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분석] 이유 있는 바이 코리아

2023. 1. 21.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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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15조, 사우디 36조, UAE 37조 투자 이끈 비결
지난 14~17일(현지시간) 아랍에미리트(UAE)를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에게 UAE는 300억 달러(약 37조원) 규모 투자를 약속했다. UAE의 역대 국가 간 최대 투자 규모다. 48건의 양해각서(MOU)도 체결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등 기업인 100여 명이 경제사절단으로 동행한 가운데 한국에 대한 전폭적 신뢰를 보낸 것이다. UAE 방문을 마치고 19일(현지시간)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린 다보스 포럼에 참석한 윤 대통령은 특별연설을 통해 “반도체, 이차전지, 철강, 바이오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생산 기술과 제조 역량을 보유한 글로벌 공급망의 핵심 파트너가 될 것”이라며 ‘대한민국 1호 영업사원’을 자처했다.

하지만 정상외교 만으로 이런 성과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대대적인 ‘바이 코리아’(Buy Korea)에 나선 국가는 UAE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해 폴란드는 한국으로부터 K2 전차와 K9 자주포 등 124억 달러(약 15조3000억원)어치의 무기를 사들였다. 사상 최대치였던 한국의 지난해 전체 방산 수출액(170억 달러)의 73%가 폴란드 몫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도 한국에 오일 머니를 쏟아 붓고 있다. 지난해 11월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 방한 당시 양국이 체결한 MOU는 26건으로 총 290억 달러(약 35조8000억원) 규모다.

바이 코리아의 표면적 배경은 풍족한 자금이다. 지난해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에도 중동의 산유국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고유가로 득을 봤다. 국제통화기금(IMF) 등에 따르면 사우디의 지난해 경제성장률은 G20(주요 20개국) 가운데 1위인 7.6%, UAE는 5.4%로 추산된다. 2021년 5.7% 성장한 폴란드는 유럽연합(EU) 기금의 최고 수혜국이다. 윤서준 코트라 바르샤바무역관 과장은 “폴란드는 2021~27년 EU 기금 1조8243억 유로 중 7.3%인 1340억 유로를 배정받아 에너지·인프라·환경·국방 분야에 투자 중”이라고 전했다.

이는 사우디의 ‘네옴 시티’, UAE의 ‘마스다르 시티’ 등 초대형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와 폴란드의 대(對) 러시아 전선 강화로 직결되고 있다. 이들 국가는 중국·일본이나 다른 유럽 국가를 제치고 한국에만 두둑해진 지갑을 열었다. 폴란드는 기존 방산 분야 파트너였던 독일을 뒤로하고 한국을 선택했고, 사우디의 빈 살만은 방한 무렵 예정했던 일본 방문을 취소했다. 한국에 300억 달러 투자를 약속한 UAE는 앞서 중국엔 그 6분의 1(50억 달러)만 투자하기로 했다.

한국이 강점을 갖춘 분야이기는 하지만 이들은 왜 바이 코리아에 열을 올리고 있을까. 복수 취재원의 전언을 종합해보면 크게 네 가지 이유로 풀이된다. 우선 기업들의 계약 이행에 대한 신뢰다. 15년간 사우디·UAE에서 근무한 김재현 한미글로벌 이사는 “한국 기업은 다른 나라 기업과 달리 약속한 납품기한과 품질을 철저히 지킨다는 강한 신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김 이사는 “예컨대 건설업에선 중국이나 서구권 기업에 일을 맡기면 공사가 지연되거나 법정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흔하지만 한국 기업은 코로나19 팬데믹 등 고비가 닥쳐도 ‘고객이 왕’이라며 계약을 잘 이행했다”고 설명했다.


“오만·카타르·바레인·이라크·리비아도 한국 도움 필요로 할 것”

이번에 무함마드 빈 자예드 알 나흐얀 UAE 대통령이 윤 대통령을 만나 “어떤 상황에서도 약속을 지키는 한국을 신뢰한다”고 언급한 것도 이런 인식 덕이다. 폴란드도 지난해 국방장관이 “독일이 약속과 달리 전차를 20대만 공급했는데 수리가 필요한 상태였다”고 밝혔다. 오랜 군축으로 방산 인프라가 무너진 독일에 실망한 상태에서 한국은 지난해 12월 6일 계약을 체결한지 넉 달만에 최초 인도분인 K-2 전차 10대와 K-9 자주포 24문을 공급했다. 최기일 상지대 국방안보학부 교수는 “한국이 가격 경쟁력으로 독일을 제쳐 수주했다는 건 오해”라며 “K2 전차는 독일의 레오파르트 전차와 가격이 비슷했고 납기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한 게 컸다”고 전했다.

둘째 요인은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의 집약적인 고성장에 대한 동경이다. 지정학적 리스크를 이점으로 바꾸려는 폴란드, 사막에 각종 인프라를 구축하려 하는 사우디·UAE는 유사한 악조건을 딛고 일어선 한국을 롤 모델로 여겨 경제 발전의 파트너로 삼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는 것이다. 사우디 국부펀드 PIF가 인천 송도 간척 사업을 인상적으로 보고 2015년 포스코건설 지분 매입을 결정한 것이 한 예다. 박찬희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개발도상국들은 과거 비슷한 처지였다가 선진국으로 빠르게 도약한 한국의 노하우가 탐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셋째, 한국이 전략산업을 중공업에서 반도체와 정보기술(IT) 분야로 선회한 게 통하고 있다. 기계·철강·조선 등 중공업의 육성은 도로·항만·철도·발전소 등의 산업 기반이 약한 나라엔 시간·비용이 많이 들어 비효율적이다. 글로벌 산업 트렌드에도 맞지 않는다. 폴란드·사우디·UAE는 이 때문에 인공지능(AI)과 스마트시티 같은 첨단 IT 분야에 주력 중이다. 일본보다 빠르게 IT 전환에 성공했고, 중국보다 반도체 기술력에서 앞선 한국은 이를 도울 적격의 국가다.

마지막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호감과 친밀감이 작용 중이라는 해석도 있다. 예컨대 중동의 이슬람 문화는 한국 문화와 상당히 이질적이라고 언뜻 생각하기 쉽지만 외려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게 경험자들의 생각이다. UAE에서 개인 사업을 하고 있는 교민 이재혁(44)씨는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은 과거부터 부족 단위로 결속력을 다졌기에 가족을 중시하고 특히 연장자를 공경한다”며 “유교적 전통을 지닌 한국 사람과 신기할 정도로 잘 통한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나보다 나이 많은 거래처 사람을 깍듯이 대하고, 가족한테 주라며 한국 화장품 등 작은 선물을 건네면 형제처럼 친해져서 계약까지 무탈하게 진행된다”고 덧붙였다.

폴란드에선 K팝과 K드라마 등 K콘텐트가 젊은 세대를 열광시키면서 한국 문화에 대한 전체 세대의 관심으로 이어지고 있고, 중·장년층 이상에게는 한국 기업이 수십 년간 쌓은 이미지가 남아 있다. 과거 대우자동차 폴란드 법인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지냈던 유석환 로킷헬스케어 대표는 “폴란드 사람들은 대우를 자국에서 많은 일자리 창출과 경제 발전에 도움을 준 기업으로 아직까지 좋게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폴란드에 있는 삼성전자의 가전 공장과 LG에너지솔루션의 배터리 공장도 호감을 이어가는 바탕이다.

윤 대통령이 성공적인 영업 행보를 이어가려면 정부가 이런 배경을 참고해 전략적으로 나서야 한다. 김재현 이사는 “오만·카타르·바레인·쿠웨이트 등 다른 걸프협력회의(GCC) 회원국뿐 아니라 이라크·리비아처럼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고 정세가 안정되고 있는 개도국 역시 한국을 계속 필요로 할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기업 입장에선 리스크도 염두에 둬야 한다. 익명을 원한 기업 관계자는 “중국·튀르키예 등의 저가 공세로 한국은 이미 가격 경쟁에서 불리해졌다”며 “기업들이 고부가가치 분야 개척에 힘써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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