이 발을 맞춘 지 반년이 넘어가지만 좀처럼 호흡이 맞지 않는 모습이다. 최근에는 경기 도중 손흥민의 침투 패스를 페리시치가 받지 않고 무시해 두 사람이 설전을 벌이는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잡혀 논란이 되기도 했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페리시치의 플레이 스타일이 직선적인 EPL과 맞지 않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한 전문가는 “페리시치는 분데스리가와 세리에 A에서 맹활약한 세계적 선수이지만, 볼을 잡으면 항상 투 터치 이상을 가져가는 습관이 있다”며 “원 터치와 다이렉트한 패스 전개를 요구하는 EPL의 경기 리듬과 맞지 않는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페리시치가 볼을 잡으면 항상 질질 끌다 보니 손흥민이 침투하는 타이밍을 번번이 놓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점은 영국 현지 언론에서도 끊임없이 제기된 부분이지만, 콘테 감독은 별다른 변화를 주지 않고 있다. 지난 20일 맨체스터 시티와의 경기에서 2대4로 역전패한 이후 콘테 감독은 “토트넘은 경험이 부족하다. 단계적으로 매년 이를 발전시켜야 한다. 유벤투스와 인터밀란에서 가지고 있던 기대감을 계속 갖는다면 좌절감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전술적 역량과 지도력보다 팀 수준 자체가 떨어지는 게 문제라며 책임을 회피한 것이다.
이렇다보니 영국 언론들은 콘테 감독이 조만간 경질될 가능성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이번 시즌 첼시에서 경질된 세계적 명장 토마스 투헬을 비롯해 과거 손흥민을 지도해 토트넘을 챔피언스리그 결승까지 이끌었던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전 감독이 토트넘에 다시 복귀할 가능성도 언급되는 상황이다. 임형철 위원은 “투헬 감독은 현재 주어진 선수 자원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데 최적화된 감독이라 만약 토트넘에 부임한다면 손흥민과 케인을 살려내는 데 주력할 것”이라며 “포체티노 감독이 토트넘에 복귀한다면 콘테보다는 더 공격적인 전술을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역시 손흥민의 기량 회복에는 더 도움이 될 것이라 본다”고 지적했다. 임 위원은 “다만 포체티노 감독이 전성기에서 내려온 모습이라 예전과 같은 명장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조금 있다”고 덧붙였다.
◇”에이징 커브? 지금 판단하는 건 섣불러”
일각에선 손흥민의 장기화되는 부진이 이른바 ‘에이징 커브(Aging Curve)’로 불리는 노쇠화가 시작된 걸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특히 스피드와 스프린트에 의존도가 높은 손흥민의 플레이 특성을 감안하면 에이징 커브가 일찍 시작됐을 수 있다는 게 일부 팬들의 관측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제 서른 살인 손흥민에게 에이징 커브를 언급하는 건 시기상조”라고 말했다. 한 전문가는 “현재 손흥민의 부진은 부상과 월드컵으로 인한 피로도, 팀의 부진이 총체적으로 종합되어서 나타난 결과”라며 “최소한 에이징 커브라고 말하려면 팀의 상황이 좋은데도 불구하고 손흥민 개인의 부진이 이어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다른 축구계 인사는 “손흥민의 부진은 심각한 얼굴 부상 속에서 월드컵 일정을 강행한 여파가 크다. 지금은 비난하고 질책하기보다 응원해주는 게 맞다. 손흥민도 스스로 부담을 좀 더 내려놓고 맘을 비우면서 컨디션을 회복하는 데 집중해야 할 시기”라고 말했다.
[배준용 주말뉴스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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