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의 불편한 진실] ‘문과 차별’은 어떻게 생겨났나

기자 2023. 1. 2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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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과 통합을 둘러싼 논란을 분석하다보면 교육당국의 누적된 실책이 낱낱이 드러난다. 교육당국의 첫 번째 실책은 고교학점제 없이 문·이과 통합을 시도한 것이다. 흔히 ‘서구 선진국에는 문·이과가 없다’고 하는데, 이는 학생이 자신이 배울 과목들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경제를 배우고 공대에 진학하거나 미술을 배우고 철학과에 진학하는 경우가 나온다. 물론 완전한 자유 선택이 허용되는 나라는 거의 없고(영국만 그렇다), 대개 공통필수과목이 존재하고 과목군의 종류나 과목군별 과목 수 등이 규제된다. 대학 전공별 요구과목이 학생들의 과목 선택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문·이과 사이의 이분법적 구분은 없다.

이범 교육평론가·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이렇듯 문·이과 구분의 폐지(또는 통합)는 학생 개인에게 상당한 이수과목 선택권을 부여하는 제도, 즉 고교학점제를 전제로 한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2013년부터 문·이과 통합을 추진했으나 선택권 부여 계획을 세우지 못한 채 얼버무렸고, 문재인 정부는 고교학점제를 대선 공약으로 삼았으나 2025년 고1부터로 연기해 버렸다. 이 와중에 2022 대입부터 수능이 문·이과 통합형으로 바뀌었다. 과학과 사회 과목을 함께 응시할 수 있게 된 점은 긍정적이었으나, 이때 교육당국의 두 번째 실책이 불거진다. 수학이 공통범위에 더하여 미적분, 확률과 통계, 기하 등 3과목 중 하나를 택일하게끔 바뀐 것이다.

서구 선진국에는 대부분 입시, 즉 대입에 활용되며 고교 외부에서 출제되는 시험(external exam)이 존재한다(노르웨이와 캐나다 일부 주에만 없다). 그리고 대부분 입시에서 수학은 일반·심화 두 가지로 나뉜다. 그중 독일, 핀란드, 영국 등 상당수 국가에서 인문·사회·예술계열 지원자도 심화수학을 선택할 수 있다.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대부분 등급제 또는 원점수제)이므로 심화수학을 선택한다고 해서 불리해지지 않고, 예를 들어 경제학과 지원 시 유리해지는 경우도 있다.

고등학교에 수학 선택과목이 도입된 것은 이미 20년 전이다. 하지만 수능에서는 선택과목들이 수리 ‘가’형(속칭 이과수학)에 통합되어 있었다. 이게 일반수학·심화수학이라는 세계적 흐름과도 맞았다. 이랬던 수능 수학을 ‘공통범위+선택과목’으로 바꾼 이유는 뭘까? 수능 부담을 줄여준다는 명분, 선택과목을 늘릴수록 좋다는 강박, 그리고 수학 선택과목이 존재하는 미국 입시의 영향일 것이다. 참고로 미국의 입시인 SAT 및 AP 시험은 일반수학·심화수학 구조를 따르지 않은 유일한 예외로서, 수학 선택과목이 5가지나 있었다(2021년 개편 이후엔 4가지).

교육당국의 세 번째 실책은 기형적인 상대평가 및 표준점수 제도다. 12월3일자 칼럼 ‘상대평가, 어떻게 물리·경제를 죽였나?’에서 밝혔듯이 상대평가하에서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선호하는 선택과목은 기피 대상이 되어버리는’ 역설이 벌어진다. 게다가 2005 수능부터 원점수가 사라지고 상대평가 지표인 ‘표준점수’가 활용되는데, 이것은 전 세계 입시에서 유례없는 희한한 지표다. 특히 선택과목에 따라 표준점수의 최고치가 다르다! 2022 수능에서 만점자의 표준점수가 사회·과학 선택과목 간에는 8점까지 차이 났고, 수학 선택과목 간에는 3점까지 차이 났다.

가장 불리한, 즉 표준점수가 가장 낮게 나오는 선택과목은 뭘까? 사회·과학에서는 매년 달라진다. 원점수가 동일한 경우 ‘평균이 높은 과목일수록 표준점수가 낮게’ 나오는데, 과목별 평균점수가 매년 출렁이기 때문이다. 반면 수학 선택과목 중 가장 불리한 과목은 항상 ‘확률과 통계’로 고정된다. 왜 그럴까? 상위권 대학들은 이과계열 지원자에게 미적분이나 기하를 선택하도록 요구한다. 문과생은 고교에서 확률과 통계만 가르치는 경우도 있고, 선택이 가능해도 이과생과의 상대평가 경쟁을 최소화하기 위해 확률과 통계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수학 표준점수 계산방식은 사회·과학과 달라서 ‘공통범위 평균점수가 낮은 집단일수록 표준점수가 낮게’ 나온다. 결국 확률과 통계 선택자는 원점수가 동일한 미적분·기하 선택자보다 낮은 표준점수를 받게 된다. 이것은 명백한 구조적 차별이다.

이른바 ‘이과의 문과 침공’을 막을지 여부는 대학 몫이다. 하지만 침공을 불공정하게 가중시키는, 수학 선택과목에 얽힌 ‘문과 차별’은 교육당국이 타파해야 한다. 그러려면 엉망진창인 수능 성적 산출방식을 바꿔야 한다. 무엇보다 수학이나 사회·과학에서 어떤 과목을 선택하든 받을 수 있는 최고점수는 동일해야 한다. 표준점수를 원점수나 SAT식 변환점수(scaled score)로 대체하면 된다.

이범 교육평론가·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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