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설거지는 누가 할 것인가?
얼마 전 설거지를 전담해오던 남편이 악화된 손목 통증을 호소하며 사보타주에 들어갔다. 쌓여 있는 설거지를 바라보는 것은 ‘내가 지금 인생을 제대로 살고 있는가’라는 근본적 의문을 품게 한다. 혼자 살 때 밀려 있는 설거지는 나의 게으름, 의지 없음, 무기력함, 우울함의 척도였다. 이러한 고강도 감정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였든 당시 설거지는 내가 먹은 것을 내가 치우는 것에 관한 것으로 비교적 단순한 문제였다. 누군가와 함께 사는 상황이 되자 설거지에 훨씬 복잡한 관계, 의미, 감정들이 달라붙었다.
함께 먹을 것을 만들고 치우는 행위는 거주 공간의 역동과 질감을 만든다. 누군가 먹을 것을 만들어주고 치워주면 우리는 돌봄과 배려를 받고 있다고 느낀다. 반면에 이러한 행위가 부족하면, 우리는 방치되고 무시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런 돌봄노동을 누가 하느냐는, 집의 영역에서 작동하는 성평등을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주로 여성들이 오랫동안 가족을 위해 먹을 것을 만들고 치우는 일을 도맡아왔기 때문이다. 내 주변의 초고학력 여성들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어느 학회 뒤풀이 자리에서 선배 학자가 한 말이 떠오른다. 그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지역 대학 연구소에서 몇년간 일하다 그만뒀다. 단기간에 최대한 많은 논문을 생산해야 하는 공장 같은 연구소 생활에 회의감이 들기도 했고, 아이를 돌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고자 내린 결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결정에 나름 만족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설거지를 하다 보면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비생산적인 일에 시간을 써야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나에게도 설거지는 결혼제도를 받아들인 후 변화한 사회적 역할과 위치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다. 특히 아이가 어릴 때는 종일 먹이고 치우는 것을 무한 반복하는 노동의 늪에 빠져 시간감각마저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맞이하는 명절은 치명타였다. 며칠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음식 준비와 설거지를 반복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다. 아이를 재운 후 이런 생활을 언제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시간에 느꼈던 먹먹함이 아직도 선명하다. 명절을 보내고 이혼하는 부부가 많은 데는 분명 설거지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남편이 설거지를 전담하기 시작한 것은 이즈음이었다. 모유 수유 중이던 아이를 돌보는 것을 돕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 대신 다른 집안일을 맡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누적된 집안일 때문인지 몇해 전부터 남편의 손목에 이상이 생겼다. 미안한 마음에 이번엔 내가 남편에게 “앞으로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게 해줄게”라고 큰소리를 쳤다. 하지만 막상 혼자 설거지를 하다 보니 괜한 소리를 했다는 후회가 곧바로 밀려왔다. 혼자 설거지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외롭다. 설거지를 해도 안 해도 느끼는 괴로움을 해결하고자 식기세척기를 샀다. 식기세척기를 설치하고 여러 코스로 돌려봤다. 무엇보다 예상치 못한 소득은 설거지하는 시간이 외롭지 않다는 것이다. 자잘한 식기들을 식기세척기에 돌리고,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식기세척기 소리를 들으며 프라이팬과 냄비 같은 큰 것들을 씻고 있으면, 식기세척기와 내가 함께 일하는 느낌이 든다. 고마운 마음을 담아 식기세척기에 ‘뽀득이’라는 이름도 지어줬다.
곧 명절이다. 보통 명절은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갖는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언제나 크다. 명절에 모일 가족이나 집이 없는 사람들도 많거니와, 가족들이 모이더라도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수많은 갈등과 긴장을 경험하는 시간이다. 특히 떠들썩한 모임 속에 혼자 설거지하는 외로움은 뼈에 사무친다. 이는 가정 평화에 치명적 영향을 미친다. 명절을 시작하기 전에 설거지는 누가 할 것인지 진지하게 논의해보길 권하고 싶다.
채석진 조선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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