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G7 5개국과 2+2 협의체 만들어 안보 네트워크 확장
글로벌 외교 강화하는 기시다
우선 오는 5월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G7 정상회의를 앞두고 서방 지도자들과 신뢰를 쌓고 의제도 조율하기 위해 지난 9~15일 프랑스·이탈리아·영국·캐나다와 미국 등 G7 회원국 중 독일을 제외한 5개국을 잇따라 순방하며 개별 정상회담을 했다. 같은 기간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상은 멕시코·에콰도르·브라질·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지역의 주요 20개국(G20) 국가들을 돌고 워싱턴에서 기시다 총리와 합류했다. 총리와 외무상이 일본의 글로벌 외교 역량을 총동원한 셈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기시다 총리가 순방 중 G7 국가들과 개별 안보 협정을 줄줄이 맺고 자신의 글로벌 어젠다를 관철했다는 점이다. NHK 등에 따르면 기시다 총리는 지난 9일 파리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회담하며 프랑스군과 자위대의 공동 훈련에 합의했다. 이어 지난 10일엔 로마에서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를 만나 외교·국방장관의 2+2 협의체 신설에 합의했다. 이로써 일본은 미·영·프·독·이 모두와 외교·국방 2+2 협의체를 운영하게 됐다. G7 국가 중 유일하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이 아닌 일본이 글로벌 안보 네트워크를 의욕적으로 확장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주목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지난 11일 런던에서 리시 수낵 영국 총리와 정상회담을 한 기시다 총리는 상호접근협정(RAA)을 맺고 양국 영토에 상호 파병과 군수물자 이동을 쉽게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를 통해 양국 간 대규모 군사훈련도 복잡한 절차 없이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일본이 RAA를 맺은 건 동맹국인 미국과 지난해 호주에 이어 세 번째다.
BBC에 따르면 영국은 테리사 메이 총리 시절인 2017년 ‘글로벌 브리튼 전략’을 발표하며 인도·태평양 진출에 본격 나섰다. 2021년 9월엔 항모 전단을 파견해 오키나와 부근에서 일본·미국·네덜란드·캐나다 함대와 연합훈련도 했다. AP통신은 중국의 군사적 압박에 대한 우려가 커지자 양국이 군사적 유대 강화에 나선 것으로 해석했다. 양국은 1902~23년 러시아 견제 등을 위해 영·일 동맹을 유지했던 이후 군사적으로 가장 가까워진 것으로 평가된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13일엔 워싱턴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중국과 북한을 겨냥한 억지력과 대처력 강화를 강조하며 미국의 방위 약속을 재확인하고 일본이 주창한 반격 능력 확보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는 성과를 거뒀다. 미·일 정상은 공동성명에서 중국과 북한을 최대 위협으로 지목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일 안보조약 5조(집단 방위)에 따라 핵을 포함한 모든 능력을 사용해 일본을 방어하겠다는 공약을 재확인했으며 이는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에도 적용된다”고 말했다. 우주·사이버 분야 협력도 강조했다. 한결같이 기시다 총리가 원하는 내용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기시다 총리에게 “우리가 이렇게 가까운 적이 없었던 것 같다”며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이견을 가졌는지 찾아내는 게 더 어려울 정도”라고 립서비스를 하기도 했다. 기시다 총리가 지난해 말 안보 문서를 개정해 적의 미사일 기지 등을 공격할 수 있는 반격 능력을 갖추고 국내총생산(GDP)의 0.96% 수준인 방위비를 5년 뒤 2% 이상으로 배가하기로 한 결정이 일정 부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기시다 총리가 강조하는 글로벌 어젠다는 크게 세 가지다. 대만을 압박하는 중국과 핵·미사일을 개발하는 북한 등 동아시아 안보 문제 강조와 ‘핵무기 없는 세계’ 천명, 그리고 ‘글로벌 사우스(개도국)’와의 관계 강화 등이다. 아사히 신문 등에 따르면 기시다 총리는 G7 유일의 아시아 국가임을 내세워 오는 5월 G7 정상회의 때 동아시아의 안보 협력을 강조할 예정이다. 또 히로시마·나가사키 핵 투하 77주년에 맞춰 일본이 전 세계에서 유일한 핵 피폭 국가임을 앞세우며 G7의 핵무기 반대를 이끌 것으로 전망된다. 이를 통해 핵 위협을 해온 러시아를 견제하는 한편 일본이 핵 피해국임을 앞세워 태평양전쟁의 책임을 희석할 의도도 엿보인다.
주목되는 부분은 글로벌 사우스 결속이다. 요미우리 신문에 따르면 기시다 총리는 지난 4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대립과 분단이 표면화하고 있는 국제사회의 결속을 다지려면 글로벌 사우스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식량·에너지 위기에 함께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유엔총회에서 수차례 비난 결의안을 채택할 당시 상당수의 제3세계 국가가 기권한 게 계기가 됐다.
니케이에 따르면 중국·러시아 등 권위주의 국가가 제3세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는 동안 서방은 자유·민주주의·인권 등 서구식 가치를 압박해 오히려 반감을 불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 나라가 한 표씩 행사하는 유엔총회에서 숫자가 많은 아프리카·남미와 태평양 섬나라의 외교적 중요성은 상당하다. 대체로 가난한 이들 국가는 대러시아 제재가 값싼 러시아산 식량·에너지 공급과 지원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여기엔 최근 홍수와 가뭄 등 기후변화와 관련한 자연재해가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기후변화 유발에 책임이 있는데도 보상을 회피하는 서방 부자 나라에 대한 반발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기시다 총리가 ‘글로벌 사우스’를 강조하고 나선 것은 중·러에 맞서 제3세계에 대한 서방의 영향력을 회복하는 데 일본이 앞장서겠다는 선언으로 볼 수 있다. 오는 5월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서도 글로벌 사우스 대책을 논의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기시다 총리는 이번 순방에서 외교 역량을 총동원해 ‘책임 있는 대국’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다. 미·중 경쟁과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에서 인도·태평양과 세계의 안정을 내세워 ‘평화주의’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자위대의 글로벌 역량을 강화하며 일본이 보통국가로 가는 길을 활짝 열려는 의도 또한 엿보인다. 이를 통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이라는 염원에 한 걸음 다가서려 했다는 분석도 곁들여진다.
다만 30% 수준의 낮은 지지율과 방위비 증액을 위한 증세 문제, 그리고 북방 영토 반환 협상 등 러시아와의 관계를 고려해 G7 회원국 중 유일하게 정부 수반이 우크라이나를 찾지 않았다는 점 등이 기시다 총리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지적 또한 적잖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6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통화에서 키이우 방문을 요청받고 “검토해 보겠다”며 확답을 주지 않았다. 글로벌 안보 외교를 통해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꾀하는 기시다 총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적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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