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뮤지컬계 최고 기대작 ‘베토벤’이 막을 올렸다. ‘모차르트!’ ‘엘리자벳’ 등 빈 뮤지컬을 국내에 정착시키고 ‘마타하리’ ‘웃는 남자’ ‘엑스칼리버’ 등 해외 창작진을 기용한 오리지널 작품으로 호평 받아온 EMK뮤지컬컴퍼니가 7년의 제작 기간을 들여 야심차게 선보인 신작이다. 세계적 스테디셀러인 ‘모차르트!’ ‘엘리자벳’을 만든 작곡가 실베스터 르베이·극작가 미하엘 쿤체가 다시 뭉쳤고, 박효신·옥주현 등 스타 캐스팅도 기대감을 더했다. 사전에 일본 라이선스 계약이 협의되는 등 해외 공연계의 이목도 집중됐다.
결과물은 어떨까. 거장들의 전작 ‘모차르트!’와는 전혀 다른 접근이다. ‘모차르트!’가 아버지로부터 주입된 천재성의 속박에서 해방될 수 없었던 모차르트의 인생과 음악적 고뇌를 시적으로 그렸다면, ‘베토벤’은 베토벤의 선율로 그린 사랑 이야기다. 영화 ‘불멸의 연인’처럼 베토벤의 비밀스런 사랑에 관한 상상력을 펼치지만, 비밀의 여주인공은 학계의 정설을 따랐다.
비주얼은 공들인 흔적이 뚜렷하다. 멜로디·하모니·포르테·피아노·알레그로·안단테라는 음악의 6요소를 의인화한 혼령들이 베토벤의 분신처럼 움직이는 음악의 시각화는 인상적이다. 베토벤의 마음의 벽을 상징하는 육중한 구조물들이 사랑에 눈뜬 후 모두 사라지고, 천둥 번개 속에서 베토벤의 신들린 지휘 아래 모든 등장인물이 군무를 추는 1막 엔딩의 연출도 장관이다.
음악은 ‘베토벤 주크박스’ 그 자체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교향곡 7번과 5번 ‘운명’, 피아노 소나타 ‘비창’과 ‘월광’ 등, 베토벤의 주옥같은 기악곡 멜로디를 뽑아 만든 무려 52곡의 뮤지컬 넘버가 165분간 ‘베토벤 월드’로 푹 빠트린다. 사람의 음역대와 무관하게 작곡된 기악곡 기반인지라, 주연 배우들은 극강의 고음을 예사로 터뜨리며 자동박수를 유도한다. 2013년 ‘엘리자벳’으로 대극장 뮤지컬에 데뷔한 박효신은 경이로운 가창력과 독특한 카리스마가 더해진 괴물같은 퍼포먼스로 객석을 열광시키며 10년 만에 최고 배우로 성장했음을 인증한다.
하지만 빈 뮤지컬 거장들이 위대한 조상 앞에 작아진 탓인지, 서사가 매력 없었다. 아무리 러브 스토리라도 베토벤이라는 음악가의 숭고한 예술과 그 영감의 뮤즈가 케미를 빚을 때 감동이 나오지 않을까. 그런데 창작진은 이 거인의 어디가 경락인지 짚어내지 못하고 온몸을 더듬고 있는 느낌이다. 베토벤의 청력 상실과 예술가적 고집, 동생 부부와의 갈등,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 여주인공의 불행한 가정사 같은 에피소드가 리듬을 타지 못하고 파편적으로 뿌려졌고, 정작 고통 속에서 가장 훌륭한 음악을 완성할 때 나올 법한 카타르시스는 찾을 수 없었다.
베토벤은 어린 시절 ‘모차르트처럼 되라’는 아버지의 구속에 영혼의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하지만 열등감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면서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위대한 작곡가가 됐다. 이제 한국 뮤지컬도 스스로 우뚝 설 때가 됐다.